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으로 학문하기 (3)
▷ 1장 1절: 배우고 늘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1장 2절: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논어 · 학이學而》
사실 저는 공자님 어록 1장 2절의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은근 안 좋습니다. 중국의 웬만한 관광지에 가면 전부 다 이 말을 써붙여 놓았거든요.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장삿속이죠, 뭐.
입장료나 싸면 진짜 환영해주나 보다 싶을 텐데 엄청나게 비쌉니다. 그러니 그 말을 내건 중국의 지자체 입장에서 본다면, '벗 붕朋'은 그저 '바가지 씌우는 호구'라는 얘기. 먼 곳에 살더라도 이곳에 꼭 놀러 오쎄여~ 와서 돈 좀 많이 많이 뿌려주쎄여~ 뭐 그런 뜻 아니겠어요? 쩝... 기분이 쪼오깨 씁쓸합니다. ^^;;
서로 간에 이익을 주는 존재도 아니고 '의리'를 지켜주는 존재도 아니라면, '벗/친구'란 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굳이 그런 친교의 대상자가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꼭 '먼 곳'에서 찾아와야만 '즐거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걸까요? 공자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궁금쟁이 소오생은 보다 근원적으로 두 가지가 궁금했습니다.
첫째, '벗/친구'를 선택하게 되는 요인은 무엇일까?
둘째, 우리는 대체 왜 타인을 '벗/친구'로 사귀려 하는 걸까?
그래서 한때 심리학 책을 열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지요? 그때 정리한 메모를 살펴보니, 인간은 네 가지 요인에 의해서 친교 대상자를 선택한다네요. 권석만 외 공저 《심리학개론》pp. 298~301. 박영사, 1997.
(1) 근접(proximity) : 가까운 곳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
(2) 유사성(similarity) : 태도나 취미가 서로 닮은 사람
(3) 보상(rewardingness) : 정신적 물질적으로 칭찬해 주고 도와주고 보상해 주는 사람
(4) 외모(physical attractive- ness) : 상대방의 외모가 마음에 드는 사람
(1)은 학교 동창생을, (2)는 동호회를, (3)은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기준을, (4)는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는 기준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여건에 의해서 어떤 친교 대상자를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음, 이 얘기는 여기서 대충 통과! 다음 기회에 중국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죠.
그다음 궁금증.
인간은 왜 타인을 '벗/친구'로 사귀려 하는 걸까요?
메모를 보니 친애 욕구(affiliation need) 때문이라고 쓰여있군요. 쉽게 말해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죠. 서구 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두렵거나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최대한 비슷한 처지에 놓인, 그러니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겪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하고 위안을 얻고자 한다네요.
하지만 그런 해석은 왠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간이 과연 그런 이유만으로 타인을 사귀는 것일까요? 벗을 사귀려는 이유가 불안 해소, 자기 위안에 그치는 것이라면 '우정'이라는 단어가 너무 천박해지는 것 아닐까요? 현대 사회 속 인간관계의 슬픈 현상들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friend'에 대한 이런 단세포적인 서구의 인지 체계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도 많이 아시겠지만, '벗/친구'는 현대 중국어로 펑(↗)여오(↓)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朋友'라고 쓰죠. 그런데 이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느냐 살펴보니, 세상에... 무려 선진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다네요. 최소 2,500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를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죠.
이런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만큼 이 단어에 대한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시대를 초월하여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었다는 뜻. 그렇겠죠? 어떤 가치관이 담겨있을까요? 선진 시대에 사용된 이 단어 뒤에는 한결같이 똑같은 내용의 주註(해설)가 달려있습니다.
같은 스승을 모신 동문을 '붕 朋'이라 하고,
같은 뜻을 지닌 동지를 '우 友'라고 한다.
同門曰朋, 同志曰友。
《십삼경주소 十三經注疏》, 예문인서관 藝文印書館. 권4 및 권7.
'붕우 朋友'를 정신적 실천적인 형이상학의 개념으로 인지하고 있군요.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네요. 이 글자들이 처음 생겨났을 때의 모습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재미있으니까, 어려울 거라는 편견만 버리신다면, 누구나 수수께끼 풀기에 충분히 참여하실 수 있답니다.
그럼 먼저 글자 '붕 朋'의 초창기 모습부터 함께 보실까요?
글자 ④는 후한 시대의 비석에 예서체隸書體로 새겨진 글자 '붕朋'입니다. 오늘날 '朋'의 모습과 가장 가깝죠? 비록 '달 월月' 부수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이 '月'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요. 아무튼 이 글자 ④의 원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글자 ①, ②, ③ 중에서 맞춰보세요.
어떤 학자는 글자 ①이라고 주장합니다. 옛날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던 '조개 패貝'가 두 꾸러미 있는 모습이에요. 오~ 확실히 글자 ④와 많이 닮았네요. 하지만 조금 아까 '붕朋'은 선진 시대에 이미 형이상학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했죠? 그런데 그런 형이상학에 소속되었던 글자가 가장 속물적인 화폐의 단위에서 비롯되었다니... 소오생은 좀처럼 납득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글자 ②, '봉황새 봉鳳'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봉황새는 새들의 왕이지요. 봉황새가 날면 뭇 새들이 따라서 날기 때문에 '붕 朋'이라는 글자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 글쎄요... 하지만 글자 ②에서는 '朋'이 지니고 있는 '좌우의 균형감'과 '상대성'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네요.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글자 ③, '대붕 붕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붕鵬'은 '봉鳳'과 서로 통용되었던 글자죠. 외관상 가장 큰 차이는 왼쪽 편방에 '朋'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 즉 힘찬 날갯짓으로 창공 높은 곳을 날아올라가는 모습입니다. 글자 ②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있죠. 게다가 발음도 '朋'과 똑같구요. 오, 이건 제법 설득력이 있군요.
결론을 내볼까요? '대붕'은 아주 높은 하늘을 올라간다는 신화 속의 새죠. '봉鳳'과 비슷한 개념이면서도, 외형적으로 볼 때, '두 날개(朋)'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온전한 두 날개가 함께 힘찬 날갯짓을 해줘야만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올라갈 수 있는 새, 그 새가 바로 '붕鵬'입니다. '붕朋'은 바로 그 원동력이 되는 '두 날개'를 의미하고요.
'대붕'은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의 새를 연상시킵니다. 그럴 수밖에. 헤르만 헤세는 동아시아 사상에 심취, 여기서 얻은 영감으로 《데미안》을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시 한 층 누각 위로 올라가며> 참고.
여기서 중요한 것!
'朋'은 '나의 벗'이자 바로 곧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벗'은 '나'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죠. 어느 한쪽만 존재하는 날개는 이미 날개로서의 효용 가치를 상실했으니까요. 동아시아 일원론 결합 패러다임의 극치입니다.
'붕 朋'을 '같은 스승을 모신 동문'이라고 풀이한 이유는 뭘까요? '스승'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존재한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고대 중국의 지성인에게는 '특정한 인물로서 고정된 스승'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존재하는 곳, 그 높은 하늘이 바로 곧 '스승'이었죠. 그 진리의 하늘이 '벗'과 '나'의 공동의 목적지라는 이야기 아닐까요? <스승이 먼저일까 학생이 먼저일까> 참고.
이렇게 풀이하니 '벗 붕朋'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실감이 되시죠?
서구의 'friend' 개념과는 정말 차원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글자 '벗 우友'의 초창기 모습을 보시죠.
그렇다면 어디서 '友'를 만나서, 무엇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걸까요?
다시 공자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군자는 글로 벗을 만나고,
벗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돕는다.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논어 · 안연顏淵》
'인仁'은 쉽게 말해서 '사랑'입니다.
'보인輔仁'은 직역하면 '사랑을 돕는 것'이니, '사랑의 실천을 돕는다'라고 번역이 됩니다.
누구와 함께? '벗 友'과 함께.
어떤 벗? '글벗'입니다.
소오생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러 브런치 글벗 작가님,
정말 놀랍지 않으십니까?
'벗 朋友'이란 다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글벗'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글벗'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라!
그게 공자님의 당부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여러분,
'글벗님'들과 함께 '글쓰기'를 통해 사랑을 실천해 나가라!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고, 하나라도 더 이 사회에 이바지하거라!
그게 공자님의 당부 말씀이었다구요. 놀랍지 않으십니까?
동시에 가장 힘들고 고된 정신노동이기도 하죠. 더구나 딸피가 되면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눈은 점점 뿌예지고, 팔은 점점 떨려가고, 허리는 절로 절로 굽어지고, 다리는 쉬지 않고 시큰시큰. 관절마다 쑤셔대고 하염없이 졸리고 기억력은 감퇴되니, 속도가 자꾸만 느려집니다.
이 순간,
바로 이 순간,
바로바로 이 순간!
지구의 반대편 사막에서 우리나라 바닷가 마을 그 어드메까지
먼 곳, 더 먼 곳, 아주 먼 그곳에서 글벗님들이 살그머니 찾아와 격려하고 응원해 주시네요.
우와!
너무 즐겁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공자님 어록집 1장 2절을 소리 높이 외쳐봅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아하, 그 말이 알고 보니 바로 이런 뜻이었군요!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적용되는 공자님 말씀의 깊이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1년 전만 해도 딸피 소오생은 산다는 게 별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은 그저 '유서'를 쓰는 차원의 것이었죠.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는 이유> 마음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글벗님'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으니까요.
지금은 어떨까요? 비록 조횟수도 많지 않고 라이킷 숫자도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제 마음속에는 정말 많은 글벗님들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아주 먼 곳, 세계 각국에 계시는 글벗님들까지 꾸준히 찾아와 격려하고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때로는 댓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토론의 장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너무나 큰 즐거움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면서 서로서로 격려하고 응원하고 계신,
감사합니다~~ ^^
▷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士, 爲知己者而死)
▷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得一知己, 死無可恨)
중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중국의 옛 지성인들은 그만큼 ‘알아주는 것(知)’을 중요시 여겼다. 그런데 '알아준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세 가지 정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1) 명철한 판단력
상대방의 내재 가치를 알아주는 명철한 혜안을 의미한다. 사마천에 의하면, 그 판단력은 자주 만나거나 오래 만났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평소 내적 수양과 학문을 닦으며 자기 발전에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끼리는 설령 단 한 번 만난 사이라도 상대방의 내적 가치를 단번에 알아본다는 것이다. 《사기, 노중련/추양열전》
(2) 포용과 양보
더욱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게 마련. 그래서 옛 지성인들은 일단 명철한 판단력으로 한 인간의 내재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결정적 잘못이 아닌 한, 최대한 상대방의 결점을 포용함으로써 그가 궁극적으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음 기회에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이 개념을 이해해 보자.
(3) 의지의 다짐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쇠도 자를 수 있게끔 예리하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해서 하는 말은 난초 내음처럼 향기롭다.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周易․繫辭傳上》
'금란지교 金蘭之交'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그러나 굳건하고 영속적인 친교 관계는 좀처럼 얻기 어렵다. 인생 항로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인지라 어느 한 개인의 의지대로만 나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옛 지성인들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욱 그 의지를 강하게 키워 나가며 영속성을 다짐했다. 소오생이 꿈꾸는 글벗 관계도 그러하다.
< 끝 >
[ 표지 그림 ]
'벗 붕朋'은 '대붕'의 '두 날개'를 의미한다. 군바리^^;; 소오생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