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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우 Jan 10. 2023

웃기 위한 말들

   잠들기 전, 준과 나는 한두 시간 정도 수다를 떤다. 준은 엄청난 수다쟁이라서, 방과 방을 돌아다니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한다. 준이 말을 많이 하는 건 내가 그에게 애정을 느끼는 그의 모습 중 하나다. 저녁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었음에도, 침대에 느슨히 누웠을 때 대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파도처럼 말이 오간다. 그중 대부분은 웃음에 흩어진다. 별거 아닌 얘기에 눈물을 훔치고 광대와 배를 부여잡는다. 다음날 일기장에 그 시간을 남기고 싶어서 떠올리려고 해도 어쩌다가 그렇게 웃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난다.

   준이 폭소할 때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웃음이 크게 터지면 둘 다 상체가 뒤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광대가 올라가며 눈을 감긴다. 웃음의 진동과 겹치는 서로의 웃음소리가 방에 가득 찬다. 침대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뒹굴기도 한다. 정신없이 웃으면서도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한다. 가끔 준의 웃음소리에 귀를 모으고 싶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누를 때도 있다. 얼마 안 가 다시 커다랗게 웃고 말지만. 하루치 그늘이 투명해지는 시간이다.

   꼭 해야 하는 말은 아니어도, 당신 아니면 털어놓을 데 없는 사소한 이야기가 좋다. 가벼워서 한 번 웃고 마는 말들. 그냥 다 크게 웃기 위한 말 같고, 껴안기 위한 말 같다. 너무 많이 좋아하고 몹시 사랑해서 꺼내는 쓸데없는 얘기. 조금 더 오늘에 머물려고, 잠을 유예하려고 늘어놓는 찬찬한 수다. 준이 말했다. 수다는 못 고칠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절대 고치지 마. 제일 좋아.

   잠드는 데 오래 걸리는 나는, 잠든 준 옆에 누워 밤의 실루엣을 지켜본다. 암막 커튼을 치고 방에 있는 불빛을 모두 가려놓아 형광등을 끄면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어둠에 익숙해지면 준의 잠든 모양이나 멀리 뻗은 내 손바닥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 준을 향해 누워 눈을 감았다 뜨며 그의 머리카락과 어깨선, 푹신한 겨울 이불의 두께감을 눈으로 좇는다. 심심함을 못 참고 그의 따뜻한 어깨를 쓰다듬기도 한다. 준이 나를 향해 돌아누울 때 풍기는 그의 숨 냄새를 무척 좋아한다. 그의 코 아래 내 코를 갖다 대고, 그가 내쉬는 숨을 그대로 들이마신다. 그의 날숨에는 따뜻한 보리차 향이 난다.

   누군가의 인상적인 모습을 볼 때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 모습을 나만 안다고 생각했을 때 더욱 급격히 사랑하게 됐다. 그 사랑이 깊어지는 건 듣기 좋은 그의 웃음소리나 유순한 체취 때문이라는 것을, 준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되었다.

   이전에 하던 연애에서 나는 멋이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준의 숨에 베인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그런 불안한 가정을 점차 하지 않게 됐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함께 웃는 지금만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가 하루가 900개 정도 모였을 때 같이 살기 시작했고, 이후 2년이 지났다. 돌아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것처럼 느껴진다. 하루 한나절 함께 지낸 기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얼렁뚱땅 영원이 오는 건지도 몰랐다.

   잠든 준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으면, 그는 잠든 채 내 손 위에 자신의 뜨거운 손을 포갠다. 나는 준의 잠든 모습을 보느라 잠을 놓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글감이 쉽게 찾아온다. 메모해둬야 하는데 그의 손을 놓기 싫어서 글감을 놓친다. 물결처럼 멀어지는 단상이 아쉬우면서도 홀가분하다. 오늘까지 나를 살게 한 쓰는 욕구도, 읽는 욕구도 함께 흐려진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실수로 준을 깨울 때가 있다. 그는 기지개를 켜듯이 나를 부둥켜안고 잠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수다를 늘어놓다가 한바탕 웃게 하고는 금세 다시 잠든다. 준이 늘어놓는 수다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막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이야기가 선명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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