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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Oct 21. 2024

23. 당신의 글은 청아한 학의 울음소리

소리의 글쓰기, 양강과 음유

선배님.

선배님은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시나요?



당신의 글은...



아침 햇살 그윽한 숲 속,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인 듯.

맑은 바람 올라타고 노을 구름 뒤로 사라지는 학의 울음인 듯.


선배님의 글은 한두 줄만 읽어도 그 부드러운 환상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그 아득한 그리움과 따사로운 기쁨, 애절한 탄식과 싸늘한 슬픔을 공유하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선배님 이야기에 설득당하고 맙니다.




언젠가 물으셨죠? 당신의 글 어떤 점이 좋으냐고요.

글쎄... 뭐가 좋지? 그 당시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서 오래오래 생각해 보았답니다.


저는 아주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도 너무나 힘이 든답니다. 특히 처음 시작할 때가 너무 힘들어요. 하고픈 말, 소위 '글감'은 분명 머릿속에 담겨있는데, 표현을 해내자면 빨래처럼 온몸을 쥐어짜야 합니다. 그런데 선배님 글의 도입부는 아주 평이하죠. 쉽게 쓰는 같으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이야기를 전개할 때는 봄날 새벽안개가 걷히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계곡 길처럼, 조단조단 조용한 목소리로 하고픈 말을 차분하게 풀어놓으시죠. 그 목소리를 들으면 선배님의 정서가 그대로 저한테 전이되고 맙니다. 슬프면 저도 슬퍼지고, 아프면 저도 아파집니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제가 그만큼 예민해서일까요?


마무리 부분에서는 청아하게 꺼억~ 울며 구름 뒤로 우아하게 사라지는 한 마리의 학처럼 무한한 함축과 여운이 느껴집니다. 오래오래 선배님의 목소리를 되새겨 음미하게 됩니다.


제가 선배님 당신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이들이 선배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선배님이 그렇게 쉽게 글을 시작하여 이야기를 조단조단 풀어나가는 그 방법... 그 이치를 동아시아의 전통 글쓰기 이론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평생 배운 게 그쪽 방면뿐이라서요.



양강의 글



선배님.


곰곰 생각해 보니, 역대 중국 문인들 중에서 글 깨나 쓴다고 소문난 양반들의 글은 대부분 선배님과는 다르게 아주 힘차게 시작하는 것 같더군요. 뇌성벽력과 함께 천인 절벽에서 엄청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광경. 문을 나서자마자 그런 스펙터클한 장관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죠.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시죠? 직접 느껴보실 수 있게 몇몇 작품의 도입부만 낭송해 보겠습니다. 중국 작품이니까 물론 중국어로 읽겠지만, 중국어를 모르셔도 아무 상관없어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용과 상관 없이 그 멜로디의 느낌만 감상하시면 되니까요. 더불어 우리 글도 하나 낭송해 보겠습니다.




(1) 한유, <동소남을 전송하며>


燕 · 趙古稱多感慨悲歌之士!
董生擧進士, 連不得志於有司, 懷抱利器, 鬱鬱適玆土, 吾知其必有合也!
董生勉乎哉!
燕나라 趙나라에는 예부터 감개에 젖어 슬픈 노래를 부르는 선비가 많았노라!
그대 동군董君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이어 뜻을 얻지 못하고 뛰어난 재능을 품은 채 울적한 마음으로 그 땅 향해 떠나누나. 그 앞날에 반드시 만남이 있음을 내 확신하니, 그대여 힘쓸지어다!




(2) 유종원, <봉건론>


天地果無初乎? 吾不得而知之也!
生人果有初乎? 吾不得而知之也!
하늘과 땅은 과연 태초의 기원이 없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탄생은 과연 태초의 기원이 있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3) 소식, <유후론>


古之所謂豪傑之士者, 必有過人之節。
人情有所不能忍者, 匹夫見辱, 拔劍而起, 挺身而鬪, 此不足爲勇也!
예부터 호걸이라 불렸던 선비들은 반드시 범인凡人을 능가하는 절개가 있었도다. 인간의 정서로는 차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있거니와, 필부들은 모욕을 당하면 칼을 뽑고 일어나 가슴을 펴며 싸움을 하기 일쑤이나, 이는 참된 勇氣가 아니로다!




(4) 민태원, <청춘예찬>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어떠셔요? 화산이 터져 시뻘건 마그마가 분출하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폭포수가 맹수처럼 무섭게 내달리며 심산 협곡을 빠져나오는 것처럼, 작가의 충만한 감정이 일시에 터져 나오는 느낌이군요. 이렇게 글을 시작하는 방법을 고대 중국 문인들은 '돌기법 突起法'이라고 했다네요.



중국 석우산 대선폭포岱仙瀑布. 높이 188m. 이 사진에는 양강의 소리가 내재되어 있다. 뇌성벽력 같은 그 폭포 소리를 들어보시라. 글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속에 소리를 담아야 한다.


이런 '돌기법'의 언어 운동을 선율로 구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베토벤 운명교향곡 도입부처럼 높은 곳에서 급속히 떨어지는, 낙폭이 큰 하강조下降調의 직선 운동의 선율 아닐까요? 아래 그림처럼요.

 


이렇게 고저의 기폭이 심한 선율은,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장력 속에 작가의 강한 정감이 응축되어 있게 마련이죠. 천변만화하는 선율의 운동 속에 작가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후련하게 분출시킬 수 있고, 독자는 낭송을 통해 화려하고 찬란한 작가의 정서를 맛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청나라 때의 요내姚鼐(1731~1815)는  '양강陽剛'과 '음유陰柔'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하는데요, 삼라만상의 구성 원리는 결국 음과 양의 이진법으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글쓰기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런 강건체의 글은 '양강의 소리'를 담은 글이겠죠.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통 문인들은 대부분 '양강의 소리'가 담긴 '양강의 글'을 좋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첫째는 문장의 '기氣'를 중시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음유의 글'은 '기'가 약하거나 아예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는 아마도 '정의의 사도' 맹자孟子가 천지 간의 호연정기浩然正氣를 강조하며, 도도한 물결이 거세게 흘러내려가는 듯한 웅변체로 글을 써 내려간 것이 후세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는 이렇게 선언을 하죠.


"글은 기氣를 위주로 써야 한다 (文, 以氣爲主)" 《전론典論 · 논문論文》


그가 황제의 신분이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만큼 설득력이 있어서였을까요. 아무튼 이 말은 그 후 중국 문인들에게 금과옥조가 되었죠.


특히 당나라 때 자유로운 산문체 글쓰기 운동을 앞장서서 주창했던 한유와 같은 인물은 '기'가 왕성한 글을 써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어요. 그 바람에 '양강'의 글은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문단의 주류主流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기'가 넘쳐흐르는 '양강의 글'을 선호하게 되었던 거였고요.




그러나 '양강의 글'은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처음 시작할 때가 어렵습니다. 뭔가 특이하고 기발한 어휘로 시작해서,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지듯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듯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엄청난 필력의 소유자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치가 그러하니,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인 한유와 유종원이 죽고 나자 당나라의 '산문체 글쓰기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실패의 원인은 세 가지쯤 있을 것 같습니다.


(1)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2) '기'라고 하면 오로지 '양강의 기'만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음유의 글'은 뛰어난 필력이 아니라도 쓸 수 있다. (3) '양강의 글'이 지니는 한계가 있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얘기하자.


'음유의 기'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사람은 앞서 말한 청나라의 요내였습니다. 하지만 생각은 미처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더라도, 이를 작품 창작에 적극 활용한 사람은 있었죠. 바로 송나라 때의 구양수歐陽修입니다. 그는 쉽고 평이한 글쓰기를 주창해서 송나라 때의 '자유로운 산문체 글쓰기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죠.


후세에 쓰는 문장가 여덟 명을 지칭하는 '당송 8대가' 중에서, 당나라 문인은 오직 한유와 유종원인 것에 비해, 송나라는 구양수와 그의 추종자 5인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음유의 글



선배님.


언젠가 일러준 말씀이 기억납니다. 제 글은 주체 못 할 정도로 감정이 넘쳐흐른다고 하셨죠? 구체적으로 지적은 안 하셨지만, 그러니 조심해야 한단 뜻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오래오래 음미해 보았답니다. 송나라 때의 대문호 구양수 歐陽修가 제자 증공曾鞏에게 일러주었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 같아서요.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문장이 비록 높은 경지에 있지만 모방할 필요는 없다. 그 자연스러움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曾鞏, <與王介甫第一書>: (歐陽修曰) 孟韓文雖高, 不必似之也, 取其自然。


이게 무슨 뜻일까요? 왜 맹자와 한유를 닮지 말라고 한 걸까요? 그 자연스러움은 배우되, 다른 면은 배우지 말라니, 그 다른 면이 대체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구양수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은 충분히 얻을 수 있죠. 앞에서 말했다시피 맹자와 한유는 '양강의 글'을 썼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양강의 글'을 쓰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대체 어떤 문제가 있길래 배우지 말라고 한 걸까요? 오래오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양강의 소리는 화려합니다. 감정의 분출에 매우 적합하죠. 하지만 그 선율은 돌발성이 강하고 불규칙합니다. 거대한 화산 폭발, 화려한 마그마의 분출... 그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곳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화려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도 멀리 물러나서 보려거나 다분히 회피하려는 심리 상태가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양강의 글'은 화려한 문체로 독자의 감성을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이성적 설득력은 떨어진다는 이야기. 근데 문학은 '아름다움 (美)'도 물론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사회'를 추구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따라서 독자를 설득하여 '진리(眞)'와 '선함(善)'의 세계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야기. 그러려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양강의 글'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 구양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문득 생각난 이야기. 문단의 어떤 양반이 선배님 시와 글이 좀 심심하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분은 아마 음유의 곡선 운동 선율이 지니는 효과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문학은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본질이자 궁극적 목표라는 점을 잘 인지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게 동과 서, 문학과 literature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증공의 글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모습인지 이번에도 몇몇 증공 작품의 도입부를 낭송해 볼 테니, 그 느낌을 직접 감상해 보셔요. 앞에서 감상했던 '양강의 소리'와 비교하며 들으시면 더 좋겠죠?





(1) 증공, <증여안이생서 贈黎安二生序>


趙郡蘇軾, 余之同年友也, 自蜀以書至京師遺余, 稱蜀之士, 曰: 黎生、 安生者。
旣而黎生携其文數十萬言, 安生携其文亦數千言, 辱以顧余。    
조군趙郡 출신 소식蘇軾은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벗이다. 그가 사천에서 경사京師에 있는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지방의 여씨黎氏와 안씨安氏 성姓을 가진 두 선비를 칭찬하며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여생黎生은 수십만 자에 달하는 글을, 안생安生 역시 수천 자의 글을 가지고 민망스럽게도 나를 찾아왔다.


 

(2) 증공, <묵지기 墨池記>


臨川之城東, 有地隱然而高, 以臨於溪, 曰新城。
新城之上, 有池窪然而方以長, 曰王羲之之墨池者。荀伯子≪臨川記≫云也。    
임천성臨川城 동쪽에 은연히 솟은 동산이 계류溪流에 임하여 있으니, 그 이름이 신성新城이다. 그 신성의 위로 장방형長方形의 움푹 파인 연못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왕희지王羲之의 일화가 남아 있는 묵지墨池라고 한다. 순백자荀伯子의 《임천기 臨川記》에 적혀 있다.






어떠셔요? 양강의 소리와는 완전히 다르죠? 마치 선배님 글을 읽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선배님 글이 훨씬 더 운치가 있지만요. 선배님처럼 수양이 깊은 선비가 후학인 저와 함께 찬찬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듯, 연세 드신 어르신 또는 조신한 어머니가 따스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타일러 주시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런 느낌의 소리를 요내는 '음유陰柔의 소리'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평탄하게 펼쳐내는 '평서법 平敍法'의 언어 운동을 선율로 구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절제된 감정 때문에 고저의 낙폭이 매우 작고, 목소리의 강약 변화도 별로 없는, 수평에 가까운 선율 운동을 보이지 않을까요? 아래 그림처럼 말이죠.



도입부는 감정이 절제되어 고저 · 강약 · 경중 輕重 등의 변화가 거의 없는 '평직조 平直調'. 중반부는 천천히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 종반부는 완만하게 상승하며 마무리를 짓는군요. 선배님 글을 낭송할 때 나타나는 양상과 유사합니다.


이런 음유의 글을 낭송할 때 나타나는 멜로디의 특징은, 주기적으로 부드러운 곡선 운동이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곡선의 선율은 예술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이정작용 移情作用 때문에 몇 가지 예술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 삼아 정리해 보겠습니다.


※ 이정작용 移情作用 ※

우리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가 그 상황에 처한 것처럼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몹시 힘든 동작을 보면 자신이 힘들었을 때의 고통과 불쾌한 심정을 느끼게 되며, 아주 쉽사리 어려운 일을 해결해 내는 상황을 목도하면 자신의 동일한 경험을 떠올리며 희열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원리를 '이정작용'이라고 일컫는다.





첫째, 평이한 느낌을 준다.


곡선 운동의 선율을 내재하고 있는 글은 참 쉽게 썼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직선 운동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힘을 소모해야 하지만, 곡선 운동은 그럴 때에도 힘의 소모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둘째, 우아한 느낌을 준다.


곡선 운동의 선율을 내재하고 있는 글은 힘의 소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우아한 elegant'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그 어떤 사물에서 '우아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 그 사물에 힘의 소모가 적은 '곡선 운동'이 들어가 있어서라네요. 여성의 육체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그러니까 제가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서... 글이 참 아름답다, 근데 어쩜 이렇게 쉽게 썼지? 그런 느낌을 받는 것도, 선배님 글을 낭송할 발생하는 곡선 선율효과 때문이었군요.


특히 종반부에서 완만한 상승 곡선으로 마무리를 지어주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마무리하면 묘한 함축과 여운이 발생해서, 독자가 두고두고 작가의 말을 자꾸만 음미하게 된다네요. 선배님 글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짓잖아요. 제가 자꾸만 선배님 글이 생각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요.


참, 선배님이 그러셨죠? 쓸데없이 집에서 묵언 수행 같은 것일랑 하지 말고, 써놓은 글이나 자꾸 소리 내어 읽으면서 고쳐보라고 하신 말씀. 크~ 알고 보니 이런 깊은 뜻이! 선배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



셋째, 인성人性을 감화시킨다.


음유의 곡선 운동 선율에는 특징이 있어요. 처음에는 부드럽고 여유 있는 선율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이어서 간명하고 균형적인 곡선 운동의 선율로 삶의 이치를 사근사근 일러주며, 마무리 부분에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련한 선율로 무궁한 여운을 던져줍니다.


공자에 의하면 이런 곡선 운동의 선율은 인성人性을 감화시킨다네요. 공자는 당시 유행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선별한 노래 모음집인 《시경》을 모든 경전의 첫 번째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또 《예 禮》에서 《악 樂》을 따로 독립시켜 경전으로 삼았죠. 공자가 그렇게 시와 음악을 중시했던 이유, 바로 그런 곡선 운동의 멜로디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곡선 운동의 선율은 왜 그런 교화의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기적인 곡선 운동의 선율은 마음의 평온함을 가져다주고, 정신적인 완성을 이루게 도와준다고 합니다. 즉 주기적인 특성 때문에 무의식 중에 이어지는 멜로디를 예측할 수 있게 되고, 그 예측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즐거움을 통해 정신적 교감을 이룬다는 얘기죠.


선배님의 글이 아주 좋은 사례일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선배님의 어떤 글은 내용만 보면 분명 슬퍼서 쓰신 것 같은데요, 대부분의 독자들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힐링이 된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게 바로 선배님의 글이 내재하고 있는 음유의 선율이 지니는 '교화'의 효과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넷째, 과유불급!


그러나 지나치게 무미건조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선배님의 글은 그럴 가능성이 없지만, 지나치게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소리는 인간의 개성이 사라진 기계음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만약 어떤 선생님이 그런 목소리로 강의한다면 대부분 학생들이 졸고 말겠죠?


하지만 적절하게 운용한다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겠죠. 적절한 곡선 운동의 선율은 엄숙함과 장중함, 진지함과 성실함, 평범함과 유순함, 담백함과 진솔함... 이런 긍정적인 요인들을 작동시켜서 상대방이 신뢰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서게 한다죠. 잘 기억해야겠습니다.


제가 오늘 예로 든 증공 산문은 너무 고지식한 소리만 내재되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규칙과 불규칙, 그 운영의 묘를 적절하게 살려준 구양수의 명품 산문, <가을의 소리 秋聲賦>로 제대로 된 음유의 선율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



선배님,

당신의 글을 읽으면...


때로는 매일 같이 대하는 친한 친구가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이 내미신 다정한 손을 붙잡는 것 같구요. 선배님의 아득한 그리움과 애절한 탄식은 바로 곧 저의 것이 되며, 선배님의 깊은 슬픔은... 따스하게 손잡고 위로해 드리고 싶게 합니다.


선배님,

당신의 글을 읽으면...


때로는 한 마리의 학을 올라타고 구름 위를 노니는 기분이 됩니다. 인간 세상 고통과 아픔을 멀리 떠나, 신선이나 선녀가 된 것처럼 천상 세계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당신의 글을 다 읽고 나면, 청아한 학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자꾸만 맴돕니다.


선배님,

당신의 글을 읽으면...


저도 선배님처럼 쉬우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한 글, 긴 여운을 주는 글, 타인에게 힐링을 선사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선배님,

당신의 글을 읽으면,


아예 당신이 되어버리고 싶습니다.

저 자신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음유의 아름다움. 아득한 그리움과 애절한 탄식, 따사로운 기쁨과 위로하고픈 슬픔이 느껴진다.





[ 보태기 ]  '인문학 위기'에 대한 제언



인문학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독서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의 풍토를 아쉬워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필자는 시각적인 면에 치중한 문자텍스트에 얽매인 글쓰기는 언제나 맞춤법이나 어법 등 연역법적인 명제에 구속되어, 그 글의 모든 내용이 규격화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칫 인간의 다양한 말투와 개성이 사라진 천편일률적인 죽어버린 글로 전락하기가 쉽고, 그래서 독자들이 그렇게 규격화된 책들만 읽다 보니 독서에 재미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딱딱하고 엄숙하게 지식과 정보만을 전해주는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단어만 가득 찬 그런 글은 일반적으로 잘 읽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정해진 틀 속에 구속하고,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끝없이 따지기만 하는 분석과 논리만이 가득 찬 그런 글은, 일반 독자들에게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소리의 글을 쓰자. 소리는 호흡이요, 생명이다. 소리는 없고 문자만이 존재하는 그런 글은 정적만이 감도는 회색의 차갑고 음침한 세계다. 그런 글은 작가와 독자, 화자와 청자, 인간과 인간 사이를 더욱더 분리시킬 뿐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다.


중국의 문인들은 예로부터 ‘기 氣’가 넘치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작가는 생명력이 넘치는 글을 써야 하고, 독자는 낭송으로 소리를 재현하면서 작가의 감정과 하나가 되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소리가 살아있는 글을 써야 한다. 작가는 감정의 기복이 멜로디처럼 넘쳐흐르는 생동감이 충만한 글을 쓰자. 독자는 낭송을 통하여 작가의 독특한 억양과 리듬의 변화가 춤을 추는 듯한 그 소리의 글을 재현해 보자. 학자들은 비록 학술 논문을 쓰더라도 누구에게나 음성 지원이 되어 쉽게 읽히는 그런 소리의 글로 써보도록 하자.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지식과 정보 전달을 위주로 하는 문자텍스트의 교육을 탈피하여 소리의 교육을 실천하자.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은 ‘學文’이 아니라 ‘學問’이다. 다시 말해서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어보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머리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 학문인 것이다.


무엇으로 그 '학문 學問'을 후학들에게 전수해주어야 할 것인가? 차갑게 죽어있는 문자일까? 아니다. 소리다. 따스하고 싱그럽게 살아 숨 쉬는 소리다. 문자는 현상학적이며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분리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 반해, 소리는 모든 것의 내면적 본질이자 인간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결합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학문 學問'은 언제나 겸허하게 작아지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교육이란 결국 간절한 정성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 아닐까?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요,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대학大學 아닌가.


그 학문은 소리로 교육해야 한다. 삶과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인간 사랑의 따스한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들려주도록 하자. 생명력이 충만한 목소리로 학생들의 내면세계에 벼락을 내리쳐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싱그러운 지혜와 감성의 눈을 번쩍 뜨게 해 주자.


그 순간 강의실 안에 충만하게 넘쳐흐를 그 감정의 일체감을 생각해 보라.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학풍學風의 전승 아닐까? 학문이란 소리로 배우고, 소리로 전수하는 것이다.


이제는 지식과 정보, 분석과 논리 위주의 ‘문자의 글’, ‘문자의 교육’을 버리고, 지혜와 감성으로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소리의 글’, ‘소리의 교육’을 복원해야 한다. 소리의 교육으로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고, 소리의 글로 작가와 독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사랑의 미디어인 소리로 메마른 감성에 싱그러운 생명력을 주입하고, 시멘트 빌딩과 차가운 기계의 장벽 속에 외롭게 고립된 현대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문학의 위기가 극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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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 낭송

# 문기文氣

# 소리의 글쓰기

# 양강陽剛과 음유陰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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