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산으로 들로 다니며 여린 새싹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꺾었을 아기 손 고사리, 가을엔 나무에 높이 달린 감을 따서 밤새도록 깎아 처마 끝에 겨우내 매달아 놓았을 곶감, 새벽부터 불린 쌀을 머리에 이고 방앗간에서 기다리며 뜨겁게 뽑아 담았을 가래떡, 퇴근 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갈무리한 들깨, 참깨, 땅콩, 찹쌀, 검은콩을 넣어서 손수 만든 한과들을 보는 순간 부지런하고 마음씨 고운 우리 형님의 손길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청정지역 구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우리 시댁은 남들과 다른 형제자매들의 우애가 있다.
빨치산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쓴 시아버님의 면회를 다니며 병을 얻은 큰 시어머님은 아들, 딸 둘을 낳고 젊은 나이에 병마로 시달리다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후 시할머님은 3대 독자인 시아버님의 재혼을 위해 동네방네 수소문한 결과 딸을 낳고 남편을 잃은 우리 시어머님을 며느리로 들이셨다고 했다.
어머님은 돌 지난 딸을 친정에 맡기고 아버님과 재혼해 돌도 안된 전처의 딸에게 젖을 물리며 정성으로 키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천은사에서 총무 일을 보셨던 시할아버지는 서너 명의 머슴을 거느린유지로 엄하기로 동네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라 시어머님의 호된 시집살이는 시퍼런 칼날보다 더 매서워 일 년 내내 엄동설한 칼바람이 몰아쳐 땅만 쳐다보며 기죽어 살았다고 했다.
그 후로 우리 남편을 낳았지만 어머님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시할머니가 엄마의 역할을 빼앗아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쪽 진 머리 할머니가 오셨고, 운동회나 소풍, 중학교 졸업식에도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뿐이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자 시부모님은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하셨고,고운자태를 지닌 어머님은 몸이 불편한 시아버님의 수발을 들며 공장에서 바느질 일을 하면서 5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다.
모 방송국에서 <6남매>란 드라마 속 주인공 장미희 씨를 볼 때마다 모진 세월을 꿋꿋이 견뎌낸 시어머니의 모습과 오버랩되어눈물을 쏟을 때가 많았었다.
중매로 만난 남편과 신혼생활을 할 땐 직장 다니는 며느리 푹 쉬라고 맛있는 김치를 담아 경비실에 맡겨 두셨고, 출산휴가가 끝나자 며느리가 신문사를 다닌다며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시며 우리 딸을 곱고 바르게 키워주셨다.
매년 12월 말일은 시어머님 기일이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춘다며 피자와 스파게티도 잘 드셨던 어머님을 위해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셨던 옥수수 술빵을 사서 영정사진 속 어머님께 존경하고 감사드린다고 입성수를 했다.
종가집 대소사와 궂은일들을 혼자 하시며, 母가 다른 동서한테매년 귀한 음식을 챙겨주는 형님과 선물로 맺어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형제들이 父와 母는 서로 다르지만 우애만큼은 따라올 집안이 없을 정도로 각별한 유산을 선물로 남겨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