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에 대하여

평범함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느끼는 순간들

by 노멀휴먼

퇴근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누르고 나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은 무슨 일도 없었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별로 기억에 남는 일도 없이

그냥 흘러가버린 하루.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김없이 불 꺼진 방,

작은 전등만 켜진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냉장고에는 어제 먹다 남긴 반찬들,

싱크대엔 아침에 서둘러 치우지 못한 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냥 그런 하루의 저녁이 시작된다.


예전엔 이런 하루가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고,

이대로 늙어갈 것 같았고,

‘이래도 되나’ 싶은 불안이 마음 한편을 늘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정말 조금은 달라졌다.


언젠가 갑자기 몸살이 와서 며칠을 끙끙 앓은 적이 있다.

밤새 혼자 끙끙대며

누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며칠.

배달 음식조차 시킬 힘이 없을 때,

전날 미리 끓여둔 국 한 그릇이

그 어느 날의 외식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날이 지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문득 알게 됐다.

‘아무 일도 없던 날’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또 어떤 날은 지하철을 탔는데

앉자마자 졸다가 종점까지 가버렸다.

당황해서 다시 반대편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오히려 마음은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가 사라진 듯한 느낌.

하루의 작은 실수조차

마음의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점심시간에 창가 자리에 앉아

휴식시간을 가질 때도 그런 순간이 있다.


해가 잘 드는 창가,

누군가는 조용히 책을 보고,

누군가는 말없이 핸드폰을 넘긴다.

누구와 말하지 않아도,

그냥 그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회사의 점심시간일지 몰라도

그 시간만큼은 내게 작은 평화를 준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은

퇴근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천천히 걸어온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달콤한 걸 좋아하는 나 자신이

괜히 귀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서글픔이 아니라,

그냥 ‘괜찮다’는 기분.

이대로 집에 가도 괜찮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끝내도 괜찮다는 마음.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내 삶을 채우고 있다는 걸 문득문득 실감할 때,

그동안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살았다는 걸 깨닫는다.

대단한 성취, 큰 기쁨, 드라마 같은 하루가 아니더라도

그냥 고요하고 단정한 하루도

충분히 나를 살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것.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이렇게 묻는다.

“오늘, 무탈했어?”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로 충분한 날들이 많아졌으니까.


불 꺼진 집,

익숙한 정적 속에서 듣는 냉장고의 윙- 소음,

전자레인지가 데우는 동안 올라오는 밥 냄새,

그리고 침대에 앉아 내일 입을 옷을 생각하는 이 조용한 밤.


그 모든 게

어쩌면 나를 살게 하고 있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