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A Oct 22. 2023

나의 17년짜리 식이장애

이제는 떠나보내며

이 글은 내가 전남편 H를 만나기 전에 쓴 일기를 다듬은 결과물이다. 사실 이런 적나라한 묘사를 에세이라고 명명하는 게 두려워서 써 놓고 폭탄처럼 안고 있었던 글이다. 소설의 한 장면으로 만들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실패했다. 오랜만에 꺼내어 읽어보니, 나를 17여 년에 걸쳐 괴롭힌 식이장애라는 외롭고 이해받기 어려운 병이 어떤 모습인지 정직하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위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래도 밖으로 드러내어 공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음식과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스럽고 음울한 관계를 맺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언어로 옮기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시간들, 그리고 수치심이 쌓여가면 갈수록, 이것을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밝혔을 때 그들이 나에게 건네어 줄 위안을 향한 욕망은 더 커져가기 때문인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나는 음식점 세 군데에서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켜 식탁에 가지런히 늘어놨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걸 입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되자 뱃가죽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만약 내 위가 정말로 폭발한다면 죽는 데 얼마나 걸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쯤 되면 언제나 그렇듯, 움직일 때마다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와서 그 생각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임신한 사람처럼 배를 소중하게 부여잡고 뒤뚱뒤뚱 화장실로 걸어갔다. 거울 앞, 티셔츠를 목까지 걷어 올리자 거대하게 변형된 내 몸이 보였다. 그 기괴한 모습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켜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심히 관찰을 했다. 옆에서 보니 젖꼭지보다 배의 산꼭대기가 더 높았다. 위가 이렇게까지 늘어날 수 있다니, 새삼 감탄하던 나는 몸 안에서부터 깔려 죽는 것 같은 느낌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 변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배 안에 있던 걸 모조리 토해냈다.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올려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다 끝났을 때에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침대로 기어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탈수에 저혈당 쇼크까지 와 손이 덜덜 떨리고 갈증과 허기가 뒤섞여 혓바닥이 뿌리부터 뱃속으로 말려 들어갈 것 같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두컴컴한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냉장고로 걸어가 1.5리터짜리 게토레이를 잡아 목구녕에 들이부었다. 뿌연 액체가 식도를 지나 위로 쏟아져 핏줄을 타고 줄기줄기 퍼져 나가자 신음이 나왔다. 제발 이런 짓은 그만하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불을 켜고 난장판이 된 식탁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벌여 놓은 이 작은 전쟁터를 원상 복구하는 동안은 잠시나마 정상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설거지를 다 끝내기도 전에 나는 한켠에 남아있는 빵 쪼가리며 쓰레기봉투 안의 과자껍데기까지 다 뒤져서 다시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었다. 집안에 입으로 들어갈 게 더 없다는 걸 깨닫고 무릎까지 오는 잠바로 몸을 가리고 델리로 달려가서 시리얼과 스낵 섹션을 돌며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장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계산대 뒤 남자의 눈에 맨다리에 겉옷만 입고 머리는 산발을 한 내가 어떻게 보일까 상상을 하다 진저리가 나서 영수증을 빼앗듯이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학기 중에는 하루 종일 굶거나 떠먹는 요구르트 하나로 연명하다가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억누르던 걸 폭발시키고는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하루가 음식이 몸 안에 존재할 때와 몸 밖에 존재할 때, 이렇게 둘로 나누어졌다. 놀랍게도 배가 부르고 고픈 게 어떤 건지, 하루 세끼를 먹는 게 어떤 건지, 음식을 소화시켜 대변으로 내보내는 게 어떤 건지 등등이 전혀 기억이 나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누워있는 날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무릎 같은 게 베갯속으로 내 뇌를 내리 박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그럴 때에는 눈알만 움직여 방바닥에 있는 인터넷 모뎀의 반짝거리는 초록색 불빛을 보는 걸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나는 천천히 교통사고를 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외할머니를 만나러 한국에 가게 되었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예약한 식이장애 전문 정신과 의원을 찾아갔다. 나 같이 가느다란 이십 대 여자들이 대기실 소파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울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다들 각자의 단단한 슬픔에 갇혀 있어 곁에 가 앉기가 망설여졌다. 볼이 통통한 간호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다른 환자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늘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안내를 했다. 생기 넘치는 얼굴이 순간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내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으며, 오라씨 괜찮아요? 깨우듯이 간호사가 물었다. 아 네, 죄송해요. 네, 좀 오래됐어요. 한 7-8년 된 거 같아요. 고등하고 졸업하자마자 다이어트를 시작해서요. 난생처음 듣는 것 같은 내 목소리는 공공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시구나. 정말 힘드셨겠어요. 자세한 건 선생님 보셨을 때 설명하시면 되세요. 말투에서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를 느끼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가득 쌓여 있는 책 사이에 둥지를 트고 살고 있는 것 같은 남자 의사가 내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얘기하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 한심해서 울먹거렸는데 그게 더 한심해서 지긋지긋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에 압도되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위로를 해 줄 차례인 걸 느꼈는지 의사는 크리넥스를 한 장 뽑아서 건네주며, 이렇게 똑똑한 아가씨가 왜 그럴까,라고 했다. 내가 멍청했으면 하루 종일 먹고 토해도 괜찮다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고, 대신 살을 빼면 많은 게 달라지는 걸 아니까요. 근데 이제 통제가 안 되는 지경이어서 멈추고 싶은데 멈출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의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라씨 같은 게 참 힘든 케이스예요...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불길하면서도 칭찬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다. 이거 먹고 또다시 다이어트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할 거 알지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 섭식중추와 포만중추에 관련된 이야기도 해줬는데,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이혼을 하고 나서 이 글을 다시 보니, 저 시기의 내가 왜 H에게 의존하고 매달렸었는지 마침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나를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자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식이장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었고 그런 그와 결혼한다는 건 내가 영원히 이 병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는 걸 포기했었고, 그걸 가능하게 해 줄 동반자로 그를 선택했다. 




*사진가 크레딧: Jorge Garcia, @photosbyjorge_

이전 05화 덴마크 음악 페스티벌에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