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지지 않기
무언가에 대한 믿음, 절망을 초월하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기대를 품고,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나는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나를 엉망인 상태에서 꺼내준 건 ‘자기 암시’였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위로를 받을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인생에 생긴 공백을, 사람들이 나를 더 따뜻하게 위로할수록, 점점 더 넓어지기만 하는 그 공백을 말이다.
이렇듯 불안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큰 붓을 들고 마음속 색깔들을 섞어 검게 물들인다. 그리고 속삭인다.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어떤 불안은 두통으로 이어진다. 신경을 타고 흐르는 찌릿함은 무기력을 낳고 그저 침대에 누워 있고 싶게 만든다.
예전에는 불안과 무기력이 찾아올 때 집에만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의 무한성을 느끼며 누군가가 나를 끄집어내 줄 때까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너무 화창했다. 찬바람 대신 봄바람이 불었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꽃이 피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불안에 지지 않고 싶었다.
최근에 구매한 근사한 자켓을 차려입고 예쁜 가방 속에 작은 책과 노트를 넣는다. 편한 신발을 신고 거리에 몸을 싣는다. 따뜻한 햇살을 한 몸에 받으며 검은 불안을 비춘다.
애정하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 라떼 한 잔을 시킨다. 원두가 분쇄되는 소음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혼자 부산을 여행하던 중 독립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구매하게 된 책이다. 나와 비슷한 성향과 경험을 가진 작가의 이야기가 위로가 된다. 가장 마음에 박혔던 문장을 노트에 써 본다. 그냥 읽을 때와 달리 깊은 울림을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산다. 보랏빛 봄내음이 불안에 내려앉아 향기를 더한다. 꽃을 들고 걸어가는 내 발걸음이 경쾌하다.
불안에 맞서기 위해 정성스럽게 보낸 오늘이 꽤 마음에 든다. 순간순간 행복을 위해 애쓰는 내가 애틋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니, 어느새 마음속 불안과 무기력은 자취를 감췄다.
불안하고 두려울 때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으면 안 된다. 검은 마음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건 직무유기다. 내 몫이 아닌 불안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불행을 겪었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잔잔한 행복은 늘 손 닿는 곳에 있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행복한 찰나의 순간을 차곡차곡 적립하다 보면 불안이 엄습하는 주기가 점점 단축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