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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r 21. 2024

7. 스승이 먼저일까 학생이 먼저일까

천재작가 응원 릴레이에 동참하며


三人行, 必有我師。삼인행, 필유아사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중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논어 · 술이』


스승이 먼저일까, 학생이 먼저일까?

난센스 퀴즈가 아니다.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그 질문에는 답이 없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답이 있다.

우리들 삶의 여행길에서는 스승이 더 중요할까, 학생이 더 중요할까?     


언젠가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태묘太廟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예禮’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런 공자가 태묘의 제관祭官들에게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 자가 ‘예’를 잘 안다고 누가 그랬어? 어이가 없군. 누군가 빈정대기까지 했다. 속이 상한 제자들이 일러바치자,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예’라는 거란다.” 『논어 · 팔일八佾』     


공자는 왜 모든 것을 다 물어보았을까? 제관들을 테스트해 본 걸까? 몇 가지 가능성이 있겠다. 첫째, 솔직해서. 자기도 모르는 게 있으니까. 모르는데 아는 척하면 안 되니까. 둘째, 겸손해서. 혹시 상대방이 더 잘 알 수도 있으므로. 셋째, 매사에 가르침을 청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중요해서. 그런 문답 과정을 통해 언제나 새롭게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공자는 말한다. 참된 란 내면적인 거란다. 인사를 잘해야 출세한다고? 하하하. 속으로는 욕하면서 겉으로만 정중하게 기역 자로 인사해 봤자 뭐 하겠니. 그런 건 가짜란다. 물어보는 마음가짐, 다시 말해서 언제나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가르침을 청하는 마음가짐, 그게 학문學問이란다. 그게 의 본질이지.


잡다한 제사의 형식주의에 얽매여있던 를,

인간 내면세계의 것으로 전환시킨 획기적 선언이었다.

유가儒家의 출발이자, ‘학문의 출발이었다. 


공자는 스승일까, 학생일까? 공자는 늘 가르침을 청했으니 당연히 학생이다. 또 다른 학생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을 뿐이다. 공자는 말한다.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중에는 반드시 스승이 있게 마련이라고. 장점은 바로 취하고, 단점은 고쳐서 취하면 된다고. 그렇다면 어찌 세 명에 한 명뿐이랴. 누구에게나 겸손히 길을 물어보는 마음가짐을 갖는 자, 참된 ‘학생’에게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바로 곧 ‘스승’ 아니겠는가!      




중국 중당中唐 시대(766~835)에 한유韓愈(768~824)라는 인물이 있다. 이른바 '중화中華 사상'의 창시자요, '중국교 中國敎'(실제로 이런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다)의 교주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지은 <스승의 길 師道>이라는 아주 중요한 글이 있다.


그 글에서 한유는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선언한다.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도'를 먼저 깨쳤다고 할 수 없고, 직업이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이와 직업과도 상관이 없고, 고정된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선언한다.


길이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스승’이란 특정한 인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도 道', 즉 '길'을 알려주는 존재다. 갈림길에 섰을 옳은 길을 알려주는 길라잡이가 스승이라는 뜻. 그런데 인생 여행길에는 갈림길이 많이 나온다. 그때마다 고정된 어느 한 존재가 정확한 길을 알려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또 다른 갈림길에서는 또 다른 길라잡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고정된 스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학생은 길을 걷고자 나선 사람이다. 학생이 되고자 하면, 어린아이도 짐승도 나무도 삼라만상 모든 존재가 다 스승이 될 수 있다. 학생이 되고자 하면 스승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학생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승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승이란 그때그때 잠시 잠깐 나타나는 길라잡이일 뿐, 여행길의 진정한 주인공은 학생인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十有五而志於學. (십유오이지어학) 열다섯 나이에는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한다. 《논어 · 위정》

열다섯스물 나이에 배워야 할 것은 먼저 학생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가짐이다. <열다섯 나이에 배워야 할 것은> 그런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숫자는 인간이 편의상 임의로 만들어놓은 것일 뿐, 절대적인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하는 과학적 팩트다. <싱그러운 삶의 나무> 그러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칠십 아니라 팔십 구십 노인이라도 전혀 늦지 않았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새롭게 배움에 뜻을 두고 학생이 될 수 있다. 




나는 '스승의 날'을 싫어했다. 나를 '스승'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놓고, 낯 간지러운 '스승의 노래' 따위를 불러준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우리 학과에는 아예 스승의 날 행사가 없었다. (내가 제일 선임 교수여서 내 맘대로였다. ^^;;) 선물도 받지 않았다. 주려면 편지를 써서 마음을 보여 달라고 했다. 편지가 담긴 앨범은 받았다. 앨범 받았다고 압색 하려나?


나는 스승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종종 말하곤 했다. 여러분들이 나의 스승이라고. 학생들에게 교육 효과는 어떤 게 더 좋을지, 그건 모르겠다. 나는 단지 한유에게 배운 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언제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인류의 사표師表라고 부른다. 동아시아에서는 성인聖人이라고도 한다. 인류 역사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나는 스승이 아니라 학생이다. 직업이 교수였으니, 나에게 수업을 듣지 않은 사람이 아무개 교수라고 불러주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내 수업을 들은 학생이 '교수님'이라고 부르면 그건 결례가 된다. '선생님'이 옳은 호칭이다. 가르쳐줬더니 학생들은 아예 '쌤'이라고 불렀다.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용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티베트문화 수업을 듣고 나서는 '용라마'라고도 불렀고, 여행 형식으로 진행하는 인터넷수업에서는 '가이더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학생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예기禮記 · 학기學記』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學, 然後知不足. (학, 연후지부족) 배우고 난 연후에야, 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된다.

유학 시절 큰 위로를 얻은 말이다. 석사에서 박사로 올라갈수록 나는 정말 아는 게 없구나, 자괴감이 점점 더 커졌다. 그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좌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래,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나마 조금 배웠다는 증거일 거야. 합리화를 하면서. 나중에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닐까. 작아지는 것, 그게 배움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마음이 작아지면 공손해진다. 간절해지고 정성을 다하게 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길에 구르는 돌멩이 뒤에도 숨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서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다. 기독교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서, 가난한 마음으로 자복하며 통곡하라 한다. 불가에서는 백척간두 진일보! 아예 아찔한 절벽에서 허공에 몸을 던져 아상을 죽이고 텅 빈 마음만 남겨놓으라 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성의정심 誠意正心역시 마찬가지다. 작아지는 것이 핵심이다. 


공자는 언제나 공손하게 상대방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왜 그랬을까? 공자는 왜 김수희의 노랫말처럼 상대방 앞에 서면 언제나 한없이 작아졌을까? 특정 인물에게 작아진 게 아니다.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진 진리와 학문의 망망대해 앞에서 작아진 것이다. 그 엄청난 절대 가치의 세계 앞에서 저절로 무릎이 꺾인 것이다. 어찌 공손히 몸을 굽혀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이 진정한 이다. 학문에 대한 간절함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학생이란 이렇게 언제나 작아지고 간절해지는 존재를 일컫는다. 열다섯스물 나이에 배워야 할 것은 늘 작아지는 마음가짐이다. 칠십 아니라 팔십 구십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가짐이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새롭게 배움에 뜻을 두고 학생이 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학생이야말로 우리들 삶의 여행길의 참된 주인공이다.


뽀~~너스로 하나 더 알려드린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면 화를 내는 모지리 교수들도 있다. 그럴 땐 보드라운 목소리로, '교수님~~' 눈치껏 딸랑딸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농담이 아니라, 아부를 잘하는 것도 인격 향상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까지 꺽지는 말자.

和而不同. (화이부동) 조화를 이루되 똑같은 놈이 되지는 말자. 《논어 · 자로》

중국의 지성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릴레이 바통 이어받기



언제부터였을까? 누가 시작한 것일까?


아마도 <딸그림아빠글> 작가님이 스타트를 끊은 릴레이 같다.(혹시 다른 분이면 용서를 빕니다.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가 있네요> 댓글을 보니 그 당시만 해도 최소한 15분의 작가님이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으셨다. 댓글을 안 달고 바통을 넘겨받으신 작가님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호랑 작가님은 독후감까지 쓰셨다. <행복을 수집하고 퍼뜨리는 사람> 너무나 따스한 분들이시다.


무슨 이야기냐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브런치스토리에서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한 <천재작가> 류귀복 작가님이 얼마 전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도록 브런치 작가들이 힘을 모아 응원하자는 릴레이 운동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님들은 <천재작가> 작가님의 출간을 응원하는 걸까?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동지 의식. 브런치 동지 작가로서 누군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두 번째가 더 중요한 이유 같다. 류귀복 작가님의 글에 감동이 있기 때문 아닐까.


그의 글에는 서사가 있다. 그는 결혼하자마자 한참 청춘을 즐길 시기에 강직성 척후염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난치 질환 판정을 받는다. 2주에 한 번씩 견디기 어려운 통증의 주사를 맞아야 하고 진통제를 비타민 먹듯이 먹어야 한다. 그런데 류귀복 작가님은 말한다. 덕분에 평범한 삶 속에서 감사함을 배웠다고. 그리고 그는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채집하여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준다. 그 모습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응원 릴레이가 시작된 것 아닐까.


"언제나 꽃길만 걸어라!" 대학 캠퍼스를 걸으면 자주 보는 현수막이다. 그런데 그런 꽃길은 온실 속에나 존재한다. 온실 속의 꽃은 밖에 나가는 순간 얼어 죽는다. 하지만 온실 속에만 있는 인생길이 어디 있겠는가. 언젠가 반드시 온실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러므로 그 말은 사실 저주에 가깝다.


fact는 그와 반대다. 고난과 역경을 맛보아야 한다. 그게 모든 예술 창작의 필수 요건이다. 인간은 두 부류가 있다. 환난의 겨울이 닥쳐오면 주저앉아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사람들과,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동서고금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한결 같이 100% 후자에 속했다. 고난과 역경이야말로 신神인간에게 주신 가장 선물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모든 예술 이론이 다 마찬가지다. 사마천은 치욕의 궁형을 당하고 나서 '발분저서 發憤著書' 하였기에 비로소 《사기》라는 엄청난 역사서적이요 최고의 문학서적을 창작할 수 있었다. 중당 시대의 대문호 한유는 "삶이 평탄하지 않아야 소리가 울린다 不平則鳴"라고 주장하였고, 북송 시대의 구양수는 "궁이후공 窮而後工"이라 하였다. 인생길의 고난이 극에 달해야 비로소 빼어난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류귀복 작가님이 겪는 고난과 역경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짠하기 이를 데 없다. 그와 동시에 '식초를 마시는' 묘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식초와 두부에 얽힌 사연> 참조. 그가 한참 청춘에 난치병을 판정받은 것은 사실 하나님의 엄청난 기회의 선물이므로.




내가 그를 응원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첫째, 그가 '천재작가'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빼어난 예술가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고난과 역경을 겪더라도 천부적인 재능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처음에 작가님 필명이 '천재작가'이길래 솔직히 별 볼 일 없는 둔재인 줄 알았다. 미친놈이 자기 미쳤다고 떠들고 다니지 않듯, 진짜 천재는 자기가 천재라고 떠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엇, 근데 글을 대하니 진짜 천재작가네? 아하, 요새는 자기 PR 시대로구나. MZ세대의 글쓰기를 접하면서 내가 얼마나 꼰대인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작전상 필명을 바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둘째. 그가 '학생'이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아직 학교를 다닌다는 얘기이거나, 소오생의 졸업생 학생이라는 뜻이 아니다. 작가님 자신의 인생 여행길에서 언제나 간절하고 작아지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는 뜻이다. 아무리 천재작가이더라도 네가지가 없으면 그걸로 끝이다. 개인적으로 어느 누구에게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리 앞에 작아지며 언제나 배움에 목말라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님과의 몇 번의 댓글 교류를 통해 그가 '학생'임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를 응원한다는 이야기. 작가님이 앞으로도 늘 작아지신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한국 문단에 길이 남을 큰 작가님이 되리라 믿는다.


한 가지, 노파심에서 류귀복 작가님께 감히 한 가지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 혹시라도, 그야말로 만의 하나라도, '집착'하지 않으셨으면 참 좋겠다. '베스트셀러'에 집착하지 않으셨으면 참 좋겠다. 그런 건 응원하고 박수치는 우리들의 몫일 테니까. '행복'에 집착하지 않으신다면 더욱 좋겠다. 행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있을 테니까.




사실 나와 교류하는 모든 작가님들은 '학생'이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 모두에게 늘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분들이 나의 스승이셨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고정된 스승은 없는 법이니까 너무 좋아하실 필요는 없겠다. ^^


지금 여기서 하나하나 모든 분들을 거론하며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만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다. <아리사> 작가님이 <작정했어 내가! 마음먹었다고 내가!>에서 브런치 통장님을 자처하시며 분연히 일어섰기 때문에 감동을 먹고 그 실천 정신을 배우고자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작가님은 개인적으로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책을 구매하신 것 외에도 <강가 개울가 이지성> 작가님이 추천하신 방법, 즉 동네 도서관에서 도서 구매 신청을 하는 방법으로 우리 브런치 작가님들을 응원하자는 이지성 작가님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와우, 이 실천력이라니... 탄복한 소오생, 이런 댓글을 날렸다.


배운 대로 느낀 대로 행동하고 실천하시는 아리사 작가님, 최고의 스승님이십니다. 스승님께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저도 실천하러 갑니다... 일주일만 젊었어도 저도 방방 날아다녔을 텐데... 근데... 동작이 살짝 굼떠도 꼭 실천 완료 후 보고드릴 테니 쫌만 기둘려 주시와요 넹? ^^;;


지금 보고 드리겠다.


아리사 작가님께 보고 드립니다. 하나.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책은 5일 전에 한달살이 장소로 배달받아 목하 정독 중임을 보고합니다. 하나. 3월 20일 오후 5시 부로, 아래의 책을 각 3권씩 예전에 재직하던 직장의 도서관에 구매 신청을 완료했음을 보고합니다.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슬기로운 기자 생활》

《아빠의 가족 독서 모임 만드는 법》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각 3권씩.


학과장님께 각 5권씩 부탁을 드렸는데요, 도서관에서 3권씩만 되고, 그것도 학과에서 교재로 쓰는 것만 된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교재로 쓸 거라고 가짓부렁했다네요. 우리 학과장님 잘했죠? ㅋㅋㅋ  


자, 그럼 다음은 어떤 분이 릴레이 바통을 넘겨받으실까요? ^^;;



후기. 댓글 에피소드



<혈이 뚫린 동북 해안> 댓글에서 아리사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와 주고받은 내용을 잠시 소개합니다.



아리사: 묵호항 사진에 혈(穴)이라는 단어가 얹어지면서 무협소설 "묵향"이 떠올랐는데 다행히 초절정 고수라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 형편없는 사진 실력이라고 하셨지만, 울릉도를 실제 한 번도 가지 못한 제게 작가님은 위대한 포토그래퍼이십니다.


소오생: 어제 작가님이 올려주신 댓글의 댓글을 보다 보니... 글감이 떠올랐답니다. <스승이 먼저냐, 학생이 먼저냐> 제목 어때요? 왜 이런 제목을 떠올렸는지 짐작이 가시죠? ㅋㅋㅋ 근데 지금 당장은 밀린 글감이 많아서 2, 3주 뒤에나 쓰게 될 듯요. 메모장에 기록해 놓았으니 조금만 기둘려주셔요? ^^;;


그나저나 무협소설도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중국문학을 전공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무협소설 때문이었는데... 진융(김용 金庸)의 소설은 읽어보셨나요? 제가 제일 먼저 읽고,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전 2, 3권 정도 번역했는데 비행기 타고 오다 짐이 분실되는 바람에.... 엉엉... 번역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 뒤에 다른 분이 번역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엄청나게 팔렸죠. 또 그 뒤에는 시리즈 물로 쏟아져 나오고... 우리나라 무협계는 요새 어찌 되었을라나... 강호에서 은퇴해서 손을 놓고 있으니 또 어떤 절정의 고수가 쏟아져 나왔을지... 혹시 아리사 작가님도 여주인공 중의 한 명이시려나요? ^.^


아리사: < 스승이 먼저냐, 학생이 먼저냐 > 몇 주든 몇 달이든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여기에 있는걸요. :) 만화책과 무협소설 완전 좋아했어요. 작가명을 보면서 책을 읽지 않아서 김용 소설로 검색해 보니 천룡팔부, 의천도룡기가 보여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 좋아한 무협소설이었습니다. 비록 머릿속에서지만 허벅지까지 쫙 찢어진 원피스를 입고 쑉쑉쑉 저도 따라 얼마나 날아다녔던지. 혈을 따라 젓가락은 또 얼마나 날렸던지요.ㅋㅋㅋ


아서코난도일의 셜록홈즈도 제가 너무 사랑하는 책인데요. 셜록홈즈 시리즈를 보면 번역에 따라 몰입도가 굉장히 달라지더라구요. 이 책을 통해 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작가님께서 번역하셨다면 상상의 세계가 더 풍부해졌을 텐데 저도 매우 안타깝네요. 엉엉 우실만 합니다.


작가님은 무협소설로 중국문학을 전공하셨는데, 무협소설에 빠진 당시의 제 꿈은 도서대여점(또는 만화방) 사장이었다는.ㅋㅋㅋ 스승과 학생의 갈림길을 이리 또 보네요. 아이를 만나면서 무협세계와 작별했는데 다시 만나고 싶어 졌습니다. 작가님 말씀대로 어떤 절정의 고수가 쏟아져 나왔을지 궁금해집니다. 쇼쇼쇽 :D


아리사 작가님, 정말 너무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ㅋㅋㅋ


문득 생각나는 스토리 하나.


옛날 옛적 호랭이가 담배 피던 시절, 아버님이 연좌제에 걸려 취업을 못해서 여기저기 장똘뱅이 마냥 돌아다니며 호구지책을 찾으실 그 옛날에... 어찌어찌하다 보니 제가 초등학교 빵학년 때 전라남도 목포에 가서 몇 년 살게 되었답니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는 틈만 나면 만화가게에 가서 살다시피 했는데요, 어머니가 맨날 저를 잡으러 오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러다가 세월이 다시 흘러 흘러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부모님은 직장 관계로 여전히 목포에 사셔서 방학이 되면 가끔 찾아가곤 했지요.


어느 날 지나가다 보니까 문득 그 만화가게가 생각나서 찾아보니, 쩝, 슬프다 만화가게 어디 가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책방이 있더라구요? 들어가서 감회에 젖어 이 책 저 책 들춰보고 있는데, 주인아줌마 갑자기 큰 소리로... "아야~(전라도 사투리, 얘!) 니 오생이 아니냐? 오메오메 으째야쓰까잉, 인적도 쬐깐할 때랑 똑같아 부려야?" 하시지 뭐예요. 하하하, 만화가게 그 아주머니가 책방 주인이 되셨더라구요. 근데 어떻게 알아보셨지? 지금 가도 알아보시려나?


그런데... 아리사 작가님의 그 댓글을 보자마자, 그때 그 만화가게 아니 책방 주인아주머니 얼굴이... 아리사 작가님 얼굴로 변하지 뭐예요? 얼마나 놀랬던지... ㅋㅋㅋㅋ 앞으로 제가 사는 아파트 통장님 오시면 유심히 봐야겠어요. 혹시 아리사 작가님 일지 누가 알아요?


그런 의미에서 어제(3. 20) 날자 묵호 사진 몇 장 올려드립니다. 우리나라 참 넓습니다. ^^;;

눈 내릴 때
그쳤을 때
눈 내릴 때
그쳤을 때




대문 사진: 서당에 체험 학습 나갔을 때 학생들이 연출한 사진. 웃음을 참느라 난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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