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덟 살에 가장 용감했다. 아마 초등학생이 된 설렘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몰래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려 불을 붙여 보기도 하고, 옥상 난간에 앉아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던 중학생 언니들이 올려다보고 웃으면 나도 같이 씨익 웃어 보였다. 크게 노래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잠자리나 귀뚜라미도 맨손으로 턱턱 잡았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애들한테 보여주고 다니며 나의 늠름함을 과시했다. 조그만 머리에서 생각할 수 있는 용감한 행동은 다 하고 다녔다.
말싸움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다다다 말로 쏘아붙여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유치원에서건, 동네에서건 친구들이랑 싸워본 적이 없었다. 싸우려면 의견이 안 맞거나 화가 나야 했는데 친구들이 착해서 짜증도 안 났다. 시비를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기회만 엿보고 있던 어느 날.
엄마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날이었다. 소공원 옆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공원 이모라고 불렀다. 공원 이모 자녀는 우리처럼 남매였다. 형호가 7살, 연주가 내 동생 예준이와 같은 6살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집에 올 때마다 방 안에 있는 물건에 손을 못 대게 하고 만질 수 있는 장난감을 하나씩 허락해 줬다. 나중에는 잘만 놀았으면서, 헤어질 때는 아쉬워서 엉엉 울었으면서, 처음 만나면 꼭 그렇게 주인행세를 했다. 그날도 그 애들은 남동생에게 제일 구린 장난감만 만질 수 있게 허락해 줬다. 남동생은 바퀴가 덜렁거리고 칠이 벗겨진 낡은 트럭을 군말 없이 가지고 놀았다. 나는 형호가 선물 받은 새 동화전집이 읽고 싶었다. 책등을 만지작거리는데 형호가 말했다.
“그건 우리도 안 읽어봐서 누나 읽으면 안 돼. 주인이 먼저 읽어야지. 그치이.”
“우웅. 맞아아.”
지금이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지금이 싸우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이때 하고 싶었던 말은 '야. 내가 나이가 더 많은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였다. 심한 말도 안 했고 나이가 많은데 뭐 어쩌라는 거지 싶지만, 그땐 나이만 말하면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초등학생이니까!
그래 바로 이거야, 싶어 말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연주가 울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숨이 가빠왔다. 머릿속으로 다섯 번 정도 연습하고 입을 뗐다.
“내가 나힉가.”
세 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된 것을 자주 겪어보지 못한 탓에, 가쁜 숨을 제어하지 못하고 말과 함께 숨을 먹어버려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망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말하다 말 수는 없으니 끝까지 뱉어보기로 했다.
“내가, 내가 더 많은데…….”
“뭐가?”
형호가 천진하게 물었다. 그러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애초에 왜 싸우려고 했더라? 가물가물했다. 투지는 사라지고 부끄러움만 남았다. 내가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왜 그랬지, 생각이 뒤죽박죽 엉켜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예준이가 트럭을 내려놓고 나를 데리고 거실에서 대화 중이던 엄마 옆으로 갔다. 예준이의 손은 뜨끈뜨끈했다. 긴장한 탓에 내 손이 무척 차가웠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오른쪽 옆구리에, 예준이는 엄마 왼쪽 옆구리에 파고들었다. 포근한 엄마 냄새에 급한 심장박동이 조금씩 느려지고 따뜻함이 퍼졌다. 짧은 모험은 그날로 끝이 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 예준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싸워본 적이 없다. 예준이는 그날 당황한 나의 모습을 보고 평생 져준 건지도 모른다. 아마 나의 순발력으로는 여전히 7살 꼬마애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