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있으면서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그건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아. 그날은 조금 이상했어. 너와 네모난 벽 너머로 옥신각신 관계를 다듬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 서점에서 꼭 보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어. 그 위엔 장벽 같은 비닐이 없었고, 바글바글 사람이 많았는데도 내가 앉을 한 자리가 비어 있곤 했지. 나는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어. 내가 글씨를 읽을 때 이따금 숨을 참는다는 걸 너도 알 거야. 숨을 참듯이 삶을 이어나가는 게 나한텐 어렵지 않았어. 조금만 참고, 그렇게 누르고. 웃는 모습을 보면 좋았어. 그게 다인 줄 알았지. 십 분도 가만히 앉아있기 힘든 날이 왕왕 있었는데 그날따라 앉은자리에서 얇은 에세이 한 권을 모조리 삼켰던 것 같아. 벌써 이상하지. 나무 의자에 이름처럼 묻은 오랜 향을 들이쉬면서, 마주 보고 앉은 남자의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을 훔쳐보면서. 불안하다 싶었지. 사실 그 서점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어. 자주 가는 찐빵 가게가 있는데 내 앞에서 순서가 끊어져버린 거야. 모든 사람에게 떨어지는 재앙이 나에게도 예외 없을 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때로 운명을 피하고 싶었어. 나만은 아닐 거란 오만. 그런 거였지. 그때부터 자유 삼십 분을 돈 주고 산 방랑자가 되기로 했어. 하릴없이 걷다가 들어간 곳이 책방이었고, 나는 예상치 못한 취향에 순응하느라 누군가 잘라 놓은 뇌의 일부를 한 권 해치우고 십 분 정도 늦게 그를 만나러 떠나왔어. 웃음은 꿈에 본 것처럼 화사했던 것 같아. 그런데 나에게 돌아온 건 귀퉁이가 까지고 벗겨진 선물 상자였어. 목적 없는 서러움에 눈물샘이 왈칵. 순간 생각했을 거야. 내가 너무 많은 호의를 바랐는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무언가가 시시각각 치밀어 오르는 사람이야. 떠내려가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덜컥 겁만 먹는 바보. 너는 이런 내 모습을 전혀 본 적 없었어. 그래서 강요했던 거겠지. 내 생일에 네 행복을 빌어주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너는 나를 너무 많이 기다리게 했잖아. 내 진짜 웃음이 싫어서 틈틈이 지하 감옥에 가두고 죽지 않게 소량의 식량만 건네었잖아. 이길 생각은 꿈에서도 못 꾸게 했잖아. 나랑 제일 친하다고 해 놓고 그렇게 느끼게 행동했던 어떤 순간도 없었잖아.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나체의 나를 버렸잖아.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지금 이 순간마저도 의구심에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면 어쩌지, 오해한 거면 어쩌지. 나는 나를 오해해도 아무렇지 않으면서 너를 오해하는 건 무서웠던 걸까. 떠나갈 것보다 나를 싫어할 게 아팠던 걸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진실이었을까. 이런 고민이 쓸모는 있는 인생일까. 이제는 알 것 같아. 내 옆에 네가 있었던 이유. 받고 싶은 게 있어서 먼저 건네줬던 이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 냈던 이유. 약속 시간마다 하루가 넘게 늦었던 이유. 이유는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미안하다는 말로 어물쩍 넘어갔던 이유. 그런 형량들이 켜켜이 쌓여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봐. 나는 너를 원망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렇지만 너도 감당해야지. 내가 울 때 너는 몰랐으니까, 작은 손톱도 아픔이란 걸 느껴도 봐야지. 보여주지 않을 거라 편지라고는 할 수 없겠지. 그래도, 나는 머뭇거리고 있어. 첫 행의 좋았던 기억을 재활용해서 상기시키고 있어. 또다시 내 탓으로 돌리고 있어.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고 말하고 있어.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래서 네가 잠시 싫은 거라고. 나는 잠식되는 사람이니까, 그냥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길을 걸으면서도 다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어.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십 년이 넘는 시간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힘들어. 너를 더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어떻게 미워할 수만 있겠니. 고마웠다고, 그런데 네가 더 고마워해야 할 거라고. 마지막은 내 생각만 할게, 이기적일게.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쉬워서 미안한 나에게. 더 이상 감정 때문에 증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도록. 피하지 않는 연습을 할게. 우리 이제 조금 내려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