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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우 Jan 12. 2023

학곡리의 겨울

눈이 쌓이며 발견되는 세상의 여백

  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잤다. 약간의 후회와 함께 커튼을 쳤다. 창밖은 눈이 흠뻑 쏟아지는 중이었다. 하늘은 흰색에 가까운 흐린 잿빛이었다. 땅은 빈 곳 없이 눈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잠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앞산이 신기루처럼 아득히 보였다. 거리는 하늘로부터 세례를 받는 듯 적막했다. 정적 사이로 간간 눈 치우는 소리가 났다. 버억 버억 땅바닥 긁는 소리가 향처럼 퍼졌다. 비질하는 소리도 드문드문 났다. 새가 먼 데서 우는, 섦은 소리처럼 들렸다.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서 나갈 채비를 했다. 검정 내복에 똑같은 내복을 껴입고, 가진 것 중 가장 두꺼운 양말을 겹쳐 신고,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꽁꽁 동여매고, 장갑을 챙겼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온몸에 눈이 부딪히며 사그락댔다. 팔목에 내려앉은 눈송이의 결정이 눈에 다 보였다. 껍질을 잃은 꽃씨 같았다.


  가끔 눈송이나 빗방울이 씨앗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구의 호흡이 담긴 씨앗. 그 숨을 들이마시며 들풀과 산짐승과 백 년 된 나무와 논과 호수와 가을 이삭과 길고양이와 버림받은 강아지와 내가 살아간다. 산을 살게 하는 것도, 새싹을 살게 하는 것도 작은 물방울 하나.

  눈은 발등이 빠질 정도로 쌓이는 중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재미있어서 한 걸음 두 걸음 걷다 보니 어느새 산책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시린 공기에 비해 날씨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온도가 크게 떨어져 날숨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에는 비릿하고 서늘한 겨울 내음이 나는데, 그 냄새가 참 좋다. 사랑하는 이에게 반갑게 안기는 순간처럼 좋다. 차가워도 좋은 건 아이스크림과 겨울 내음뿐이다.
 
  집 근처는 큰 나무와 널따란 밭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산책하기 적당하다. 오늘은 나무나 흙보다 그 위에 쌓인 눈이 더 많았다. 눈으로 덮이면 세상은 조금 수더분해진다. 눈을 얌전히 맞으며 조금씩 느려진다. 그게 눈의 속셈인지도 모른다. 넉넉하게 내린 눈은 거리 위를 하얗게 장악하고는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다. 황토색으로 바랜 강아지풀 위에도 쌓이고, 상록수 잎 사이 작은 새집처럼 쌓이고, 마른 나뭇가지 위에 눈꽃으로 피어 있기도 했다. 담장 위 날 선 철조망도 유순히 눈을 맞고 있었다.

  벽돌이 부서져 내린 세모난 빈틈에 눈이 잘게 차올랐다. 벽돌은 부서지기 전의 정갈한 직사각형을 기억해 냈다. 눈은 빈자리를 채운다. 기울어진 벽 한쪽을, 마른 나뭇잎 사이와 버려진 의자 위를, 시든 화분과 폐현수막을 덮는다.  눈이 쌓이면 비로소 비어있던 공간이 보인다. 꽉꽉 채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텅 비어있었다. 돈으로도, 쓰레기로도, 옷으로도, 책으로도, 사람으로도 채울 수 없는 여백이 있다. 그곳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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