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글쓰기, 양강과 음유
燕 · 趙古稱多感慨悲歌之士!
董生擧進士, 連不得志於有司, 懷抱利器, 鬱鬱適玆土, 吾知其必有合也!
董生勉乎哉!
燕나라 趙나라에는 예부터 감개에 젖어 슬픈 노래를 부르는 선비가 많았노라!
그대 동군董君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이어 뜻을 얻지 못하고 뛰어난 재능을 품은 채 울적한 마음으로 그 땅 향해 떠나누나. 그 앞날에 반드시 만남이 있음을 내 확신하니, 그대여 힘쓸지어다!
天地果無初乎? 吾不得而知之也!
生人果有初乎? 吾不得而知之也!
하늘과 땅은 과연 태초의 기원이 없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탄생은 과연 태초의 기원이 있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古之所謂豪傑之士者, 必有過人之節。
人情有所不能忍者, 匹夫見辱, 拔劍而起, 挺身而鬪, 此不足爲勇也!
예부터 호걸이라 불렸던 선비들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능가하는 절개가 있었도다. 인간의 정서로는 차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있거니와, 필부들은 모욕을 당하면 칼을 뽑고 일어나 가슴을 펴며 싸움을 하기 일쑤이나, 이는 참된 勇氣가 아니로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글은 기氣를 위주로 써야 한다 (文, 以氣爲主)" 《전론典論 · 논문論文》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문장이 비록 높은 경지에 있지만 모방할 필요는 없다. 그 자연스러움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曾鞏, <與王介甫第一書>: (歐陽修曰) 孟韓文雖高, 不必似之也, 取其自然。
趙郡蘇軾, 余之同年友也, 自蜀以書至京師遺余, 稱蜀之士, 曰: 黎生、 安生者。
旣而黎生携其文數十萬言, 安生携其文亦數千言, 辱以顧余。
조군趙郡 출신 소식蘇軾은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벗이다. 그가 사천에서 경사京師에 있는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지방의 여씨黎氏와 안씨安氏 성姓을 가진 두 선비를 칭찬하며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여생黎生은 수십만 자에 달하는 글을, 안생安生 역시 수천 자의 글을 가지고 민망스럽게도 나를 찾아왔다.
臨川之城東, 有地隱然而高, 以臨於溪, 曰新城。
新城之上, 有池窪然而方以長, 曰王羲之之墨池者。荀伯子≪臨川記≫云也。
임천성臨川城 동쪽에 은연히 솟은 동산이 계류溪流에 임하여 있으니, 그 이름이 신성新城이다. 그 신성의 위로 장방형長方形의 움푹 파인 연못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왕희지王羲之의 일화가 남아 있는 묵지墨池라고 한다. 순백자荀伯子의 《임천기 臨川記》에 적혀 있다.
※ 이정작용 移情作用 ※
우리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가 그 상황에 처한 것처럼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몹시 힘든 동작을 보면 자신이 힘들었을 때의 고통과 불쾌한 심정을 느끼게 되며, 아주 쉽사리 어려운 일을 해결해 내는 상황을 목도하면 자신의 동일한 경험을 떠올리며 희열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원리를 '이정작용'이라고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