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은 한국 문학을 먼저 접하고 세계문학을 읽으면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 문학보다는 세계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우리나라 소설 속에 나오는 시대적 배경이나 환경 등은 내가 살고 있거나 나의 부모, 조상들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도 비슷한 것 같아 과몰입이 되어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심지어는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어 굳이 책을 읽으면서까지 고통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한국문학을 멀리했다. 물론 뿌리를 알려면 우리의 문학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 그만큼 감성이 여린 탓을 원인으로 돌려본다. 때문에 나는 우리와는 조금 동떨어진 바다 건너 서양사람들의 생활을 동경했다. 괴테의 시를 읽으며 그 나라를 궁금해했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읽으며 헤밍웨이를 그리워했다. 언젠가는 꼭 소설 속 배경들을 찾아보리라 생각하며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콜럼버스처럼 희망을 품고 살았다.
실지로 나는 카뮈의 이방인처럼 삶을 무기력하게 보낸 적이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 살아있음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시절이었다. 우연히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소설 속 배경들에 흥미가 생겼다. 나처럼 주인공이 아닌 배경이었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소설 속 배경에 위안을 삼는 것이라... 당시에는 그것으로도 꾸역꾸역 우겨가며 살아가는 것에 희망을 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배경이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현실에 대한 도피이자 회피였으며 내 삶을 잠시 피신시키는 위로였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었다.
마침내 오늘 나는 그곳에 왔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페인의 누에보다리를 걷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하고 배경이 된 스페인 남부지방의 론다 시가지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지 40여 년이나 더 지났으며 이제는 주인공들의 이름도 가물가물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스페인 땅을 밟는다. 미국에 살고 있는 헤밍웨이가 스페인 이 거리에서 작품을 집필한 것처럼 나도 그가 거닌 거리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 감동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누에보 다리는 1751년에 시작해 42년 동안 지어졌다. 무어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론다지방의 요새에 세워진 다리이지만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이어준다.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오바마도 이곳을 찾아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 정도로 아름답고 이국적이며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다리에는 슬픔이 베여있다. 다리를 건설할 때 좁은 협곡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또한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어 죽음의 다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다리 위에서 사람을 떨어뜨려 처형하기도 하였고 고문을 일삼기도 하였는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영화촬영도 이곳에서 처형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현재도 다리아래에는 감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아마도 헤밍웨이는 이러한 배경들을 그의 작품 속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담아내었던 듯싶다.
다리 아래 절벽에는 호텔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다.'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나오는 동굴 레스토랑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아찔한 절벽에서 조던을 떠 올린다. 조던(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산속 동굴에서 지냈다. 마리아를 만난 것도 동굴 속 카페였는데 어쩌면 저기 어디쯤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마리아와 사랑을 속삭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굴 속 침낭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이곳이 정열의 도시, 사랑의 도시이기 때문일까. 협곡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조던과 마리아가 마신 적 포도주를 마시며 나 또한 정열적인 사랑에 취하고 싶다.
때마침 귀에 익숙한 기타 선율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는 로망스다. 턱수염을 기른 집시가 로맨스를 연주한다. 추억을 부르는 연주이기도 한 기타 소리는 다리 사이로 번져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도 춤추게 한다. 11월의 토요일 오후, 반소매 차람의 현지인의 웃음소리가 활기차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다. 적포도주 같은 정열이 피의 죽음도 전쟁의 죽음도 무색하게 만든다. 인생은 포도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던이 다리 폭파를 위해 수없이 마신 두려움의 포도주이지만 마리아와 미래를 꿈꾸며 한 침낭 속에서 마신 포도주이기도 하다. 죽음의 다리였지만 부활의 다리로 새로 탄생한 숙성되고 세월을 이긴 포도주이기도 하다.
나는 잠시 다리아래를 내려다보며 3배속의 삶을 내려놓는다. 삶의 파편들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고 소설처럼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적 포도주면 어떻고 흑맥주이면 어떻겠는가. 나는 그들의 배경에 서서 나의 배경을 만든다. 두꺼운 겉옷을 벗어 팔에 걸며 흰 지붕 위에 반사되는 햇살에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