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by Rachel

0. 눈빛의 시작


기억은 어떤 얼굴을 닮아 있다.

나는 몰랐지만, 스무살이 된 이후, 창현이를 보는 순간 알았다.

스물셋, 오리고기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계단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

“어? 창현이 맞지?”

창현이라 이름 불린, 커버린 사람은 웃으며 말했다.

“와, 오랜만이다. 아직도… 거기 아파? 잠깐, 봐도 돼?”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응, 하나도 안 아파. 이것 봐. 자국 하나도 안 남았어. 티도 안나.”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그 순간이었다. 묻어두었던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오래전, 누군가의 걱정 섞인 표정과 창밖을 바라보던 옆모습,

그리고 귀 끝이 붉어진 뒷모습까지—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날은, 별일 없이 흘러가던 평범한 오후였다.

창밖의 햇살은 투명했고, 교실 안엔 종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음악처럼 흘렀다.

선생님이 내일 있을 조회를 설명하고 있었고,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창현이에게 커터칼을 빌려줬다.

파란색, 금속 재질의 흔한 커터칼이지만, 색상을 보고 신중하게 산 것이었다.

그 애가 뒤에서 툭 치며 말했다.

“야. 칼 좀 줘봐. 나 쓸데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넸고, 그 아이는 낚아채듯 그것을 받아들었다.

나는 칼을 다시 돌려받으려 손을 뻗었다.

창현이는 장난스럽게 그것을 흔들며 피했고, 나는 반쯤 웃으며 말했다.

“야, 빨리 줘. 그거 내 거야.”

찰나였다. 창현이와 내 손이 스치고, 커터칼이 툭—

무언가가 쓱 베인 듯한 감각.

그리고, ‘촤악—’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졌다.

화끈거렸다.

왼손 손바닥 오른쪽 끝, 깊게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하늘색 소맷부리에 번지기 시작했다.


“야, 너 피나.”

창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왜 피가 나?”

“남 일이냐? 너 피난다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조용하던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선생님! D가 피나요! 피 떨어져요!”


그때였다.

구경거리가 생겨서인지 여러명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뒷문 쪽을 바라봤다. 뒷문으로 양호실을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뒷문 쪽을 스치는 내 눈길 옆으로, 그 애의 표정이 스쳤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애는 학기가 시작된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고, 약간 미간을 찌푸린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저런 표정이야? 내가 다친 게 재미있나?’



생각하는 사이, 교탁에 계시던 선생님이 다가오셔서 상처를 살폈다.

피가 꽤 나오는 상처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승아! 양호실 데려다 주고 와 줄래? 피가 많이 나서, 양호실에서 보고 안 되면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

“네.”


그 애가 일어난 자세 그대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움찔하고 뒷걸음쳤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 애의 미간 찌푸린 표정이 무서웠다.

선생님은 그 애가 내가 올 때가지 기다리셨다가,

내 짝에게 가방을 챙겨놓으라고 말씀하신 다음 종례를 서둘러 계속했다.



“선생님, 이거 피는 어떡해요?”

걱정어린 목소리로 묻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창현이가 치우면 되니까, 너는 걱정 말고 양호실부터 가렴.”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잡고 걸었다.

3층 교실에서 1층 양호실까지—
계단을 내려갈 때 약간의 균형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뿐, 그 외에는 별다른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나는 그 애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그 애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붉어진 귀 끝, 살짝 굳은 표정—
어쩐지 나보다 더 놀란 사람처럼 보였다.

숨막히는 고요 끝에서, 말을 먼저 건넨 건 그 애였다.



“안 아파?”

“많이 안 아파. 그냥... 신기해서 그랬던 거 뿐이야.”

“뭐가 신기한데?”

“너, 화났어? 다친 건 난데 네가 왜 화를 내?”

“뭐가 신기해서, 피가 나는데도 그런 걸 보고 있어.”

나는 그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 밝은 척 말을 이었다.

“나 지방질이 손에 있는 것도 처음 봐서, 신기해서!

많이 아프지도 않아. 균형 잡는게 조금 힘들어서 그래. 양호실에 혼자 갈 수 있어.”

“너- 그 정도면 병원 가야 해. 꿰매야 할 걸. 나랑 같이 가.”

“아냐. 그리고 이거 나도 잘못한 거야. 창현이 많이 놀란 것 같던데. 위험한 줄 알면서 커터칼 잡은 나도 잘못한 건데.”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

무언가 말을 더 이으려다가, 한숨을 푹 쉬었던 그 애.

그 애는 잠시 나를 보다가, 양호실 문을 열어 주며 손짓했다.

그 애의 시선을 따라 들어간 나는, 양호 선생님과 마주쳤다.




“무슨 일-”

양호 선생님이 피에 물든 소맷자락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곧장 달려오셔서 상처를 살피시더니, 바로 말씀하셨다.

“어쩌지, 이거 양호실에서 처치할 수 없어. 동네 병원에 가야 한단다. 외과 수술 하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렴.”

“네.”

“많이 아프지는 않니?”

“별로 아프지 않아요. 화끈거리기만 해요.”

나와 선생님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그 애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쉬더니 말했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그래, 그럼 이제 가자.”

“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위치를 몰라서 그렇지.”

“그러면, 선생님이 그 병원에 전화할 테니까 갔다 오렴. 그 병원은 학교 앞 단지에 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는 동안, 그 애는 이마에 손을 짚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 애가 나간 틈을 타,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이렇게 급할 때는 실내화 신고 갔다 와도 되죠?”

“그래. 지금은 급한 거 같다. 너 재킷에서도 피가 떨어지네.”
“네?”

깜짝 놀라 보니, 복도에 점점이 떨어진 피가 보였다.


아, 이럴수가. 애들 다 청소 끝냈던데.

나 또 민폐 끼쳤네.



“아. 저 피. 이제 어떡하죠. 애들 다 청소 했을 텐데.”

“지금 그런 게 문제니? 지금 당장 가. 출혈로 쇼크 와도 문제가 크단다. 당장 출발해.”

“네.”



선생님 말씀에 따라 병원으로 향했다.

급하게 가는 길이라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취 주사를 맞고 꿰매는 동안, 나는 무섭지가 않았다.

사실, 주사를 맞는 게 아팠을 뿐 꿰매는 거 자체는 신기했다.

그래서 그걸 보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이 말하셨다.



“너 진짜 안 아프니?”

“그냥, 화끈거리고 말았어요. 지금은 신기하고요.”

“신경 안 다친게 처만다행인 줄 알아라. 어휴. 나도 이런 상처는 처음 본다.”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들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근데 그 노란 지방질 같은 건 뭐예요? 보랏빛 실선 같은 건 신경이 맞나요?”

“네 생각이 맞는데, 지금은 조용히 해줄래. 선생님 집중해야 한다.”

“네.”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입을 다물고 있으니, 여덟 바늘을 꿰맨 후 붕대를 감아 주셨다.

“감사합니다.”

“드레싱은 집에서 할 수 있니?”
“네.”

“실밥은 일주일 뒤에 풀면 되는데, 4일동안은 물에 닿으면 안 된다. 다시 꿰매야 해. 힘 줘서 터지는 것도 조심하고.”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꾸벅 하고 돌아섰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도 되겠지 싶어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숨을 몰아쉬는 그 애가 보였다.

“어? 니가 왜 여기 있어?”

“아, 진짜! 왜 혼자 갔어!”

“양호 선생님이 급하다고 하셔서..”

“선생님이 말씀 안 해주셨으면 모를 뻔 했잖아!”

“아니, 왜 화를 내? 나 지금 치료 잘 받았고 나왔는데.”

“어지럽거나 하진 않아? 무섭지는 않았고?”

“에이, 내가 왜 어지러워. 피 많이 흘린 건 아냐. 무섭지도 않고. 이제 초등학생도 아닌데.”

“많이 아파?”

“안 아파. 마취 풀리면 또 아프겠지. 지금은 마취 주사 효력이 있어서.”

“그래. 그럼 됐어. 네 가방은 창현이 어머니가 가져다 주신댔으니까, 학교 가서 신발만 챙겨 신고 가.”

“그거 말해주려고 뛰어 왔어?”

“아니- 네가 없어져서.”

“내가 왜 없어져? 양호 선생님 말씀대로 병원 왔는데.”

“후- 아니다. 됐어. 무사했으면. 내일 보자.”

“응, 내일 봐. 조심히 가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집 쪽으로 걸었다.



가방이 없어서 하교길이 무척 어색했다.

허전한 하교길, 가방이 없어서 혼나려나 생각하며 집에 가보니, 신발 가방과 책가방까지 모두 집에 와 있었다. 엄마에게 혼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엄마는 온화하게 나를 맞이했다.

“엄마, 미안해요.”

“많이 아팠니?”

“아니요. 근데 교복에 피가 좀 묻었어요.”

“이건 엄마가 세탁하면 되니까 신경쓰지 말고 쉬어라.”

“네.”


혼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날따라 일찍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불편한 손을 가지고 어찌저찌 준비를 하고 집에서 출발했다.

평소보다 불편한 손 때문이었는지, 나는 7시 10분이 아닌 20분에 교실에 도착했다.


“어. 와 있었네.”

그 애는 여전히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손을 많이 사용해야 하는 복도 쪽 창문은 이미 열려 있어서, 나는 바깥으로 통하는 미닫이 창문만 열면 됐다.

“이거 네가 한 거야? 고마워.”

손으로 낑낑대며 열려고 하니, 그 애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쪽으로 다가왔다.

“넌 그 손으로 또 환기를 하냐?”

“환기하는 거야 다른 손으로 해도 되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기분 좋아지잖아. 상쾌한 기분 좋잖아.”

“... 붕대, 많이 감았네.”

“응. 그래도 괜찮아. 오늘도 드레싱 하고 왔어. 밤새 조금 화끈하기만 했는걸.”

“됐어. 그럼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자리 가서 앉아.”

“오? 네가?”

“그래. 저기 위쪽 창문만 열면 되지? 그럼 내가 할게.”

“아니- 그 위쪽만 도와줘. 밑에는 나도 할 수 있어.”

“그냥 앉아 있어.”

살짝 딱딱해진 말투에 놀라서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탁 소리 나게 열고는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뭔가 잘못한 걸까? 나는 슬그머니 손을 숨겼다.

나는 그 때 그 애의 말투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단지, 그 순간 내가 잘못한 줄로만 알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쁜게 손 때문인 것 같아서.


그래서였을까, 그 애의 기분 나쁨은 그날 오후 최고치를 찍었다.



8시쯤 되자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도착했다. 물론, 어제의 사고 주인공 창현이도 함께였다.

창현이는 내 손을 보자마자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너 괜찮냐?”

“어. 근데 너 왜 그렇게 말해. 되게 간지럽다?”

“내가 너 다치게 했잖아.”

“아니지. 우리 쌍방과실이야. 나도 잡았잖아. 승이가 어제 말 안했어?”

“무슨 말?”

“선생님께 쌍방과실이니까 너 혼내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아아- 그 말 했어. 그리고 나서-”

“그럼 됐지.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 갖지 마. 나도 주의 안 했잖아.”

“그래도- 내가 미안하니까, 너 나 막 대해도 돼. 내가 네 손 나을 때까지 손이 되줄게.”

“에이, 뭘 그렇게까지 해.”

“그렇게 해야 해. 우리 엄마랑 약속했어.”

“어- 그러면 부탁할 때만 좀 해줘.”

“그럼 급식실 갔을 땐 내가 식판 들어줄게.”

“어.. 그러면 좋지. 근데 나랑 같이 밥 먹게?”

“실밥 언제 푸는데?”

“다음주 수요일쯤?”

“그럼 그 때까지 같이 밥 먹자.”

“알았어.”

둘이 속닥거리면서 킬킬 웃었는데, 나는 그 애와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 기분이 나쁜 듯 쏘아보는 그 눈빛에 나는 마음이 시렸다.

아니, 다친 건 난데 왜 자기가 다친 것처럼 자꾸 쏘아보는 건지.

상처받은 것처럼 보는 시선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점심 시간의 작은 일탈로 이어졌다.



“D야. 이건 네 거.”

“고마워. 혹시 너 잘 먹는 반찬 있어?”

“난 다 잘먹지.”

“그럼 나 이거 잘 못 먹는데, 이거 좀 더 먹어.”

입 안 댄 젓가락으로 서투르게 잡채를 넘겨주는데, 그 애가 한마디 했다.

“니네 사귀냐?”

어처구니 없는 시비에, 내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승아, 내가 손을 다쳐서 창현이가 도와주는 거잖아. 왜 그래?”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축구하러 간다며 가버렸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그 애를 보니,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뭐야, 또 화났어?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서러운 마음에 젓가락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하고 떨어져 버렸다.


그날, 나는 내 첫사랑의 얼굴을 처음 알았음에도 사랑인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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