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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r 05. 2024

6.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

채수일 목사님 강론을 듣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담아두는 인생 영화다. 명문 사립고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해 온 영어선생님 키팅은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문학이 뭐죠? 학생들은 얼른 교재를 펼치고 개념 정의를 읽는다. 그러자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을 자기 주위에 동그랗게 앉혀놓고 속삭인다.


찢어버려.

그런 교재 따위는 찢어버리라고.

문학은, 바로 우리들의 삶 그 자체란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을 이렇게 불렀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교재를 찢는다는 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부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도둑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자기 침대에 눕혀서 침대보다 키가 더 크면 잘라 죽이고, 더 작으면 늘려 죽였다. 절대적이고 형식적인 기준부터 먼저 정하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춰 행동할 것을 요구한 연역적 명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엄격하다. 증오와 공포만 있을 뿐, 자비와 사랑이 있을 리 없다.




우리 사회의 '교재'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는 또 무엇일까?

누가, 왜, 그 '교재'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만드는 것일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겉은 번지르르한데 그 이면은 끔찍하다. 전 세계가 온통 K-문화의 열풍에 휩싸여있다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해마다 자살률 1위다. 강제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여져 '교재'에 정해진 '율법'의 잣대로 영혼과 육체가 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만들고 누가 잘랐을까? 당연히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기득권층에는 '권위자權威者''권위주의자'가 있다. 후자가 문제다.


'권위자'는 좋은 존재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참된 실력과 인품을 갖추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권위가 있어 모두에게 인정받으니 굳이 공포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가 필요 없다. 인품을 갖추고 있으니 기본적으로 겸손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게 마련이다. 기득권층에 이런 '권위자'가 많아지면 사회가 안정되고 나라가 번영하게 된다.


'권위주의자'는 나쁜 존재다. 실력은 쥐뿔, 인품은 사기꾼인 자들이 그저 타인들 위에 군림하고픈 욕망에 가득 차서, 자기에게 없는 '권위'를 억지로 만든다. 무엇에 근거하여 '권위'를 만들까? '율법'이다. 그들은 그 율법을 만인에게 존경받는 '권위 있는 스승'이 만들었다고 뻥을 친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이 탄로 날까 봐 그 '율법'을 들이대며 사람들의 복종을 강요한다. 기득권층에 이런 '권위주의자'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어지러워지고 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권위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은 '교재'를 만들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든다. 남북의 분단 현실과 동서 간의 지역감정을 악용하며, 성 대결과 종교 간의 갈등을 조장한다. 그 결과, 경제는 양극화되고 정치는 극한 대립하고 있다. 사랑은 없고 증오만 가득하다. 대한민국 사회는 분열과 투쟁의 양극화 현상 속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도 모르고 목적지 없이 무한 질주만 하는 과잉 경쟁 사회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 이야기를 해보자. 왜냐고? 우리 사회가 '웰빙'과 '힐링'에 목말라하는 병든 사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사랑'의 종교라고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분열과 투쟁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하나 됨의 길, 치유의 길에 나서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2004년 12월 2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대지진과 함께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다. 수십 만 명이 죽었다. 그다음 주일, 대한민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어느 대형교회에 가게 되는 인연이 있었다. 대통령 각하를 위한 조찬기도회의 단골 멤버로 TV에도 자주 나오시는 아무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다. 갑자기 그 쓰나미 이야기를 꺼내신다. 성탄절을 안 지키고 교회에 안 가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에 불벼락을 내리셨듯 이번에는 물벼락을 내려치신 거라고 호통을 친다. 한 마디로 쌤통이라는 얘기다. 여기저기서 아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소름이 돋았다. 이게 '사랑'의 기독교 맞는가. 기독교가 왜 앞장서서 '증오'를 부추기고 갈라치기를 하는가. 교회를 안 나가고 십일조를 안 내면 이런 저주를 받아도 싸다는 말인가. 그래서 불교 사찰에 가서 불상을 훼손하고 심지어 불을 지르기도 하는 것인가. 한국 기독교의 이 배타성이 오히려 기독교를 망치고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기독교의 주류主流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타 종교를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말이 좋아 선교이지 사실상 타도의 대상이다. 하나는 반공이다. 북한은 오로지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대상이다. 여기에 협상이나 대화, 타협은 없다. 공존과 평화와 사랑을 말하면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이며 '사탄'이다. 오로지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이게 '사랑'의 기독교 맞는가? 이분들은 대체 왜 그럴까? 오랜 의문이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부숴라


얼마 전 너튜브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채수일 목사님의 강론이었다.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으로 약칭)의 목사를 양성하는 한신대의 총장을 역임하셨고, 기장을 대표하는 경동교회의 담임 목사로 시무하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하셨단다. 이를 테면 교회 내의 최고 기득권층에 속한 분이다. 그런 분이 뭐라고 하셨을까? 강론 제목은 무엇일까?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


엄청난 말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아주 쉽다.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종교다원론이다. 한국 기독교의 주된 흐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말이다. 아니, 아무리 은퇴하셨다고 해도 이런 말씀을 하면 소속 교회에서, 신도들이 가만히 있을까? 반가우면서도 염려가 된다. 궁금하다. 석박사 학위를 정통으로 공부하신 정통파 신학자가, 그래서 교회 내 최고 기득권층에 속하신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런 논란거리의 이야기를 꺼냈을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채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이번에 처음 하신 게 아니었다. 당신의 전 생애에 걸쳐 줄곧 주장하고 실천해 오셨다. 종교 간의 평화와 대화를 강조하시는 목사님은 그래서 천도교나 불교 원불교의 스님 친구 분들이 많단다. 조금 더 검색해 보았다. 채 목사님 뿐만 아니라 경동교회 자체가 그런 경향을 보였다. 아니, 기장의 목사를 양성한다는 한신대 자체가 그런 경향성을 보였다.

2014년 성탄절에 불교 천도교 기독교의 3개 종교가 함께한 경동교회의 성탄전야 예배. 왼쪽부터 법륜 스님, 천도교 박남수 교령,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님.

수유리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과 이웃한 대한조계종 화계사는 매년 석탄절과 성탄절이 오면 서로 축하 현수막을 걸어준다. 가끔 없는 때도 있다. 누군가 찢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새로 다시 걸어놓는다.


종교다원론은 한국 기독교의 주류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이다.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예수님이 이단이냐고 따진다. 논리의 비약이다. 채 목사님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적이 전혀 없다. 타 종교도 마찬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일 뿐 아닌가?


그들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전도'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채수일 목사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서 답변하신 적도 있었다. 간단히 소개해본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기독교 주류 세력이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 great commission'이다. 이와 관련된 구절은 신약 성경 곳곳에 적혀있다. 마태복음 28장이 그 '명령'의 출발 지점이다. 막 16:14-18, 눅24:36-49, 요 20:19-23, 행 1:6-8절 등 여러 곳에 나온다.


아니다! 그건 예수님 말씀이 아니다!


놀랍게도 채수일 목사님은 그 '전도의 명령'은 예수님 말씀이 아니라고 답변한다. 오랜 역사를 거쳐 기록되고 전승되고 또 편집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인 것처럼 덧붙여진 것이라고 하신다. 교재를 찢어버린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부숴버린 것이다. 엄청난 용기다. 감히 성경에 쓰인 말씀을 부정한다고? 우리 형님 형수님들이 알면 펄펄 뛰며 욕을 하실 틀림없다.


우리 집뿐이겠는가. 정도면 빨갱이 목사 소리를 들을 게 확실하다. 요새 나온 유행어처럼 "아무 말도 하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 가만히 있으면 신도들의 존경과 온갖 대접을 한몸에 받으실 텐데, 채 목사님은 당신의 학자적 양심을 걸고 진실을 밝히고자 나선 것이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교회 내 그 어떤 영향력도 없지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다. 내가 필명으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하지만 필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었을 망정, 나 역시 한 사람의 학자로서 채 목사님의 말씀에 100% 동의하고 지지한다. 논리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문화인류학의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이 역사의 필연 과정이기 때문이다. 삶과 우주의 원리를 깨친 위대한 스승이 처음 출현할 때는 사상/학문 성격의 소박한 가족 규모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대규모 종교 집단의 모습을 갖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가족 규모의 모임을 '가족 가家' 자를 붙여서 '~~ 가家'라고 칭하였다. 유가儒家불가佛家라는 어휘가 그 사례다.


그 가족 규모의 모임은 훗날 집단화하면서 필연적으로 변질되어 간다. 스승의 가르침과 점점 달라지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나는 30년이 훨씬 넘게 강의를 하면서 내 뜻을 정확하게 파악한 학생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언어가 가지는 소통의 한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겪는 과정이다. 하물며 자의적으로 일부러 스승의 가르침을 조작하는 경우는 더욱 많다.


위대한 스승의 제자(또는 제자의 제자...) 중의 누군가는 대규모가 된 믿음 집단의 교주가 되어 교단을 이끌게 된다. 대규모 집단을 통솔하려면 '규율/율법'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스승을 신비화하는 동시에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게 만든다. 왜? 그래야 세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기 때문에.


유가儒家유교그러하였고 불가佛家불교佛敎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었다. 그렇게 '가'와 '교'는 점점 더 간극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게 역사의 필연 과정이다. 그들 교재인 '경전'에는 '스승의 말씀'인 척, 자신들의 권위 세우기에 필요한 거짓 기록들이 알게 모르게 끼어들어간다. 유가의 경전은 어느새 유교의 경전이 되고,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후세의 '첨삭'이 끼어 들어갔다. 그 기록의 진위眞僞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 것이 중국 학술의 역사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후세 그들 믿음 집단의 인지체계는 그렇게 점점 더 거리가 벌어져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전도'의 중요성도 점점 더 커져갔을 터이므로.


둘째. 문학의 시각에서 볼 때 그렇게 판단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포함한 모든 종교의 경전에는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불교의 경전도 그렇고 유교의 경전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 어떤 부분을 어떻게 진위를 가릴 것인지, 어떻게 세월의 이끼를 벗겨내고 그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인지, 이제 와서 고증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문학'으로 판단하면 된다. 전체 맥락을 살핀 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 후세에 자의적으로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일까? 누구나 다 안다. 사랑이다.


예수께서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들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여 설명해 주셨다(마 22:35-40). 이 같은 가르침에 근거하여 사도 바울은 율법(십계명)의 완성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요약하였다(롬 13:8, 10) [ 네이버 지식백과 십계명 ]


예수님은 ‘십계명’이라는 옛날 약속(구약舊約)의 교재를 찢어버리고, ‘사랑’이라는 새로운 약속(신약新約)을 제시하신 것이다. ‘옛날 약속’은 십계명이라는 연역법적 명제 안에서 살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약속한 것이지만, ‘새로운 약속’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죄를 포용해 주겠노라고 예수님이 인간에게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약'의 기독교가 아니라 '신약'의 기독교다. 그 핵심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결단코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들을 채찍으로 성전에서 내쫓으셨다. 율법의 교재를 찢어버리고 권위주의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부숴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귀납적 해결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그러한 '사랑'의 정신과 위배되는 부분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것이 특정 세력만의 사리사욕에 부합된다면, 바로 그 부분이 후세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무엇이 제일 대표적일까?


'전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도의 방법'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주의'다.


여기에 대해 필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논리 전개의 중요성 때문에 그 내용의 일부를 다시 소개해 본다. 먼저 마가복음 6장 6~13절』을 공동 번역으로 읽어보자.


그 뒤에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다가, 열 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나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이 말씀을 듣고, 열 두 제자는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


이른바 기독교의 에반젤리즘 evangelism(복음주의, 선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①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견한 제자의 숫자는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씩이다.

② 예수는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와 같은 다분히 감성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방법으로 전도하라고 가르친다.

③ 예수는 만약 전도의 대상자들이 끝내 환영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면서 발에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리면서 경고하라고 가르친다.


정말일까? 예수님이 정말로 이런 가르침을 주셨을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환대하지 않는다고 발에 있는 먼지를 털면서 경고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에잇! 이 사악한 놈들, 퉤, 퉤, 퉤! 네놈들 어디 두고 보자! 그러라는 말인가? 그렇게 치졸한 방법으로 사랑을 전도하라고 가르치셨을까? 그럴 리가 없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 간곡히 당부하신 그 사랑의 예수님이 이런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고?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는 4대 복음서는 예수가 쓴 것이 아니다. 수백 개의 복음서 중에서 오늘날의 4 복음서 체제가 성경으로 고착된 것은 A.D. 4세기 경의 일이다.(김용옥,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3)』528쪽) 예수의 가르침을 믿음의 집단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진리의 말씀인 소리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담아내는 그 과정에서, 후세 신도들의 자의적인 첨삭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공자님 말씀을 그대로 녹취했다는 『논어』에도 그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에반젤리즘은 ‘절대 신神’의 존재, 즉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는 일이다. 절대 신의 존재를 믿느냐 안 믿느냐, 내 편이냐 아니냐, 적이냐 아군이냐, 그야말로 All or Nothing이다. 자연히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에 치우쳐 타인을 다분히 강제적으로 설득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쉽다. 그런 분위기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그게 예수님의 새로운 약속, 신약新約 아닌가.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를 어찌 기독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에반젤리즘이란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하기 어렵다. '예수'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예수'로 상징된 당시 지중해 서부 연안에 산재되어 있던 유대인 콤뮤니티의 종교적 성향, 즉 분리 패러다임의 산물로 보아야 타당하다. 분리 패러다임의 탄생 과정과 그 특징에 대해서는 <분리의 패러다임>을 보시기 바란다.


종교란 원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 피전도자 입장에서 보자면 결단을 내려야 할 사람은 결국 자기 혼자다. 피전도자는 혼자인데 전도자는 여러 명이라면, 아무리 좋은 진리라 하더라도 필경 공격적이고 고압적이며 강제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설령 감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들뜬 분위기 속에서 전도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이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신앙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시냇물과도 같다. 결코 참다운 전도의 성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도는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강요는 더더욱 아니다. 전도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에게 좋다고 해서 타인에게도 좋을 수는 없는 법.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란 결국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자각으로 터득하는 것 아니겠는가. 전도는 타인에게 선택과 자각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타당하다.


계기를 제공한다는 말은 여운을 남겨야 한다는 뜻.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둘 이상의 여러 사람이 몰려와서 충동적인 언어의 나열과 수식으로 선동하는 것보다는, 전도자 혼자서 묵묵히 진실하고 간절하고 처절하게 수행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을까. 그 힘든 과정 속에서도 언제나 평화로운 미소, 행복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진한 감동을 던져주지 않을까.


그러므로 전도란 그 자체가 치열하게 정진하는 생활이요, 처절하고 간절한 기도의 행위가 된다. 기도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의지할 것은 오직 자기 혼자뿐, 그것은 필경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기도하고 다락방에서 기도하셨다. 그것이 당신의 실천적 삶으로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전도 방법이었다. 후세의 에반젤리즘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채수일 목사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채수일 목사님은 또 말씀하신다. 구원은 '교리'가 아니라 '은혜'로부터 온다고. 그게 무슨 뜻일까?


배낭 하나 둘러메고 티베트고원에 숨어있는 교회들을 찾아간 적이 있다. 티베트는 삶의 모든 것이 불교다. 모든 티베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불교다. 그런데 그 속에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나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전도를 했을까? 구체적인 이야기는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을 참고하시면 좋겠다.


나는 티베트 땅에서 종교란 인지認知 체계가 아니라 실천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리가 아니라 실천임을 배웠다. '종교'란 타인에게 감동을 선물하는 실천의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은혜'란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 사랑을 실천하는 감동 어린 삶의 모습에서 찾아온다는 말씀 아닐까? 예수님의 사랑이든 석가모니의 자비이든 공자의 인仁이든, 모든 사랑은 필경 하나일 터이므로. 인류의 모든 위대한 스승은 모두 율법의 교재를 찢어버리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벗어나 '사랑'이라는 귀납적 해결방법을 제시했음을 잊지 말자.




종교재판이 열린 적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이야기냐고? 아니다. 1992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언론이 대서특필하였으므로 그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그 모든 사유의 출발이 바로 그 사건부터였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장소는 서울 중랑구 금란교회. 피고는 당시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 고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 재판장은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재판정에는 금란교회 신도들이 총 동원되었다. 변선환 교수를 변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출입이 원천 봉쇄되었다. 부흥회가 열린 것처럼 고성의 찬송가 소리가 미친 듯이 난무했다. 결국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는 변론도 제대로 못한 채 감리교에서 출교 당하고 말았다. 당시 한신대 교목실장이시던 김경재 목사님이 동아일보에 투고하여 하신 말씀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진리의 산은 하나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다.


다른 분도 아니고 한신대의 교목실장님이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시다니...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동안의 한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영혼이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어떠한가? 상황이 호전되었는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한국 교회는 부쩍 자본화하고 있다. '복음주의'를 외치며 '외적 성장'에 매달린다. 강남 부자 동네에는 대형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선다. 말이 좋아 '복음주의'고 '외적 성장'이지 솔까말 자기네들 돈벌이 장사 아닌가. 자식들에게 교회를 상속해 주고 권력과 결탁하여 세금은 일 원 한 푼도 안 내지 않는가.


무슨 근거로 그리 함부로 말하느냐고 말씀하시는가? 종교재판으로부터 13년이 지난 2005년. 1992년 당시 그 종교재판을 주도한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는 교회 돈 31억 원을 횡령하여 서울 고등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2006년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 이후 감리교회는 오랫동안 분규에 휩싸였다. 그게 감리교만의 일인가?


'기장'은 어떨까? 기장 역시 타 교파 못지않게 '보수적인' 개체 교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신대와 경동교회, 그리고 장공 김재준 목사님으로부터 강원용 목사님으로 이어지는 집단 지성의 힘을 믿고 싶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은 것 같다. 오죽하면 은퇴하신 채수일 목사님이 다시금 선봉에 서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시겠는가. 대한민국 기독교에 일대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순복음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다. 그런데도 소속 새소망교회의 조해강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하신다. 나는 순복음교회 목사다.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입도 뻥끗  없는 분위기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정말 돌이킬  없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늦기 전에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순교자를 향하여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그의 정신을 찬찬히 배워야  것이다.

<변선환 박사를 기리며 - 우리 시대의 종교재판>에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다. 아니다. 공자를 팔아먹는 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마찬가지다. 예수를 팔아먹는 자가 죽어야 기독교가 산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율법의 교재를 찢어버려야 한다.

한국 교회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부숴야 한다.

한국 교회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부수고 난 후, 그때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다.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부수고 '사랑’이라는 귀납적 해결법을 제시해 준

예수님을, 공자님을, 석가모니를, 그 모든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오, 캡틴, 마이 캡틴!




# 에피소드



"그럼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도 지옥에 가 있겠네?"

"당연하지. 세종대왕이든 이순신 장군이든 예수님을 안 믿었으니까 지금 다 지옥에 떨어져 있지."


시비를 걸려고 물어본 게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종교부장' 친구는 그렇게 확신에 차서 큰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기독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매 학급마다 신앙심이 돈독한 친구들이 '종교부장'을 담당하여 신앙심이 약한 친구들을 '옳은 길'로 선도善導했다. 우리 반 종교부장은 늘 십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특히 첫 번째 계명을 강조했다.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땅끝까지 전도해야 한다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늘 부르짖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거나, 예수님의 존재를 전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지옥에 떨어져 있단 말인가. '죄'가 있단다. '원죄'란다. 그래서 얼른 예수를 믿어야 한단다. 응? 그게 왜 그 논리로 이어지지? 물어봤더니 따지지 말란다. 논리로 믿는 게 아니란다. 사탄아 물러가라! 믿음이 약한 자여, 먼저 믿으시오! 큰소리로 외친다. 나는 마귀가 되었다.


이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님은 지옥에서 돌아오셨고, 마귀였던 나는 다시 인간이 되었다.

채수일 목사님 덕분이다. 깊이 감사드린다.




[ 대문 사진 설명 ]

◎ 채수일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경동교회 내부.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 김수근이 설계하였다. 제단 위 17m 높이의 천장에서 십자가로 내리비치는 빛이 깊은 감동과 영적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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