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kilde Festival 2017
덴마크 사는 젊은 사람들은 다 여기 온 것 같았다. 밤새 비가 와서 야영장 구역은 난리도 아니었는데, 저 진흙탕에서 밤을 보내고도 다음 날 음악을 듣겠다고 다시 공연장으로 기어 나오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비교적 우아하게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학교 건물 교실에서 다 같이 에어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옆 교실에서는 우리 다음 순서로 공연하는 행위예술 팀 20명이 자고 있었다.
초대형 야외무대에서부터 가건물 안 인디극장 분위기의 중형 실내무대, 그리고 우리가 공연하는 조그맣고 아늑한 클럽 같은 무대까지, 온갖 종류의 음악을 위한 장이 10개도 더 되는 거대한 페스티벌이었다. 케이팝을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무언가로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낯설기는 했지만, 덕분에 당시의 나의 남자친구, 지금은 전남편인 H와 나, 우리 밴드 멤버들은 탁 트인 풀밭에서 덴마크 음악 비평가 2명과 좌담을 하게 되었다. 스피커에서 소개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누워서 전날의 숙취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음악을 어떻게 만드는지, 케이팝은 어떤 음악인지 물어보는 질문에 운동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받는 선수처럼 답답하게 대답하던 H가 어려운 질문이 나오자 오라가 알려 줄 거예요, 하고 나에게 미루는 걸 보니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고 딱히 나을 것도 없어서 인터뷰에 집중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는데, 말하면서 제3자가 되어 이 상황을 보니 나에게는 아직 진단받지 못한 언어장애가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어쩜 말을 이렇게 못 할 수가 있냐.
완전 재밌다. 또 하고 싶어! 나의 면박에 전혀 굴하지 않고 폴짝폴짝 뛰면서 H가 말했다.
페스티벌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관객이 많아져서 무대 위에서 도저히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고 A가 불평했다. 나머지 애들은 별 상관없지만 안 들리는 건 맞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추가 모니터 스피커가 4대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다. 설치하러 가자. 어제 비 와서 다들 바쁘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애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H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배고파, H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른 시간이라 공연팀용 카페테리아에는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에 가득한 샌드위치며 샐러드 볼 따위를 보면서 칼로리를 계산하고 있는데 H가 양손엔 칵테일 세 잔, 겉옷 주머니엔 맥주를 한쪽에 두 캔 씩, 총 네 캔 꽂고 들어왔다.
바가 벌써 열었어, 그가 상기된 볼을 하고 말했다. 술을 마시기 직전이 그는 가장 행복해 보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봤다.
왜? 다 공짜잖아. 그리고 지금 열었다는 건 마시라는 말 아니야?
그랬다. 공연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스태프에게 이것들은 다 무료였다. 우리는 집에서 밥을 굶기는 애들처럼 그 자리에서 먹고 또 한가득 싸가서 먹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주머니에서 맥주를 하나 빼서 뚜껑을 땄다.
빨리 가자. 사람들 오기 전에 설치해야 돼.
육체노동은 시간을 물처럼 흐르게 해서 곧 우리 차례가 되어 버렸고, 까맣게 사라졌던 조명이 번개처럼 되살아 났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많은 눈빛이 주는 압박감을 이기고 노래를 불러나가는 우리 애들의 용기에 경외감을 느끼면서, 나의 긴장이 진동해 가 그들을 전염시키지 않기를 기도하고 숨죽여 바라봤다.
어느 순간 나는, 잠드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어느 순간이 오는지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내 몸의 감각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고 눈앞의 무대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소리가 나오고 있는 A의 얼굴을 보고, 그의 손이 그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걸 봤다. 베이스와 드럼과 기타가 안전하게 뜨개질해서 스피커를 통해 내보내는 폭신폭신한 망을 느끼면서, 나는 나의 식이장애나 H의 알코올중독이나 우리의 미래, 그리고 이런 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파편화된 단어들을 다 잃어버리고 그냥 듣게 되었다. 내 몸을 가볍게 떠서 어딘가로 훌쩍 보내버리는 물결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세상에는 내 마음의 작은 그릇이 다 담기에는 너무나도 큰 슬픔, 혹은 아름다움이 도처에서 넘실거리고 있어서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내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서 나는 다시, 그저 음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공연이 다 끝나고 땀과 비와 더워서 자기 얼굴에 부어버린 생수에 머리부터 신발까지 다 젖은 채로 애들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무대에서 내려온 반짝거리는 의상은 애처로워 보였다. A가 자기 바지 허리에 손을 넣어서 속옷을 끄집어낸 뒤 쥐어짰더니 물이 촤르륵 떨어졌다. 다들 기절할 것처럼 웃어 젖혔다. 타국이라 매니저이자 코디이자 촬영팀까지 되어버린 내가 캠코더를 A 얼굴에 갖다 대고 물었다.
이제 공연을 하루만 남겨 놓고 있는데 기분이 어때요?
영원히 안 끝났으면 좋겠어요.
A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고 있던 해가 A의 얼굴과 캠코더 렌즈에 반사되어 내 눈을 찔렀다.
더 위켄드The Weeknd 시작한대!
우리 중 누군가 외쳤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Starboy의 비장한 전주가 나오고 저 멀리서 사람들 비명소리가 들렸다. H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봤다. 뛰자, 그가 눈으로 말하고 나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이 노래를 놓칠 순 없지. 우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공기에 둥, 둥, 둥하고 퍼지는 베이스 소리가 심장으로 느껴졌다. 뛰어가는 어깨와 어둠 속에서 후드득 내리는 비가 너무 아름다워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진흙탕에 운동화가 부딪쳐 사방에서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더는 못 뛰겠어, 심장이 터져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코너를 돌자 탁 트인 거대한 무대와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무대에서 뿜어져 나온 인공조명이 우리 얼굴을 피처럼 물들였다. H의 턱에서 붉은색 땀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선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다 벗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섭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미친 사람들처럼 웃기 시작했다.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음악 사이로 꺽꺽대는 웃음소리와 아직 진정이 안 된 숨소리가 섞여서 우는 거 같기도 했다. 공연이 아니라 이상한 종교의식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