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른 꽃과 누름 꽃을 만들고 있다. 드라이플라워와 압화라고도 한다. 둘 다 꽃이 가장 예쁠 때 해야 하는 작업이다.
사진이나 기록처럼 순간을 잡아두는 일에 집착하는 편이라 그런지 요즘 재미를 느끼는 유일한 일이다. 좋은 거라면 뭐든지 오래 간직하고 싶다.
꽃은 이전의 모습과 단절되며 새 이름을 갖는다. 화분에 심기면 분화, 잘려서 유통되면 절화, 컨디셔닝과 핸드타이드 등의 과정을 거쳐 포장지로 감싸주면 꽃다발, 짧게 잘려 플로랄 폼에 꽂히면 꽃꽂이, 거꾸로 매달려 수분을 빼앗기면 드라이플라워, 종이 사이에서 수분을 납작하게 빼앗기면 압화, 보존 용액에 들어갔다 나오면 프리저브드 플라워.
어쩌면 과거에 두고 온 수많은 나 또한 다른 이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꽃이 수분량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듯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처럼 취급받고 싶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구별될 수 있을까? 눈물? 50번 울어본 나와 100번 울어본 나는 다른 나인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많이 울어보아도 비슷한 상황이 되면 매번 눈물이 나왔다. 그렇다면 대화? 많은 사람과 대화할수록 다른 내가 되었나?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편견만 강해질 뿐, 인간관계는 똑같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실패는 어떨까. 10번 실패한 나와 50번 실패한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실패는 많이 한다고 덜 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실패할 때마다 나를 알아갔다. 수많은 일에 있어서는 실패자가 되었지만, 나에 대해서는 조금 밝아진 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꽃은 꺾여도 실패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될 뿐이다. 꽃이 피었다 져도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나에게 '그건 실패'라고 했을까. 얼마든지 다시 꽃 피울 수 있는데. 실패란 불만족스러운 시기를 뭉뚱그려 표현하기 쉬운 방법인 것 같다. 포기를 실패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모든 건 스스로 이름 붙이기 마련이다. 자기 합리화일 뿐이어도, 씩씩한 편이 더 낫다. 100번 실패해본 나만 아는, 10번 실패했던 나는 모르는 사실 중 하나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누름 꽃처럼 가만히, 알맞은 이름을 부여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