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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Oct 24. 2024

24. 가을이 오는 소리

구양수, <추성부> 감상

선배님


오늘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가을의 소리 秋聲賦>라는 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대 문호인 구양수歐陽修(1007~1072)가 만 52 세 되는 해의 가을에 지은, 중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 중의 명작입니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이 작품을 소개할 예정인데요, 이번 글은 제목을 <가을이 오는 소리>로 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 첫 단락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 제목이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폭염이 길어지다가 기온이 돌연 급강하! 가을이 오자마자 단풍이 들기도 전에  떠나버리는 것 같아, 시절과 제목이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선배님께 소개해드릴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서 민망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기존의 번역과 새로운 감상법



오늘은 작가와 작품의 배경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고, 바로 [제1 단락]의 번역과 감상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을의 소리 秋聲賦> 전문全文을 보시죠.



이런 걸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선배님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하군요. 아마 선배님도 도망가고 싶지 않으실까요? ^^ 눈으로 보면 분명 기가 질립니다. 쳐다보기도 싫으실 겁니다.


음... 이거야 표점 하나 없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은 중국어 원문이니까 그렇지만,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 놓으면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막상 우리말 번역문을 보면 오히려 더 헷갈려하실 걸요? ^^;;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중국문학 교재로 사용되었던 《고문진보 古文眞寶》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 원元 나라 때 역대의 시문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해 모아놓은 책인데요, 1964년에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본 초판을 발행한 이후 1981년까지 17년 동안 무려 24판이나 재발행했던 스테디셀러랍니다.


보물 967호, 상설고문진보대전전집 詳說古文眞寶大全前集.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평대군의 글씨로 1450년 문종이 즉위하던 해에 금속활자인 경오자庚午字로 찍은 책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던 안평대군이 사약을 받고 죽자마자 경오자를 녹여서 을해자乙亥字를 주조하였기에, 경오자로 인쇄된 활자본은 매우 희귀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르긴 해도 그 후로도 지금까지 상당히 팔렸을 거예요. 한학과 중국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필독 도서나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그 책에 <가을의 소리 秋聲賦>가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 첫 단락만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歐陽子 밤을 당해 글을 읽는데, 소리가 西南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 있으니, 놀라서 이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상도 하다. 처음에는 비 쏟아지는 소리 더니 바람이 우는 소리로 변하고, 문득 기운차게 달려 물이 바위에 부딪쳐 울리는 소리를 하였다. 파도가 밤에 갑자기 일어나고 風雨가 급히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물건에 닿으니, 날카롭고 단단한 쇳소리가 나면서 金鐵이 모두 울리는 것 같았다. 또 적을 향해 달리는 병정이 재갈먹이를 하고 달림과 같은데, 호령도 들리지 않고, 다만 인마가 달리는 소리로만 들리기도 하였다.


나는 동자에게 일러 가로되,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네가 나가 보아라. 동자 가로되, 별과 달이 희게 빛나고 깨끗하며 銀河가 하늘에 있고, 사방에는 인적도 없는데,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난다 하더라.





우리말 번역으로 살펴보시니 느낌이 어떠신가요? 우와, 역시 명작 중의 명작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음... 선배님은 어떠실지 모르겠으나 그 옛날 대학생 소오생은 정말 좌절했답니다. 으악! 쭝국 쌀람들은 왜 시詩나 글을 이런 식으로 쓴다지? 너무 이상해. 재미가 하나도 없잖아... 애꿎은 중국 문인들만 욕하면서 전공 선택을 잘못했다고 투덜대곤 했죠. 중국 고전에 대한 이런 편견이 저 혼자만의 것이었을까요?


번역! 


번역의 문제가 정말 굉장히 심각합니다. 뜻글자인 한자를 소리글자인 한글로 옮기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의 성격을 면밀히 파악해서 그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으로 번역을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양 언어권이 아닌 동아시아의 문인들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문제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동아시아 고전을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요,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긴 좀 민망하지만, 소오생의 중국문학 수업에서 이 작품을 배웠던 학생들은 다들 너무나 즐거워했답니다. ^^;;; 왜 그랬을까요?


<가을의 소리>, 이 작품의 최대 특색은 제목에도 쓰여 있듯이 '소리'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작품도 그러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니까 특히 '소리'로 감상해야 합니다. 낭송! 낭송을 해야 합니다.


저는 과목을 막론하고 필기시험을 보지 않는답니다. 문학 과목은 '독후감'과 '낭송 테이프' 제출로 성적을 평가하죠. 학생들은 제가 수업시간에 낭송한 것을 녹음해서 각자 연습 후 녹음테이프로 제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어를 잘 못하는 학생들도 제법 훌륭하게 낭송을 해와서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배우는 것처럼, 제 낭송 녹음을 무조건 자꾸만 따라 하다 보니 저절로 그리 되었다네요. ^^


그중 우수한 테이프 몇 개를 골라서 들려주면 강의실은 함박웃음으로 즐거움이 넘쳐흐르죠. 한 번은 어떤 학생의 <가을의 소리> 낭송 테이프를 학회 세미나 장에서 발표한 적이 있는데요, 목소리의 주인공이 중국 아나운서가 아니라 한국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낭송'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면 모두가 너무너무 즐거워집니다. 선배님도 한번 참여해보지 않으시렵니까?


각설!


제가 먼저 해볼까요? 분량 관계로 첫 시작 부분만 두 번 낭송하겠습니다. 한 번은 중국어로, 한 번은 소오생 버전 한국어 번역문으로. 그런데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중국어를 못하셔도 중국어 낭송을 잘 들어보셔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아무 상관없답니다. 소리를 들으며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감을 잡는 것 자체가 작품 감상이니까요.


아 참,  《고문진보번역본을 앞에서 알려드렸죠? 그럼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셨을 테니까, 낭송을 온몸의 감각으로 들으시면서 그 책에서의 느낌과 비교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머리로 문자를 해독/분석하려 하지 마시고, 가슴으로 소리를 느껴 보셔요. 아셨죠? ^^*





[ 제1 단락 ]  원문과 중국어 낭송



[ 제1 문단 원문 ]

<1-1> 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 悚然而聽之, 曰: “異哉!”
<1-2> 初淅瀝以蕭颯, 忽奔騰而砰湃 ; 如波濤夜驚, 風雨驟至。
<1-3> 其觸於物也, 鏦鏦錚錚, 金鐵皆鳴。
<1-4> 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

<1-5> 余謂童子: “此何聲也? 汝出視之。”

<1-6> 童子曰 : “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 단어 설명)

▶ 歐陽子(구양자): 작가 자신의 자칭. 성姓이 '구'가 아니라 '구양'이다.  
▶ 方: 동작의 진행을 알려주는 시간 부사. 白話의 '正~的時候兒'에 해당. "~할 때에"
▶ 悚然(sǒngran, 송연) : 갑자기 두려운 마음에 쭈뼛 긴장되다. 모골毛骨이 ~하다.

▶ 淅瀝([xīlì], 석력) : 의성어.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비교적 작은 소리.
▶ 以: 형용사와 형용사를 연결시켜 주는 연접사.
▶ 蕭颯([xiāosà], 소삽) : 의성어. 바람 부는 소리. 비교적 큰 소리.

▶ 砰湃([pēngpài], 팽배): 파도가 밀려들다. 澎湃.
▶ 鏦鏦(cōngcōng; 총총) : 의성어. 금속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
▶ 錚錚(zhēngzhēng; 쟁쟁) : 의성어. 금속이 부딪치는 큰 소리.

▶ 銜枚(xiánméi, 함매) : 옛날 군대가 야습을 나갈 때 정숙을 유지하기 위하여 병사들의 입에 채우는 재갈. 젓가락처럼 생긴 나무를 입 속에 가로로 물고 양쪽 끝을 실로 묶어 목에 매게끔 하였음.




중국어 원문 낭송






[ 제1 단락 ]  번역과 한국어 낭송


 

<1-1>

어느 날 밤, 구양자歐陽子가 한참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득 서남쪽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왠지 등골이 쭈뼛해져 주의력을 집중하여 들어보았다.  

이상한 걸...”


<1-2>

싸락싸락... 쓰륵쓰륵... 

처음에는 자그맣게 들려오던 그 소리가 홀연 빠르고 급하게 들려온다.

야밤에 놀란 파도가 밀려들고, 모진 비바람이 휘몰아치듯!


<1-3>

쟁쟁 쟁쟁! 정정정정!

삼라만상에 부딪치니 모든 금속이 한꺼번에 울리는 듯!


<1-4>

재갈을 물리고 기습을 나가는가,

호령 소리 안 들려도 질풍같이 행군하는 인마人馬의 발자국 소리인 듯!


<1-5>

내가 동자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 일꼬? 네가 한 번 나가보고 오려무나.”


<1-6>

동자가 돌아와서 말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은하수만 중천에 떡 걸렸는데, 아무도 없던데요? 나뭇가지 사이에서 나는 소리 같았어요.”


(상) 조선,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성재수간(聲在樹間)>      

(하) 한글 낭송, 소오생





[ 제1 단락 ] 해설



어떠셔요? 《고문진보의 번역으로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아직 [제1 단락]만 살펴 보았지만, 바로 이런 글이 제가 말하는 이른바 '소리의 글쓰기', 그 전형적인 모습이랍니다. 온갖 종류의 '소리'를 대량으로 운용하여 쓰고 있는 '소리의 글', 과거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죠. 구양수가 최초로 시도한 '소리의 글'입니다. 그 다양한 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무대에 올린 한 마당의 짧은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막이 올라가면 제일 먼저 주인공 구양수가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가 봉준호나 이창동 감독이라면 주인공에게 무슨 책을 읽게 시킬까요? 즐거운 상상도 잠시, 청중들은 곧 긴장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독서를 중단하고 귀를 기울이던 주인공이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잔뜩 긴장감이 묻어 있거든요.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긴장한 주인공이 중얼거리는 소리... 그 뒤를 이어 의성어가 대량으로 등장합니다. '의성어擬聲語'란 '문자로 소리를 흉내 낸 단어'라는 뜻.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녹음기가 없었으니까 문자로 소리를 녹음해 놓았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싸락싸락... 쓰륵쓰륵...

쟁쟁쟁쟁... 정정정정...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인 듯,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인 듯, 밀려드는 파도 소리인 듯, 온 세상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인 듯, 질풍같이 야습을 나가는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인 듯.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다가 점점 크게 들려옵니다.


그리고는 53세 노인네의 목소리가 들려오네요. (요새는 과학적으로 0.7을 곱해야 옛날 나이라네요. 그럼 옛날 53세면 요새는 76세. 선배님은 아직 해당 연령에 한참 미달이라고 아룁니다. ^^;;) 그다음에는 앳된 동자의 목소리도 들리는군요. 내레이터까지 포함하면 이 짧은 단락 안에 3인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는 셈입니다.



이 엄숙하고 삭막해 보이는 한자 속에 이렇게 생생한 자연의 소리, 인간의 소리가 녹음되어 있다니! 놀랍지 않으십니까?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리는 대부분 '음유' 계통에 속합니다. 그런 평범한 소리들을 채집, 녹음하여 글의 도입부로 삼다니! 정말 기발하고 신박한 아이디어 아닙니까?


지난번에 '음유의 글'로 예를 들었던 증공 산문의 고지식한 패턴과 비교해 보면 평범 속의 기발함, 그 운영의 묘를 적절하게 살려준 명품 산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구양수의 이러한 '음유의 소리 글쓰기'는 새로운 글쓰기의 모델을 제시하여 송나라의 자유로운 산문체 글쓰기 운동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선배님도 구양수의 이런 수법을 활용해서 글쓰기에 대화체와 의성어를 많이 사용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 다음 편에 계속 >




[ 대문 그림 ]


소오생의 벗, 김우한 화백의 <비 내리는 옥수수밭>. 야밤에 놀란 파도가 밀려들고, 모진 비바람이 휘몰아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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