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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r 17. 2024

제14장. 바람 부는 대풍감

[제2부] 한국 10대 비경 중의 으뜸 비경

우~~~와~~~!!! 

대한민국에 이런 데가 다 있어!?

정말 여기가 우리나라 맞아?! 

늦게 올라오신 아주머니 한 분이 위의 사진 속 풍광을 목격하자마자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탄성을 내지른다. 무려 1분 정도를 그저 우와, 우와~ 감탄사만 연발한다. 이윽고 핸드폰을 꺼낸다. 이제 사진을 찍으려나 싶었는데 딸내미에게 전화를 하시는 거였다.


얘~ 얘! 여기 좀 봐 봐!


목소리가 완전 하이톤이다. 드디어는 핸폰을 높이 쳐들고 사면팔방 빙빙 돌고 전후좌우 높낮이까지 조절하며 3D 촬영을 하며 현장을 보여주신다. 핸드폰 속에서 따님 목소리도 들린다. 소리만 들어도 지금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짐작하겠다. 열광하고 있을 그 리액션이 눈에 선하다.


우~와~~!!

아니 엄마, 지금 어딜 가신 거유?

외국 가셨어? 거기가 정말 우리나라 맞아?  


네, 우리나라 맞습니다. 맞구요~ ^^ 아니 왜 사람들은 멋진 풍광만 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런 데가 있냐는 둥, 그런 말씀들을 하실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말도 못 들으셨나? 우리나라 섭섭하게스리... 앞으론 멋진 풍광 나타나면 우와, 역시 우리나라야! 그렇게 말하면 참 좋겠다.

여기는 태하 향목 전망대.

오른쪽으로는 장쾌한 울릉도의 북쪽 해안.(위의 사진들)

왼쪽으로는 높이 154.2m의 바위 절벽인 대풍감(아래 사진)이 보이는 한국 10대 비경 중의 으뜸 비경이다.

10대 비경이 뭔지 궁금해서 검색해도 정답을 알 수 없다.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지맘대로 선정했단다. 하지만 전혀 시비 걸 마음이 없다. 오히려 내 멋대로 그중에서도 여기를 최고의 으뜸 비경으로 선정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장쾌하다 호연지기 상'을 준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곳이다.


역마살이 잔뜩 낀 소오생은 30년 동안 퍽이나 싸돌아 다녔다. 다닌 곳은 주로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 북으로는 금강산과 백두산에 드넓은 만주 벌판, 동으로는 습기 많은 왜인 나라, 남으로는 대만 필리핀에 베트남 인니까지 다니면서, 30여 년 훈장질 직업병 탓에 쓸만한 풍광만 나타나면 꼭 점수를 매기는 버릇이 있었다.


우리나라 금강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은 94점 정도. 백두산 천지는 95점. 그에 비하면 누런 황사 먼지 뒤집어쓴 중국 북방 황하 지역 성적은 영 별 볼 일 없었다. 중국이 자랑하는 태산에 숭산 화산 황산이라 해도 간신히 90점 넘을까 말까. 흠, 역시 대한민국이 최고군. 늘 자랑스러운 마음이었다.


물론 서역 땅은 이야기가 다르다. 화염산에 천산산맥 타클라마칸사막. 파미르고원... 96, 97... 게이지가 슬금슬금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티베트고원 히말라야 줄기의 신령스러운 설산 앞에 마주 서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아이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교만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대자연 앞에서는 저절로 무릎이 꺾이지 않을 수 없다. 100점은 차마 줄 수 없으니 99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반도 이 작은 땅덩어리, 이 작은 외딴섬에 이렇게 호쾌 무쌍한 스케일의 천하제일 풍광이 숨어있을 줄이야! 태하 향목 전망대! 정말 장쾌하기 그지없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바로 떠오른다. 맹자가 울릉도 대풍감에 와 보고 한 말이 아닐까, 별 시답잖은 생각까지 다 든다.


동쪽으로 보이는 울릉도 북쪽의 장쾌한 해안선 절벽도 그러하거니와, 북쪽의 일망무제 수평선... 그리고 그 너머 하나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백두산 아래 신령스러운 우리 겨레의 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흐른다. 이곳은 대체 몇 점을 주어야 할 것인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용히 99.1점을 주었다. 100점을 줄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최소한 노래를 들어야 한다.

어떤 노래?


김광석, <광야에서> 

2절은 중국어로 번역해서 학생들과 함께 교내 축제에 출연, 2등 상 먹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조심하자. 태하 향목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상당히 아슬아슬하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구멍이 숭숭 뚫린 철망이어서 200m 밑이 그대로 보인다. 게다가 앞을 가로막은 유리 벽이 제법 높아서 바로 아래의 투명한 바닷물을 찍으려면 뭔가 장비를 동원해야 할 것 같다. 혹시라도 Bono 작가님 같은 분이 카메라를 내밀고 위험한 포즈로 찍을까 봐 지레 조마조마하다. 모두들 조심!!! 차라리 잠시 후에 제가 알려드릴 '비밀의 장소(?)'가 더 안전할 듯. 아시것쥬?



바람 부는 대풍감


그나저나 대풍감은 무슨 뜻일까? '대풍待風'은 '바람을 기다린다'는 뜻. '감坎'은 '물굽이'라는 뜻. 일종의 작은 '만灣'인 셈이다. 아래 사진의 움푹 들어간 곳을 보시라. 반원형으로 살짝 패인 곳이 있죠? 거기가 바로 대풍감이다. 본토 사람들이 울릉도에 와서 새 배를 만든 다음, 바로 저곳의 바위에 닻줄을 매고, 돛을 높이 달고서 본토 쪽으로 향하는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돛이 휘어질 만큼 강한 바람이 불면 도끼로 닻줄을 끊고 한달음에 본토까지 갔다는 안내 책자의 설명이다.

아니 근데 설명을 하려면 제대로 할 일이지, 궁금증만 잔뜩 키워놓고 도망쳐버렸네? 이런 쯧쯧...

(1) 본토 사람이 왜 울릉도까지 와서 배를 만들지?

(2) 본토 사람 누가? 역사적 기록이 있나?

(3) 어떤 바람? 지금도 그런 바람이 부나?

호기심 많고 할 일 없는 소오생은 그것이 알고 싶어, 책도 뒤져보고 여기저기 인터넷의 서핑도 즐겨본다.

봉래폭포 가는 길

(1-1) 울릉도에는 배를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가 많다. 산꼭대기 아찔한 절벽 능선 위에도 키 큰 소나무 편백나무가 울울창창 쭉쭉 뻗어있다. 그 모습을 처음 대했을 때 탄성을 지르느라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던 소오생이, 아하 그래서 이름이 울창할 울鬱, 능선 릉陵인가 보다... 혼자 지레 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풍감 근처에서 나무를 구해 배를 만들었다면, 북쪽 해안 마을인 천부와 현포 일대가 유력하다. 특히 천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나리분지다. 평탄한 분지에 원시림이 가득하다. 아주 쉽게 벌채할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장소다.

나리분지 원시림 사이의 산책길

(1-2) 조선시대에는 울릉도에 주민이 살지 않았다. 왜적의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조선은 태조 때부터 쇄환刷還 정책, 즉 아예 주민들을 외딴섬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空島 정책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따금 본토에서 살기 싫은 사람들이 세금 없는 울릉도로 도망가서 살면, 관리들을 파견하여 깡그리 본토로 압송해 왔다. 싹쓸이 할 쇄刷, 돌려보낼 환還, 그래서 '쇄환'이라고 이름한 소극적 방어 정책이었다.


(1-3) 독도 부근 해역, 왜놈들이 대화퇴大和堆라고 부르고 우리는 2015년부터 '강치초'라고 부르는 그 일대는 천혜의 어장이다. 그래서 강원도 경상도 어부들이 늘 몰려들어 어업을 하던 곳임은 조선 숙종 때의 어부 안용복의 활약을 통해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 기억 나시죠?  <제12장. 독도의 눈물>


그 어부들은 당연히 울릉도에도 들렀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살지는 못했다. 왜냐구요? 바로 위에서 설명해 드렸다. 잡히면 치도곤을 맞았다. 안용복도 그래서 치도곤을 맞고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지 않는가.




(2-1) 그럼 낡은 배를 타고 와서 새 배를 만들어 갈아타고 갔던 본토 사람들이란 대체 누구일까? 전라도 사람들이다. 두 가지 근거가 있다.


(2-2) 첫째, 조선말 검찰사 이규원이 올린 장계다. 1882년, 왜놈들이 울릉도에 자주 출몰하여 나무를 베어간다는 장계를 접한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인지 살펴보라고 명령한다. 이규원은 선박 3척에 102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울릉도에 와서 11일 간 꼼꼼하게 살펴본 후, 충분히 살 수 있노라고 장계를 올린다. 이때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본인 78명과 조선인이 140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115명이 전라도 여수 거문도 고흥반도 인근에서 온 뱃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고종은 1883년 울릉도 개척령을 내리고 본토 주민(주로 강원도 사람)들을 울릉도로 이주시킨다. 조선이 쇄환정책을 폐기하고 해양으로 눈을 돌린 역사적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


(2-3) 둘째, 전라도 사투리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도 울릉도에는 전라도 방언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독도'라는 명칭도 전라도 방언에서 유래되었음은 지난번 <제12장. 독도의 눈물>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때문에 인류학자 전경수는 15년 동안 field work의 결과물인 울릉도 오딧세이》책을 통해, 독도의 영유권 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울릉도에 남아있는 전라도 방언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1) 전라도에서 머나먼 울릉도까지 동력도 없는 배가 어떻게 왕래를 했을까? 기록을 보면 무동력으로 강원도나 경상도에서 울릉도를 가려면 대충 1박 2일 정도 걸리는 것 같다. 거문도라면 날씨가 좋더라도 3박 4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듯.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농경 국가다. 그 정도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단숨에 노 저어 갈 수준의 항해 능력이 있었을까?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 어떻게 내왕했을까? 인류학자 전경수의 책을 보면 그 답이 나와 있다. 비결은 바람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춘삼월 동남풍을 이용해 돛을 달고 울릉도에 가서 나무를 벌채하여 '새 배'를 만들고, 여름내 미역을 채집해 두었다가, 가을철 하늬바람(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그리고 고기를 가득 싣고 하늬바람에 돛을 달고 남하하면서 지나오는 포구에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면서 거문도로 귀향하였다.



(3-2) 또 있다. 해류다. 이른바 '대마 난류'를 타고 가면 무동력선이라도 제주도에서 독도까지 하루면 갈 수 있다. (초속 0.5~ 3m. 네이버 지식사전) 그런데 왜 '대마對馬 난류'라고 부르는지, 열받는다. '제주도 난류'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곳곳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재가 스며들어 알게 모르게 친일파의 득세를 돕는다.

거문도 뱃사람들은 주로 한려수도의 내해 안에서 활동했던 경상남도 뱃사람들과는 다르다. 남해안과 제주도 사이의 외해에 위치한 탓에 먼바다 항해에도 제법 익숙했을 것이다. 게다가 '제주도 해류'의 흐름도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도 봄에 부는 샛바람(동풍)과 마파람(남풍)을 타고 '제주도 해류'의 흐름을 올라타면 손쉽게 독도 인근의 강치초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려면 해류가 반대로 흐르니 올 때만큼 쉽지 않다. 오로지 강력한 바람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경수 님은 가을철 하늬바람에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좀 더 강력한 바람이 필요했을 것 같다. 하늬바람에 더하여 초겨울에 이따금 불어오는 지독한 된바람/높바람이 필요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 바람을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곳이 바로 이곳 대풍감이었던 것이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진다. 일망무제의 북쪽 수평선에서는 높은 파도가 거세게 밀려든다. 강력한 높바람에 돛이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다. 덥수룩 수염의 건장한 사내가 뱃머리에 우뚝 서서 도끼를 높이 들고 외친다.


높바람이다!

출항이다!!

집에 가자!!!


그리고는 도끼를 내리쳐 단번에 닻줄을 끊어낸다. 10여 척의 배가 차례로 닻줄을 끊어내고 뒤를 따라 출항한다. 고향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일이백 년 전. 초겨울의 그 어느 날. 하얗게 눈에 덮인 대풍감. 그 절벽 아래에서 북풍한설에 일렁이는 파도를 타고 출항하는 십여 척의 전라도 선단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 같다.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가미되면 그대로 스펙터클 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일주일 만에 천만 관객을 가볍게 돌파할 것 같다. 도전해 보실 시나리오 작가님 안 계신가요?



향목 전망대 가는 길



그 느낌을 맛보시려면 당연히 겨울에 와야 한다. 겨울에 오면 관광객이 적으니 독도 가는 배도 없고 각종 시설도 운영하지 않는다. 눈도 엄청 쌓일 테니 고생 문이 훤하다.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다. 향목 전망대에 오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모노레일이다. 손님도 없고 날씨도 나쁠 테니 운영할지 장담 못한다. 또 하나는 경사 심한 눈길을 걸어서 올라가는 방법이다. 선택은 자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고생하지 않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2003년 처음 울릉도에 왔을 때는 당연히 모노레일이 없었다. 이곳을 올라가는 산길도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찾기가 힘들었다. 아니, 울릉도 안내 책자에 아예 대풍감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2022년 울릉도를 다시 찾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바람결에 대풍감 소문을 듣고 그 장관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이런 스케일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육안으로 보는 게 완전히 다를 터이므로.


대풍감을 가려면 우선 태하에 와야 한다. 버스 노선은 두 가지.

(1) 도동 출발 ⇒ 사동 ⇒ 남양 ⇒ 태하

(2) 도동 출발 ⇒ 저동 ⇒ 천부(종점이므로 여기서 갈아타야 한다) 천부 ⇒ 현포 ⇒ 태하 

 

태하에서 대풍감을 가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모노레일

(2) 산길

(3) 해안 트레킹 코스

모노레일로 올라갔다가 해안 산책 코스로 하산하는 방법을 강추한다.

오른쪽은 모노레일 타는 곳. 왼쪽 해안 절벽에서 공사하고 있는 것 같은 곳이 해안 산책로 시설이다.

국내에서 가장 가파른 모노레일이란다. 막상 타면 아주 안정적이다.

눈이 부시다.

이 눈부신 아름다움을 어떻게 형용할까...

모노레일 역. 금방 도착한다. 눈부신 아름다움도 금방 지나가 버린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편도 6분. 304m.

모노레일 정거장 뒤에 있는 안내판. 여기가 향나무재 향목령이란다. 예전엔 여기에 오로지 아름드리 향나무만 꽉 들어차 있었단다. 그런데 산불이 나서 싹 타버렸단다. 그 냄새가 강원도까지 퍼졌단다. 아쉽다...

연리지連理枝는 서로 다른 나무의 뿌리가 엉켜서 일심동체, 한 그루로 자라나는 나무를 말한다. 원래는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라는데, 요새는 곳곳마다 연리지 안내판이 있어서 식상하다. 게다가 여기 이 연리지 전설은 영 기분 나쁘다. 화가 나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사또라는 작자가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소개開하게 되었는데, 동남동녀를 남겨놓고 가야만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나? 그래서 진짜로 남자 어린애 한 명과 여자 어린애 한 명만 섬에 남겨놓고 떠나갔다나? 다음 해에 돌아와 보니 애들은 백골이 되어서 이 연리지 나무로 변했더라나 어쨌더라나. 아니 애꿎은 어린애들을 죽여놓고 무슨 연리지 타령? 이런 뚱딴지 개솔(!)도 스토리텔링이랍시고 이런 안내판에 우려먹었다는 게 화가 난다.


'연리지'는 보통 사랑의 맹세를 할 때 써먹는 말이다.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당나라 현종이 죽은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중얼거린 노래 가사이겠다. 그것도 사실은 백거이易(772~846)의 상상 속 픽션에 불과하지만. 유명한 <장한가 歌>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칠월 칠석 그날 밤/ 장생전에서, 남몰래 속삭였던/ 사랑의 맹세.

"바라건대/ 하늘에선 비익조 되고, 원하옵기/ 땅 위에선 연리지 되길"

이 세상 마지막/ 다가올 날 있어도, 이별의 아픈 마음/ 끝날 날이 있으랴!

七月七日長生殿,夜半無人私語時。

在天願作比翼鳥,在地願為連理枝。

天長地久有時盡,此恨綿綿無絕期。


여성 작가님들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마시라.

오옷. 뭔가 세련되어 보이는 풍광이... 향목전망대가 보인다.

태하 등대. 안 궁금해서 안 가봤다. ^^;;

등대를 갈 것이냐, 전망대를 갈 것이냐.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등대는 여기서 이렇게 사진 한 장으로 때우자. 갈 길이 바쁘다.

여기서 쓰레기 버리면 뗏찌! 담배 피면 300번 압색 한다는데?

누군지 최악의 패션 상 받을 것 같다.

등대 뒤로는 험산준령이 버티고 있다. 여기가 정녕 섬이란 말인가.



대풍감 전망대



앗! 저게 뭐지? 위의 사진에서 좌측 능선의 노란 원 안에 뭔가 보인다. 보이시죠? 줌 업으로 당겨보니... 어라? 저기도 전망대 같다. 황급히 자료를 찾아보니... 어쩐지 저기가 진짜 같다. 아래의 사진은 나중에 소오생이 작가님들을 위해 만든 <대풍감 조감도>다. 비록 조악하지만 잘 살펴보시라. 지금 여기는 향목 전망대가 있는 '등대'다. 저기, 대풍감 전망대를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까?

당연히 향목 전망대에서 왼쪽 방향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고개를 돌려보니 길도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향목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길 입구를 빨간 줄로 막아놓은 것이다. 어라?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는 뜻인가? 확인해 봐야겠군. 슬그머니 줄을 넘어가 본다.


아빠랑 같이 온 꼬마 친구가 눈이 똥그래져 다급히 외친다. 아저씨, 그리로는 가지 말라고 줄 쳐놨잖아여~! 검지손가락으로 쉿~, 한쪽 눈으로 다정하게 윙크~ 한 방 날려주었다. 빠이빠이 손 흔들어준다. ㅋㅋㅋ

경사가 좀 급했지만 위험한 길은 아니었다. 위의 사진 오른쪽이 향목전망대에서 내려온 길. 그렇다면 왼쪽으로 올라가면 대풍감 전망대이겠죠? 길도 잘 나 있는데, 왜 줄을 쳐놨담?

5분 정도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타났다. 잔 가지 나무가 많아서 생각만큼 전망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어찌어찌 나뭇가지를 피해 사진을 찍어보았다. 이곳이 전라도 선단이 높바람을 기다리던 진짜 대풍감, 그 현장이다. 겨울에 오면 어떤 느낌일까. 눈보라가 휘날리고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에 와보고 싶다. "출항이다! 닻줄을 끊어라!" 그 소리를 듣고 싶다. 십여 척의 전라도 선단이 줄을 지어 눈보라를 뚫고 이 작은 만을 빠져나가는 그 장면을 보고 싶다.

향목 전망대가 한참 위쪽에 보인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쾌한 절벽이다.

그러나 이 전망에 만족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위에 올라가면 뭔가 또 있을 것 같았다. 아까 향목전망대에서 줌으로 당겨서 본 전망대가 분명 이 위에 있을 것 같았다. 길도 보이지 않는가!

여기다!!! 여기가 진짜 대풍감 전망대다!

정말 장관, 또 장관이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는 엄청난 스케일이다.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하여 한 컷에 담아보지만 직접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보면 볼수록 전율이 일어난다.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들으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까닭 모를 슬픔과 뜨거운 희열이 울컥울컥 솟구친다.


그런데... 아무도 없지? 도동 저동의 많던 관광객은 어디 갔지?

이 천하 제일경을 오로지 혼자 음미하다니... 그래서 더 슬프고 더 감격적이다.

에라, 모르겠다. 100점 만점에 99.9점을 준다.

여기서 바라보는 병풍 절벽과 향목전망대, 등대와 성인봉 능선은 또 다른 느낌이다. 아까는 저기서 여기를 바라보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 위치에 서서 상대방을 바라본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음미해 본다.


백척간두 진일보! 저 절벽 끝에서 뛰어내려라!

허공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 아상我相을 던져버려라!

생각에 머무름을 두지 말아라 應無所住而生其心!  


이 푸르름이라니! 눈이 시리고 가슴이 시리다.

수평선 너머 바라보며 진리의 세계를 그리워했던 옛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배움의 바다는 끝이 없구나 學海無涯!



해안산책로


모든 잔치는 끝나게 마련이고, 막이 내리지 않는 연극은 없는 법.

자, 이제는 하산을 하자. 정상에 올랐으면 미련 없이 내려가야 한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일몰 전에 태하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인생 아닌가.

여기도 원시림. 혼자서 산책하는 이 즐거움이여.

너무나 마음에 드는 산책로. 매일 걷고 싶은 길이다.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있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예쁘다. 자세히 보면 더 예쁘다.

아침저녁 산책하면 도인이 될 것 같다. 칸트도 이곳을 산책하면 가치관이 바뀔 거다. 가슴이 뻥 뚫릴 거다.

해안산책로 곳곳 바위가 모두 가재굴이다. 가재, 가제, 가지어는 강치(바다사자, 물개)를 부르는 또 다른 단어. 굴은 동굴 또는 바위를 뜻한단다. 강치는 원래 이 일대의 바위살았는데, 고종의 개척령 이후로 인간이 많아지면서 독도로 이주했다가 왜놈들의 남획에 99% 몰살당했다. 나머지도 1948년 미국 공군이 독도를 사격연습장 삼았을 때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제12장. 독도의 눈물> 눈물이 난다.

해안에 길을 만들어놓았다. 덕택에 편하게 간다. 풍광은 무너졌다.

드디어 사람이 보인다. 태하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겠지?

화산 활동에 의해 생겨난 조면암이 풍화작용에 의해 구멍도 뚫리고 침식작용에 의해 만물상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도도하게 노려보는 저 매의 눈동자와 날카로운 부리를 보시라. 마음이 사악하면 안 보인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물론 뻥입니다요.

태하 마을이 보인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이 울릉도를 군으로 반포하고 이곳 태하 마을에 군청을 두었다. 울릉도와 죽도 및 석도(독도)가 정식으로 조선의 행정구역 안으로 들어온 날이다. 오늘날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한때 야당 대표가 10월 25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자는 말이 있더니만 어떻게 되어가나 궁금하다. 하긴 법을 만들어봤자 거부하면 그뿐이니... ㅠㅜ


울릉도에서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가...


<끝>


* 다음은 <임금과 시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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