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오생 Mar 10. 2024

제13장. 혈이 뚫린 동북 해안

[제2부] 메시아의 땅, 관음도와 정매화골

대관령을 올라서니 온통 설국이다. 나는 모르는데 세상은 변해 있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한달살이 시작했다. 여기 이곳 묵호는 찬바람 가득하다. 수평선 너머 멀리 울릉도를 바라본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거센 파도 일렁이고 독도 가는 배는 보이지 않는다.

차 한잔을 달여본다. 천천히 색과 향과 그 맛을 음미한다. 차의 맛은 여운이다. 다 마시고 난 후, 돌이켜보는 이 맛이다. 그 여운을 음미하며 지난 세월을 돌이켜본다. 묵호의 추억도 잠시 세월의 항아리에 보관하고 훗날 다시 꺼내어 음미해 보리라.

이십일 년 전, 그리고 일 년 반 전에 울릉도에서 떠나보낸 그 파도가 여기 밀려오고 있다. 영영 떠나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와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듣는다. 침체에 빠져 황폐해 가는 영혼에 부어지던 맑은 샘물. 그 느낌을 떠올리며 한 잔의 차와 함께 천, 천, 히, 울릉도, 방랑의 추억으로 떠나간다.



#1. 울릉도의 혈


혈穴이란 무엇일까?


인체에는 기氣와 혈血이 있다. 그 기와 혈이 흐르는 경로를 경락經絡이라고 한다. 인체의 각종 기능을 조절해 주는 일종의 에너지 순환 계통이다. 그 경락 상에서 핵심 포인트가 되는 부위가 바로 혈穴이다.


혈穴은 원래 '바위 동굴'이라는 뜻. 그만큼 뚫기가 힘들다. 절정의 상승 무공을 연마하는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늘 난관에 부딪쳐 생사의 기로에서 헤맨다. 그 관문을 극복하고 혈穴을 뚫어내면 돌연 임맥脈과 독맥脈이 열리고 기경팔맥脈이 순통 하여 초절정의 고수가 된다.




울릉도 56.5km 해안선은 대부분이 절벽이다. 그 절벽 사이사이 작은 배가 접안할 있는 지형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과 마을은 절벽에 가로막혀 오랜 세월 고립되어 있었다. 아찔한 절벽길이 있지만 물건을 나르기도 힘들고 일 년의 절반은 눈으로 덮이게 마련인지라, 천상 배를 이용하여 왕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센 파도 밀려오면 접안 시설은 쑥대밭이 되었다. 경락이 꽉 막혀 있던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울릉도 주민들의 소망은 딱 두 가지. 첫째는 방파제 만들어서 항구다운 항구를 만드는 일이요, 둘째는 절벽에 가로막힌 혈穴을 뚫고 해안 일주 도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울릉도는 마침내 그 소망을 이뤄냈다.


출발은 1962년 10월. 당시 육군 대장 박정희 장군이 울릉도 순시를 나와서 하선하다가 파도에 쓸려 그만 물에 퐁당! 으흠~ 안 되겠군. 임자, 여기 방파제 하나 놓으시오! 분부하신 그 덕택에 울릉도 인프라 구축 사업이 시작되었다는, 성은이 망극하신 그 감동적인 스토리가 저동의 '육군 대장 박정희 장군 순찰 기공비'에 새겨져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제1장. 수평선> 참조.


아무튼 그리하여 1977년에는 도동에, 1980년에는 저동에 방파제가 완공되었고, 지금은 사동, 남양, 태하, 천부 등에도 항만 시설이 마련되었다는 이야기. 더욱 중요한 도로 상황은 어땠을까? 1963년, 해안 일주도로를 착공되어 2001년에 드디어 대부분 구간의 일주도로가 완공되었다.


딱 하나! 동북쪽 해안예외였다. 장장 4.75k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절벽 구간은 90% 이상을 터널로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혈穴이 막힌 것이다. 내가 2003년에 갔을 때, 가장 아쉽고 안타깝던 일이었다.


아래 지도를 보시라. 당시 내가 묵은 고바우민박은 저동. 일주도로가 끝나는 지점은 섬목. 지도로 보면 녹색의 점선이니, 아주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저기를 가려면 섬의 반대편 방향으로 뺑 돌아서 갈 수밖에 없다고?! 내가 다 열 받는다.


혹시... 내수전 전망대에서 석포로 넘어가는 산길은 없을까요?

안 뒤여! 큰 일 나! 사람이 을마나 죽었는지 말두 못혀. 아서! 아예 갈 생각을 하덜 마셔!


민박집주인 고덕진 어르신의 단호하신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쩝... 대체 어떤 길이길래... 이래 봬도 왕년에 설악산에서 방방 날아다니던 몸인데... 궁시렁궁시렁... 하지만 어르신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포기하던 때가 어제 같다.


그런데 그곳이 드디어 렸단다. 2019년, 착공 57년 만에 일주도로 전 구간 44.55km가 드디어 완공되었단다. 그 뉴스를 접하니 쿵, 덕, 쿵, 덕 가슴이 마구 뛴다. 막혔던 혈穴 드디어 뚫렸으니 울릉도는 이제 어떤 모습의 초절정 고수가 될 것인가! 어서 그 섬에 다시 가서 혈穴 뚫린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길을 걷고 싶었다.



#2. 관음도 이모저모



혈穴이 뚫려서 가장 빛을 보게 된 장소는 단연 관음도다.

예전엔 아무도 찾지 않는 무인도였지만 지금은 섬목과의 사이에 연도교가 놓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위의 지도에서 그 위치를 확인해 보시라. 2003년에 저동에서 저곳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반대 방향으로 한 시간을 달려 종점인 천부에서 내린 다음, 또다시 두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도착해 봤자 먼발치에서 그것도 섬목에 가려진 일부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찾아가야 할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금은? 저동에서 버스를 타면 10분이면 도착한다. 대부분 구간이 터널이라서 어둠 속에 빛나는 전등의 행렬만 보인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도착하면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일까? 관광 책자를 봐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저 경치가 조금 아름다운 곳?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관음도라고 할까? 예전엔 깍새가 많아서 깍새섬이라고 했다는데 언제부터, 왜, 관음도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무심한 안내판에는 아무 설명이 없다. 잘 모르면 스토리텔링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뭔가 스토리가 담긴 이름은 문화콘텐츠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질 테니 말이다.

나는 모든 사물의 이름에 관심이 많다.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제목이 별로면 주목을 못 받는다. 반대로 내용이 별 볼 일 없더라도 제목이 좋으면 때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 시인이 노래했듯, 모든 언어는 '실제'에 부합하는 '이름'으로 불러주어야만 비로소 빛나는 '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왕지사 이 섬의 이름이 '관음도'라면 그에 걸맞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면 어떨까?


형편없는 사진 실력이지만 아래와 같이 대충 몇 장소를 보여드릴 테니, 나그네 여러분께서 직접 의미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필자의 부족한 생각은 그 다음에 말씀드리겠다.

(상) 가운데 보이는 길이 [ 내수↔섬목 ] 구간. 왼쪽으로는 계속 터널 구간이다. 중앙에 보이는 터널을 지나면 바로 섬목이다. (하) 상단 사진의 터널 반대편. 여기가 섬목이다. 2003년에 왔을 때는 길이 여기서 끝나서 되돌아갔다. 중앙의 하얀 건물은 엘리베이터 탑. 저기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면 관음도로 이어진다.


물이 정말 정말 맑다. 천국인들 저렇게 맑고 깨끗할까...

방사형 주상절리란다.

다리로 연결된 주변머리 숲만 있는 곳이 섬목. 그 뒤로 내수전으로 이어지는 절벽이 보인다. 그 암벽에 57년에 걸쳐 터널을 뚫은 것이다.

삼선암이 보인다. <제9장. 무지개의 장> 참조.



#3. 관음도는 에덴동산, 메시아의 땅



'관음 觀音'은 무슨 말인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관세음보살은 누구인가? 어리석은 중생들을 서방 세계 어딘가에 있는 극락정토淨土로 인도해 주는 존재다. 그러니까 관음도는 극락정토의 땅인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신앙이 돈독하신 기독교인들께서는 노여워하고 관음도를 미워하실 지도 모르겠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라. 관음도는 동시에 에덴동산이기도 하니까. 관세음보살은 동시에 예수님이기도 하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실 것이다.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말이냐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이다. 역사적 팩트에 근거한 합리적 추리다.


불교는 언제 동아시아에 전래되었을까? 학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본격적인 유입은 후한後漢 명제 明帝(28~75) 때일이다. 그러다가 위진남북조(420~589) 시대에 이르러 돌연 엄청나게 흥성하였다. 어느 정도로 흥성했느냐? 중국땅을 아예 점령해버렸을 정도다.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당시에 양현지楊衒之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중국문학 최초의 리포트 서적을 쓴 게 있다. 책 이름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도읍지인 낙양의 가람(절)을 탐방한 기록 문학이다. 상세한 기록으로 신빙성이 높다. 아무튼 그 책에 의하면 낙양이라는 도시 하나에 절이 3만 개가 있었고 승려의 숫자가... 놀라지 마시라. 무려 200만 명이었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절이었고, 백성의 대다수가 승려였다는 이야기다. 불과 일이백 년 사이에 중국을 아예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러한 불교 숭상의 풍조는 당나라 중엽까지 이어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은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불교가 이렇게 동아시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대충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불교의 숙명론, 이른바 '업보' 논리 때문이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주장한다. 그 논리가 지배 계급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네놈들이 지금 우리들한테 지배를 당하는 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 업보를 받는 거라구. 내가 네놈들을 마음껏 지배하는 건 그만큼 선업을 쌓았기 때문이고. 그러니 끽소리 말고 절대복종하라귯! 알았지? 흐흐흐. 지배자들이 제멋대로 통치하기에 딱 좋은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현생이 괴로워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다음 세상에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터이므로. 또다시 그들에게 가혹한 지배를 당하며 온갖 괴로움에 시달려야 할 터이므로. 그래서 그들은 그저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해탈 mokṣa'을 꿈꾸었을 뿐이다. 이렇게 지배자들이 적극 받아들이니 흥성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 그러나 그 숙명론은 사실 석가모니의 '니르바나 nirvāna', 깨달음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불교의 공부 방법 때문이었다. 불교에서의 참선 공부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연마하던 호흡법이나 명상의 방법과 일치했기 때문에, 불교는 지식인 계층에게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불교가 단기간에 흥성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다.


셋째,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정토종淨土宗의 출현 때문이었다. 중국에는 4대 석굴이 있다. 그중 가장 큰 석굴인 황석굴과 용문석굴의 불상들을 연구한 결과, 대부분이 정토종의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불교의 종파는 바로 정토종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좌) 돈황석굴의 비천 飛天. (우) 신라 성덕대왕 신종神鐘(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 이들은 왜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일까? 극락 정토인 천국이 있고, 관세음보살만 믿으면 그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정토종의 교리를 접하고 환호작약하는 모습이다.




정토종이란 무엇인가? 인도에서 건너온 정토종은 기존의 다른 불교 종파의 교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소아시아의 패러다임, 즉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소오생이 뻥을 치고 있는 것인지 아래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이 직접 판단해 보시라.


첫째, 서방 세계 어딘가에는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극락정토가 있다. 왜 하필 서쪽일까? 헤브라이즘에서 말하는 에덴동산이 그곳, 서쪽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극락정토는 에덴동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둘째, 극락정토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다스린다. 헤브라이즘에서 말하는 야웨, 여호와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아미타불은 아미타유스(Amitāyus; 無量壽, 영원한 생명) 또는 아미타바(Amitābha; 無量光, 영원한 빛)의 음역이다. 과거 불교에는 전혀 없던 개념이다. 그런데 헤브라이즘의 여호와와는 너무도 근접한 이미지다.


셋째, 결정적인 것은 메시아의 존재다. 원래 서방 정토는 아무나 갈 수 없다. 집을 나와 산속에서 오랫동안 고행하며 깨달음을 얻었던 최고의 지식인 그룹, 즉 슈라마나(Śramana; 사문 沙門)만이 간신히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정토종은 말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너희들도 갈 수 있다. 방법도 너무 쉽단다.

오로지 관세음보살 이름만 계속 외치기만 하면 된단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러면 너희도 구원을 얻어 서방 정토로 갈 수 있다! 알겠느냐?


메시아의 역할을 바로 관세음보살이 담당하고 있다. 이 정도 유사성이면 헤브라이즘의 메시아사상 영향을 받은 게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무슨 뜻인가? '나무 Namu'는 귀의한다는 뜻이니, 다른 말로 풀이하면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은 기독교 용어로 '하나님'이며, '관세음보살'은 '예수님'과 싱크로율 99%다. 그러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기독교 기도문으로 번역하자면, 나는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그 뜻이 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결국 정토종의 옷을 입은 또 다른 그리스도교의 모습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리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이나 극락정토나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 예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사실 똑같은 메시아의 존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긴가민가 싶으면 절에 가서 부처님 상을 보시라.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존불 모습을 보면 생각나는 게 없으신가? 하느님 아버지인 '성부'가 그의 독생자 예수(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성령'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패러다임과 너무나 비슷하다.

기원전 원시불교에는 아예 불상조차 없었다. 그런데 325년 니케아 공의회會가 삼위일체 패러다임을 기독교 교리로 공인한 다음, 정토종이 등장하고 삼존불이 등장하게 된 것이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당시 인도에는 서방의 종교와 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보자. 그 정토종 패러다임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와 민중 불교의 뿌리가 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다. 똑같은 패러다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옷을 입었다고 우리가 왜 미워하고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다른 종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대한민국 기독교의 배타성을 다시 한번 돌이켜봐야 한다. 우리 사회 분열과 갈등의 상당 부분 책임은 그 배타성에 기인한다. 진리의 산은 결국 하나! 이 에덴동산에 와서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는 가르침을 다시 한번 음미해봐야 한다.




이제 울릉도는 57년 동안 막혀있던 혈이 뚫렸다. 그리고 신의 선물처럼 관음도가 나타났다. 혈穴이 뚫리면 임맥脈과 독맥督脈이 열리고 기경팔맥脈이 순통 하여 초절정의 고수가 된다지 않는가.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수는 없을까.


메시아의 땅, 이곳 관음도 에덴동산에서 서쪽으로 성인봉을 바라본다. 그 너머 서쪽으로 한반도를 오래오래 바라본다. 갈등과 분열의 땅, 우리의 조국 한반도가 이제는 기적처럼 하나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성인봉이 보인다. 그 봉우리 너머 수평선 너머 한반도가 하나 되길 소망해 본다...



#4. 정매화골의 메시아


이번에는 [ 내수↔섬목 ] 구간을 산길로 트레킹해 본다.


출발 지점은 내수전 전망대가 있는 상봉. 2003년 1월에 얼떨결에 올라갔다가 허벅다리까지 쌓인 눈밭에 빠져 자칫 봉변을 당할 뻔했던 바로 그곳이다. 다시 오르니 감개가 무량하다. <제3장. 눈 이야기>.

(상)2003년 1월 10일의 내수전 상봉. (하)2022년 10월 22일의 같은 장소. 여기서 정상의 전망대까지는 불과 5 ~10분 거리. 2003년에는 2시간 동안 눈밭에 빠져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상봉이 성인봉보다 전망이 더 좋은 데여. 아, 그람 거게가 좋고 말고... 고덕진 어르신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려온다. 내수전 전망대는 울릉도 최고의 뷰 맛집이다. 수평선은 직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인봉. 일주일만 젊었어도 저 능선을 올라탈 텐데...

멀리 섬목과 관음도가 보인다.

상봉 정상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 2003년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한 줄에 5000원(2022년 10월 물가)인 김밥으로 맛난 점심식사를 즐긴다. 무리 지어 올라 오신 어르신들이 날더러 "여보게, 젊은이~!" 부르시다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아, 아니구나. 죄송합니다. 우리 또래시네요..." 사과하신다. 나태주 시인이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 내수↔섬목 ] 트레킹 구간이 시작되었다. 고덕진 어르신이 절대로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던 그 산길이다. 도대체 어떤 길이길래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을지 궁금하다. 안내책자에는 석포 마을까지 두 시간 걸린다고 나와있다. 나는 네 시간 정도 생각하고 천천히 하나하나 느끼고 음미하며 걸어간다. 

뭐야 이거. 버스도 다니겠네?

드디어 산길 다운 산길이다. 야호, 이제야 쫌 걸을 맛이 나네.

사람을 한 명도 못 만났다. 오로지 나무와 숲. 상쾌한 오솔길. 숨겨놓고 싶다.  

한 시간 쯤 걸으니 예쁜 나무 다리가 나타났다. 뒤에 안내판이 보인다. 뭐라고 쓰였을까?

여기가 정매화골인 모양이다. 옆에 오래 된 신문 기사가 붙어있다.

감동적인 내용이다. 1981년 11월 27일 대구매일신문 기사 내용을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 울릉도 산 중턱에 구조의 집 - 가두봉 중간지점 이효영 씨 노부부 ]


섬마을의 험한 산속에서 길을 잃거나, 폭설 속에서 실종 위기에 처한 주민과 관광객들을 구조해오고 있는 노부부가 있다. 울릉군 울릉읍 저동 3동 363 내수전 마을 일명 매화골 이효영 노인(68)과 이복난 노파(61) 부부는 해발 600m나 되는 가두봉의 중간인 3백m 지점에서 외롭게 살고 있다.


이들 노부부는 지난 62년 9월 3남매를 데리고 와 이곳에 정착했다. 내수전 마을은 저동과 북면 중간에 위치한 인적 드문 외딴 곳이다. 저동과 북면의 주민들이 서로 육로로 오가자면 유일하게 이곳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길이 워낙 험난한 산재가 되어 40리에 4시간 정도 걸리기도 한다.


이들 부부가 정착한지 알마 안 된 62년 12월 중순께 李노인이 새벽 2시 쯤 화장실에 갈 때였다. 골짜기에서 사람 살려달라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노인은 즉시 눈이 쌓여 가슴까지 빠지는 산길을 올라가 30대 남자(이름을 기억 못함) 두 명을 구조, 집에서 4일 간의 치료로 살려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수해 때나 폭설이 내리는 겨울에는 노부부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불의의 사고를 입는 주민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치고 았다. 또 지난 77년 1월 군청 직원 김기호씨(당시 32세)가 영농 자금을 수금하러 북면에 출장 갔다가 귀가 길에 폭설로 집을 잃고 산속에서 5시간을 헤메다 추위와 허기에 못이겨 실신, 죽음 일보 직전에 있을 때 노부부에 의해 생명을 건졌다.


지난 9월 1일 수해 때는 북면 주민 고태진씨(54) 남을출씨(57) 등 2명이 폭우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것을 죽음을 무릅쓰고 구조했다. 이들 부부는 등산길에 길을 잃고 허덕이던 여학생 3명을 구조, 손녀처럼 알뜰히 보살펴 건강을 회복시킨뒤 집으로 귀가시키기도 했다.


이들 노부부는 집 뒷산 4천 5백평을 개간, 특산물인 옥수수 감자를 재배, 어려운 생활을 해오다 4년 동안 계속된 수해로 모두 유실당해 지금은 밭농사 하나 없이 주민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구멍가게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19년 동안 노부부에게 구조된 사람은 무려 3백 여명에 이르고 있지만 고마움을 알고 편지나 다시 찾아오는 사람은 불과 몇십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 노부부는 이곳을 떠나 육지로 나가려해도 행정당국과 주민들이 계속 머물러달라는 당부로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는데 주민들은 노부부의 집을 '조난대피소' 또는 '구조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군은 이곳에 상비약을 준비해주는 한편, 내년 8월 울릉도 개척 100년을 맞아 이들 노부부를 표창키로 했다. <울릉, 박동식 기자>  


아닌 말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구해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정말 감동적인 것은 살려준 것만이 아니라 끝까지 조난자들을 보살펴주었다는 점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이 무슨 여력으로 4, 5일 씩이나 먹여주고 재워주었을지, 그나마 없는 살림이 거덜나지는 않았을지, 생각만해도 마음이 짠하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19년 동안 목숨을 걸고 300명이 넘게 생명을 구조해주었단다. 그런데 고맙다고 다시 찾아온 사람은 1/10도 안되었단다. 찾아오지도 않고 감사 편지조차 안한 사람들... 왜 그랬을까? 어르신들 소중한 식량과 잠자리를 뺏었던 사실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설마,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 270명 모두가 그랬을 거다. 민주화운동이라도 하다가 전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못왔을 게 틀림없다. 설마...


다시 찾아오신 분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감사의 뜻을 표했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이효영 어르신 부부는 늘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생활이 곤궁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혹시 자신의 목숨을 싸구려로 취급하지는 않았을지,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인간의 간사한 마음이 속상하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던가. 생명의 은인을 찾지도 않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그 사람들 중에 혹시 나는 없었는지, 한참을 생각해본다.


행정 당국의 처사가 제일 괘씸하다. 어르신 부부가 생계를 위해 이주를 하려고 하자 못 가게 말렸다고? 상비약은 주겠으니 계속 머물러달라 했다고? 기왕 고생했으니 더 뺑이 쳐라, 그 말인가? 하긴 1981년 11월 당시라면 광주에서 피바람이 일어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니 무엇을 바라랴. 그렇다면 지금에라도 노부부의 의로운 삶을 기념하고 국가유공자로라도 표창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긴 지금은 기괴한 바보가 온갖 난리를 치는 해괴망측한 세상이니 할 말이 없군... 쩝


물론 이효영 어르신이 보상을 바라고 조난자들을 구조해주고 또 보살펴주신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삼백 번이 넘는다지 않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 사람 살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는데... 대체 울릉군수는 무얼 하고, 경상북도 지사는 무슨 짓을 하고 있길래 달랑 안내판 하나 달아놓고 있다는 말인가. 문득 울릉군수가 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르신의 인간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긴 여기 이 정매화골이야말로 참된 메시아의 땅 같았다. 으뜸 가는 깨달음, 싯단타(siddhānta)세계는 중생의 삶속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효영 어르신이야말로 살려달라는 민초들의 애끓는 비명소리를 듣고 현현하신 관세음보살이 아니었을까. 낮은 곳에 임하여서 민중의 고통 속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효영 어르신처럼 작은 메시아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할 것인지 곰곰 생각해본다...

숨어있는 메시아의 땅, 정매화골.

지금 이 트레킹 코스는 잘 다듬어져 있다. 급경사진 곳도 없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고즈넉한 정취를 맛볼 수 있는 산길이다. 정매화골 이효영 어르신의 메시아 정신이 좀 더 기려졌으면 좋겠다.

유일하게 만났던 덩치 큰 동물. 넌 이름이 뭐니? 월월월월~~~~ 아, 월월이구나!

안용복 기념관. 여기서도 단 한 명도 못 만났다. 안용복 님은 무슨 마음이실까... 외롭지 않으실까...

독도가 보인단다. 시절이 하 수상해서 그런지 내 눈에는 안 보인다. 망원경으로 봐도 눈앞의 죽도만 보인다. 오해하지 마시라. 일본 넘들 竹島가 아니라, 대나무가 많아서 붙은 진짜 이름 그대로의 죽도竹島이다.


<끝>

이전 13화 제12장. 독도의 눈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