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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용 Jan 26. 2023

선명한 소리의 조각들

건전지 닳은 녹음기처럼


백바지를 입은 단발머리 선생님의 흐뭇한 미소가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넓게 흐른다.


금강 상류 물줄기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오래된 벚나무가 초록 터널을 이루는 시골 중학교. 

2층 교장실 계단 모서리만큼 날카로운 바지 주름과 손등을 덮는 교복이 초등학교를 갓 졸업했음을 알려준다. 운동장에서 입학식이 거행되던중 허연 단발머리에 백바지를 입은 선생님이 체육교사라는 소개를 들었을땐  여러번 쳐다봐도 선생님이 맞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첫 체육시간. 바지 밑단을 두 번 접은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였는데 구령에 맞춰 트렉을 돌거나 편을 나누어 구기종목 경기를 할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백바지 단발은 우리를 나무그늘로 데려가 <4월의 노래>를 한 소절씩 가르치셨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노랫말은 박목월 선생의 아름다운 시를 가사로 지었다며 샤롯데의 연애편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꼭 읽어 보라며 숙제도 내주셨다. 

그때는 왜 이런 노래를 계속 배워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체육시간만 되면 그늘에 앉아서 남녀 합반인 60명이 합창으로 혹은 1분단씩 옥타브를 높여가며 돌림 노래로 <희망의 나라>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작사가 홍난파 선생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수업이 끝났다. 


일주일에 한 두번 배정된 체육시간은 운동장 나무 그늘에서 가곡 님이 오시는지, 목련화, 봄처녀, 그네, 가고파, 꿈, 산유화, 이별의 노래, 한송이 흰 백합화, 떠나가는 배, 보리밭, 고향의 노래, 봄이 오면, 기다리는 마음, 그리워, 얼굴, 비목, 선구자, 그리움, 뱃노래, 그리운 금강산 등의 노래를 불렀고, 비가 오는 날은 칠판에 한글로 써 놓은 <오 셀레미오> 노랫말을 따라 부르는 소리가 건전지 닳은 녹음기처럼 교실에 길게 늘어 났다. 


그러다 보니 음악 시간은 학생들이 가곡을 줄줄 다 꽤 차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음계를 가르치는 것마저 소홀하게 되었고 우리는 2중창, 3중창으로 영국 민요, 미국 민요, 러시아 민요와 가곡을 중학교 수준을 넘어 고등학교 이상의 곡들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목련 꽃이 3번 피고 지는 사이 변성기를 지나는 남학생들의 목울대는 테너와 바리톤을 바쁘게 오갔고, 춤추는 선생님의 지휘봉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 비켜갔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동무생각>을 부를 땐 선생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기도 했고 우리도 가사에 심취해 울컥하기도 했다.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수몰되는 마을 친구들은 학교를 중퇴했고, 고등학교 진학률은 60%를 넘지 않는 상황이라 선생님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가곡들을 모두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 달리기나 허들 같은 종목은 3학년이 돼서야 입시 때문에 겨우 배우는 시늉만 했다. 


졸업 후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 근처에서 친구와 자취를 했는데 어느날 주인집 아주머니로부터 옆집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저씨는 음대 졸업 후 자식들을 모두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로 키워 놓고 지금은 시골 중학교에서 임시직 체육 교사로 재능기부를 한다며 자랑을 했다.


윤재창 체육 선생님 나이가 되었을 무렵 나는 이탈리아 베니스로 배낭여행을 갔다. 조형미가 뛰어난 고딕 양식 건물 사이로 활처럼 휜 곤돌라가 강물 위를 유유히 떠다녔다. 

금발머리 뱃사공은 음대를 졸업후 3대째 내려오는 가업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며 이태리 가곡 <오 셀레미오>를 불러 주었다. 


께 벨라 꼬사 나이 유르 나 따에 솔 레 나 리아 세레나 돕뽀 나 템뻬스타

곤돌라 위에서 시골 중학교 체육시간 수업이 시작됐다. 

변성기를 지나는 학생들의 목울대가 춤주는 지휘봉을 따라 한 옥타브씩 높여가며 2중창 3중창으로 이태리 가곡을 따라 부르고 있다. 

브라보를 외치는 백바지 단발머리 선생님의 미소가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넓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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