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울릉도에서 만난 시인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滄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자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 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 2>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만은,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1>. 1935년, 12월.《시원》 5호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중략) ......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의 푸른 나무러니...... (중략) ......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짐승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병처 病妻>, 《신동아》1936.5.
20대 시절의 청마와 이영도.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의 외모 어디에도 플레이보이 기질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생각을 멀리 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이영도, <그리움>
그런데 이영도는 하필이면 아내 권재순의 친구 동생이었다네요. 찾아간 권재순에게 이영도는 말했답니다. 그저 플라토닉한 관계의 문학 동지일 뿐이니 안심하시라고 했다는군요. 그런데요, 만약 두 사람이 육체관계를 맺었다면 청마가 과연 5,000 통이나 편지를 보냈을까요? 저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
재미있는 것은 청마가 51세 때(1958년)부터 문학동호회에서 만난 반희정이라는 또 다른 여성과도 5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 물론 이영도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있었을 때이니 그 무렵엔 이를 테면 양 다리, 아니 세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쩝... 자, 사연이 이러하니 청마의 이 다채로운 여성 편력을, 그 내면 세계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청마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얼마나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이겠습니까?
- 유치환, 《자작시 해설 - 구름에 그린다》1959.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가 이렇듯 당신을 애모함은 무슨 연유이다?
당신의 용모? 당신의 자질?
- 아니거니! 당신을 통하여 저 영원에의 목마름을 달래려는 한 가상假像으로 -
그러기에 아득한 별빛을 우러르면 더욱 애닯게도 그리운 당신...
- 유치환 산문, 단장斷章, <목마름>.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에 수록.
후세의 평론가도 그의 편에 서서 이렇게 변명해줍니다.
청마의 이 같은 여성편력은 세속적인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생의 갈망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오세영,《휴머니즘과 실존 그리고 허무의 의지 - 유치환》, 건국대학교출판부.
브런치의 여성 작가님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위와 같은 '변명'에 동의하십니까?
소오생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변명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청마를 누구보다 좋아하면서도 누구보다 싫어했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울릉도 여행을 통해 청마의 <울릉도>를 만나게 되어 오래오래 생각하고 깊이깊이 고민해본 결과,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청마를 위해 변명해보고 싶습니다.
서구의 사유방식은 이원론, 분리의 패러다임입니다. 그들은 사랑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니 에로스의 사랑, 동성 간의 우정인 필리아Philia, 부모 자식 간의 스토르지Storge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것이 과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먼저 개념 정의를 내리고 그 잣대로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는 성격의 연역적 명제일까요?
그에 비해 일원론 패러다임에 기반한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사랑은 '하나'입니다. 나라 사랑, 겨레 사랑, 인간 사랑, 자연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등등... 삼라만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결국 '하나'로 인식합니다. 동아시아의 '사랑'이란 단어는 그 어느 고정된 대상자에게 국한된, 그리고 변화무쌍하기 마련인 '뜨거운 감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사람들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사랑의 대상자'를 찾기에만 급급해 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기술'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 세계에 언제나 지녀야 할 그 어떤 내면적 가치이지, 상대방이 누군가에 따라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기분 내키면 다시 나타나는 그런 '감정'의 성분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인간이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함'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혜안'이요, '선한 의지'이며, 또 그것을 맑고 곱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말'과 '글'과 '행동'으로 표현해내는 '실천력'이 아닐까요?
청마는 바람둥이가 아닙니다. 오천 통의 편지가 증명합니다.
청마는 마치 연애라는 것을 처음해 본 사춘기의 소년처럼 매일매일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지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작가님들이라면 그게 얼마나 정성을 쏟는 일인지 아실 겁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쓰는 글 아닙니까. 누구나 사랑 앞에서는 간절해지고 작아지는 법. 그런 마음으로 오천 통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 특정한 대상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의 성격을 뛰어넘었을 것입니다.
그 행위는 필경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삼라만상의 이면에 흐르는 원리를 톺아보는 수양의 행위나 마찬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청마의 1/10에 불과한 수량이지만 소오생도 아주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사랑의 가장 큰 특성은 '영속성永續性'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상대방에게, 특별히 인연이 닿는 이에게는 2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마음을 다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은, 청마의 내면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 사랑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는 것 아닐까요?
청마는 바람둥이가 아닙니다. 그의 창작 결과물이 증명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모든 중국인들은 그를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라고 비난하지 않고, 위대한 애국 시인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합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이소離騷>라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죠. 굴원은 자신의 내면에 가득 찬 나라 사랑의 마음을 맑고 곱게 정성을 다하여 <이소>라는 작품을 창작하여 후세에 남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극진한 내용의 글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해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이겠지요.
청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에게 창작 결과물이 없었다면 그는 바람둥이 카사노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名詩 명구名句를 수없이 많이 남겼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의 맑고 고운 내면 세계를 증명해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작품을 '관념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관념'이 무슨 말일까요? 사전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청마의 시가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내면세계의 핵심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그의 첫 시집 《청마시초》의 첫 작품 <박쥐>를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본래本來 기는 즘생
무엇이 싫어서
땅과 낮을 피하야
음습한 폐가廢家의 지붕밑에 숨어
파리한 환상幻想과 괴몽怪夢에 몸을 야위고
날개를 길러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호올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박쥐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요.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포유류. 쥐도 새도 아닙니다. 이를 테면 땅의 존재이면서 천상의 세계를 지향한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야윈 박쥐가 되어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날개를 기르겠노라 다짐합니다. 때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시대이니, 지식인으로서의 좌절과 절망, 그러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워 끝까지 저항하겠노라는 시인의 마음이 읽혀지는군요. 그 마음 자체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 아닐까요?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생명의 서 1장>을 읽어봅니다. <박쥐>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1938년 10월 19일. 동아일보에 발표
나는 누구인가? 참선하는 스님들의 영원한 화두이지요. 삶의 애증 속에서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끼던 청마도 '참 나'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유한한 자신의 지식 만으로는 뼈저린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작열하는 하얀 해와 뜨거운 모래만이 존재하는 사막과 같은, 극한 환경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운명처럼 '참 나'의 존재와 대면하고자 합니다. 역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입니다.
청마는 '참 나'의 존재를 찾았을까요? 훗날의 얘기입니다만, 그가 1955년 경주고교 교장으로 근무했을 때 학생들을 위해 만들었던 교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큰 나의 밝힘>
일. 나란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
일. 나란 나만으로써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일. 나란 나만에 속한 내가 아니다.
요컨대 '나'는 모든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너'의 인식이라는 이야기.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나 아닌 삼라만상 모든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뜻 아닐까요? 저는 그 '관계'를 '사랑'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시집 《울릉도》에 수록된 <바위>입니다. 해방 이후, 이영도를 만날 무렵의 작품이군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精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시인은 망각의 신이 되고픈 모양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심無心과 무정無情을 노래한 이백의 <경정산에 홀로 앉아>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군요. 이 역시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지요.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滄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자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 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이 역시 사랑이 주제입니다. 해방이 되자 이제 시인의 정체성이 명쾌하게, 거칠 것 없이 드러납니다.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극도로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자 시인은 나라 사랑의 마음을 여과 없이 토로합니다. 대체 무엇이 관념적이란 말인가요? 혹자는 청마가 울릉도를 가보지도 않고 지도만 보면서 지은 작품이라 관념적이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관념적인 거 아닌가요?
청마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4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자원하여 문인구국대를 조직, 육군 제 3사단에 종군합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종군 시인이 되었을까요? 1951년에 발표한 《보병과 더불어》를 읽어봐야겠습니다만 저는 그 역시 나라 사랑 인간 사랑 생명 사랑의 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흔히 세간에서는 청록파니, 순수파니, 참여파니 구분을 합니다. 그리고 청마 유치환은 생명파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남성적 강인한 의지가 엿보인다는 둥,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그리움과 슬픔 등의 여성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둥,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카사노바적인 바람둥이 성향이 있었다는 둥 수근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자신부터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하나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청마는 그저 극진하게 사랑을 하고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의 오천 통의 편지가,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수많은 아름다운 시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라 사랑, 국토 사랑, 인간 사랑, 남녀 간의 사랑... 그 모든 사랑은 필경 하나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도동 약수공원이 보인다. 저곳에 <울릉도> 시비가 있단다. 시간이 늦어 공원을 살펴보지 못했다.
1960년대의 도동 마을. 청마는 1961년~1962년 경주 여자 중고등학교 교장 재직시절 울릉도를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