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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Apr 21. 2024

제16장. 다시 일몰 전망대에서

[제2부] 나라 사랑 국토 사랑, 마음의  눈을 뜨다

울릉도에서 제일 인상적인 곳은 어디일까? 어디였을까?


2003년 1월 7일부터 1월 17일까지의 첫 번째 여행과,

2022년 10월 17일부터 10월 27일까지의 두 번째 여행을 통해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곳은 어디였을까... 지나간 발자취를 돌이켜본다.


내수전 상봉 전망대?

2003년 1월 10일. 허벅다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올랐던 곳. 당시 고바우민박의 주인이셨던 고덕진 어르신께서 울릉도에서 가장 뛰어난 뷰 맛집이라고 극찬하셨던 곳이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 40분,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정상에 올랐을 때는 오로지 회색의 어두운 동해바다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곳조차 없었으니 작은 감회나마 가져볼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제3장. 눈 이야기>


2022년 10월 26일. 두 번째 올랐을 때 살펴보니 과연 최고의 뷰 맛집이다.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의 인파 속에서는 20년 만에 다시 오르는 일말의 감회조차 느끼기 어려웠으니, 가장 인상적인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도?

2022년 10월 19일 오후 3시 20분. 두 번째 울릉도에 왔을 때 가 보았다. 너무나 가보고 싶었던 곳. 그러나 허용된 시간은 30분. 허용된 장소는 오로지 선착장. 좁은 공간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으니 감회를 느끼고 말고 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가기 전에, 그리고 돌아와서, 독도의 슬픈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며 정리해 보았을 따름이다. <제12장. 독도의 눈물>


성인봉?

2003. 1. 13일 정오, 그 정상에 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올라가 보고 싶었던 곳이니 어찌 그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겠는가! 한 시간 넘게 정상에 머무르면서 많은 상념에 잠겼던 곳이다. 하산할 때, 나리 분지 쪽으로 '봅슬레이'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간 경험은 아마도 소오생 일생에서 가장 신이 났던 순간이었으리라. <제6장. 아, 성인봉!> <제7장. 봅슬레이를 아시나요>


하지만 바다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특히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서 생각만큼 뷰 맛집은 아니다. 역시 가장 인상적인 곳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풍감?

2022년 10월 21일에 갔다. 첫 번째 갔을 때는 전망대는 당연히 없었고 길도 제대로 나지 않아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훗날 사진작가들에 의해 한국 10대 비경에 꼽혔을 정도의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니, 이 기막힌 절경을 대했을 때의 그 감격이야 이말해 무엇하랴!  <제14장. 바람 부는 대풍감>


하지만 '인상적'이라는 말은 필경 개인의 주관에 달린 것. 만약 맨 처음 울릉도에 왔을 때 맨 처음 이곳을 찾았더라면,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이곳 역시 소오생 개인의 울릉도 최고 인상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여행은 대자연을 만나러 가는 것



소오생에게 있어 울릉도 최고의 인상적인 장소는 남양에 있는 일몰 전망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호젓함 때문이었다. 내가 그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03년 1월 9일 오후 4시쯤. 이곳이 '전망대'라길래 서울의 남산 타워 같은 곳인 줄 알고, 여기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 시켜 먹으며 일몰을 감상하고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산 밑에 오니 어쩐지 수상쩍다. 방향을 알려주는 팻말은 있는데 올라가는 길이 영 이상하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좁고 경사진 산길에 눈만 잔뜩 쌓여있다. 미끄럽고 가파른 산길을 30분가량 헐레벌떡 올라가니, 병풍처럼 둘러친 아찔한 해안 절벽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이리저리 눈을 돌려보니 그 절벽 어느 외진 곳에 덩그마니 작은 정자 하나만 놓여있다.


어? 커피숍이 없네?

아, 그때의 그 당혹스러움이란... ^^;;

그러나 그것도 순간뿐, 나는 곧 그 호젓한 대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머무는 한 시간 반 동안, 우주에는 이 엄청난 스케일의 장엄한 대자연과 '나', 오로지 우리 둘 뿐이었다. 정경일체 情景一體, 나의 감정과 대자연의 풍광이 하나가 되어 만나고, 만화명합 萬化冥合, 나의 존재가 삼라만상과 하나로 융합되었던 곳이었으니, 어찌 가장 인상적인 곳이 아니겠는가!  

2003년 당시에 싸구려 필름 카메라로 남양 일몰전망대에서 촬영한 울릉도 남서 해안 절벽


여행은 대자연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대자연과 동일한 맥박 속에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고동치게 하고, 동일한 주파수의 사이클 안에서 기복起伏을 함께 해야만 그 대자연을 만날 수 있다. 그러려면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 제아무리 천하명승이라 할지라도 바글바글 인파에 뒤덮여 있다면 절대로 대자연을 만날 수 없다. '호젓함'은 여행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다.




여행은 호연지기를 만나러 가는 것



두 번째 이유는 그 호젓함 덕택에 그곳에서 동해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연지기'란 천지 간에 가득 찬 정의로운 기운이다. 한국인은 무엇을 통해서 호연지기를 배우기 시작할까? 애국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다. 여기가 바로 그 동해의 한가운데 아니던가! 백두산의 멧부리 방울 뛰어 호젓한 동쪽, 머나먼 심해선深海線 위에 한 점 섬으로 두둥실 떠있는 곳이 바로 이 울릉도 아니던가! 


2003년 1월 9일 오후 4시. 그때의 그 감동과 흥분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도 없는 남양의 일몰전망대. 그곳에 올라 눈앞에 전개된 풍광을 보자마자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무도 없었지만, 적막강산이 아니었다. 드넓은 중국대륙 그 거대한 땅덩어리보다 훨씬 더 광활하게 펼쳐진 우리의 금수강산이었다. 소오생 시야에 하나 가득 펼쳐진 그 모든 절경이 아름다운 우리나라 땅이었다.


전율이 일어났다. 백두산 상공에서 휘몰아쳐 내려오는 그 어떤 기운이 온몸의 핏줄 속에 찌릿찌릿 스며들었다. 국토 사랑, 그 마음의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 아래 아득한 수평선 너머 한반도 땅을 바라보았다. 내 사랑하는 학생들과 벗님들과 친지 가족들이 호흡하며 생활하는 그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라 사랑 겨레 사랑, 그 마음의 눈도 떠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팔각정 마루에 올라섰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호젓함이 선물한 대자연의 노래방이었다. 호연지기를 키워주는 대자연의 노래방이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하~안 마~안주 벌판~~~


김광석, <광야에서> 



여행은 생명력을 얻으러 가는 것



여행은 '동動'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행위다. 어디에서, 무엇을 얻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일까? 대자연에서 호연정기를 얻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 전통 학문에서 말하는 여행의 개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쪽의 대자연'에 가서 호연정기를 얻으라고 한다.


왜냐고? '동動'은 '동東'이니까. 옛사람들은 발음이 같으면 뜻도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같은 발음을 이용해서 웃음을 자아내려는 아재 개그는 단순한 개그가 아니라 나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대 황제들은 그 생명력을 얻기 위해 동악東岳 태산泰山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곤 했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그 생명력을 얻기 위해 밤새 태산을 걸어 올라가 그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자 염원한다.

태산 정상 부근 일관봉의 장엄한 일출. 이 광경을 직관하고 생명력을 얻는 것이 중국인들의 평생 소망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람들은 대륙문화에 속한다. 중국도 그러했거니와 우리나라의 임금들도 바다로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곳에서 생명력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좀처럼 갖지 못했다. 통일신라시대 해상왕으로 불리던 장보고張保臯(?~846)가 있었으나 그의 활동 무대는 서해와 남해였으므로 '동쪽의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동쪽 바다, 동해에서 생명력을 찾고자 했던 인물은 없는 걸까? 아니, 있었다. 나만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뿐. 그 사실을 알려면 대충이나마 울릉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울릉도에서는 고인돌과 무문 토기 등이 출토된다. 청동기시대에도 이미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다. 중국 역사책인 진수陳壽(233∼297)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권30에도 동해 한가운데의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최초의 역사 기록이다. 그 후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울릉도 관련 설화에 근거하고 일본의 기록도 참고하여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겠다.


우산국이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된 것은 모두 알다시피 이사부異斯夫의 정벌 덕택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사부는 신라 17대 임금인 내물왕의 4세 손으로 당시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이었단다. 지증왕은 그를 실직주悉直州, 즉 오늘날의 삼척 지역의 군주軍主로 임명한다.(505)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인 512년, 울릉도에 있는 우산국于山國 정벌을 명령한다. 이사부는 우산국 우해왕이 용맹하지만 어리석다는 소문을 듣고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그들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을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출항한 곳. 삼척항 인근에 있다. 2024년 3월 현재 공사 중.


이사부는 울릉도의 어느 곳으로 쳐들어왔을까? 우산국의 왕인 우해왕은 도읍을 어디에 정하였을까? 삼척에서 가장 가까운 울릉도 해안 마을은 바로 남양이다. 우산국 사람들은 아마도 일몰 전망대가 있는 이곳에서 이사부가 배에 태우고 온 나무 사자를 보고 기절초풍한 나머지 항복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우리 역사넷 재미있는 초등역사 > 이사부, 우산국을 정복하다”에서 인용.

일주 유람선에서 촬영한 남양 마을. 좌측으로 국수 바위가 보인다. 국수 바위 좌측 산기슭에 우산국박물관이 있다. 우산국은 이곳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사부의 군대도 이곳으로 쳐들어왔을 것이다. 

일주 유람선에서 촬영한 남양 일몰 전망대. (붉은색 원) 지금은 전망대에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우산국 박물관>. 내부에 일몰전망대로 가는 모노레일 정거장이 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박물관을 운영하지 않는다. 모노레일도 덩달아 주말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박물관 앞에는 보시는 바와 같이 고분총이 있고, 뒤에는 무료 캠핑장이 설치되어 있다. 캠핑장은 겨울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상) 2023년에 방문했을 때의 일몰전망대. (하) 남양의 명물, 남근 바위.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 사건의 주인공을 착각한다.

우산국 정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은 사실 이사부가 아니다.

지증왕智證 (437~514)이다.


그는 64세의 나이에 사로국斯盧國의 17번째 마립간이 된다.(A.D. 500년) 그가 마립간이 되기 전, 사로국은 진한辰韓 지역, 그러니까 오늘날의 영남 지역에 있던 열두 개 작은 나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마립간이 되자마자 나라에 엄청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우선 국호를 신라新羅로 바꾸고 마립간이라는 호칭 대신 여타 국가들처럼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제는 부족국가가 아니라 정식 국가임을 선언한 것이다. 마치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이었던 나라가 어느 날 자랑스럽게 선진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듯이.


그는 삼척 지역을 장악하고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한 후, 강릉 지역에 하슬라주설치한다. 지방 토호와 연합하여 영동 지방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해안 지역을 장악한 그는 이사부를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군주로 임명하고 우산국 정벌을 명령하였다. (우산국 정벌의 공로를 인정하여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우산국은 고구려와 왜국의 교역 항로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우산국은 아마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라에 복속하지 않고 먼 거리에 있는 고구려와 왜국과 친하게 지냈던 모양이다. 동해의 거친 파도가 신라의 공격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게다. 오로지 바람과 조류, 사람이 젓는 노의 힘에만 의지하여 목숨을 걸고 천리 바닷길을 건너와 공격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증왕은 과감하게 정벌을 명령했다. 그 어떤 눈앞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해야만 신라의 생명력이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한 것이다. 그 결과, 우산국은 매년 풍성한 조공을 바쳤고, 신라 앞바다에는 승려들을 제외한 고구려와 왜국의 배가 다니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라인들은 그 후로도 오랜 세월 동안 근심 걱정 없이 동해의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사부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역사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신라의 병부령이 되어 역사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3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증왕도 죽고 법흥왕도 죽고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는 상당히 젊은 장군이었으며 주체적으로 우산국 정벌에 나설 위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산국을 정벌하고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양을 개척한 사건에 있어서, 이사부는 그의 명령을 충실하게 실천에 옮긴 젊은 장수였을 뿐. 우리의 역사 속에 울릉도를 최초로 편입시켰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지증왕이었다. 이사부가 아니라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돌려야 한다.




우산국은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게 복속한다. 그러나 여진족 해적들의 빈번한 침략으로 울릉도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모든 주민들이 육지로 이주하여 우산국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니 이는 고려 거란 전쟁으로 유명해진 현종 13년(1022)의 일이다.


우산국이 멸망하자 울릉도는 임자 없는 텅 빈 섬이 되고 만다. 그러나 자고로 사람이 없는 땅은 살기가 좋은 법.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가며 어부들을 중심으로 또 사람이 들어가 그럭저럭 살아가지 않았겠는가. 아마도 가까운 강원도에서 흘러들어 간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왜인들도 들어와 살았을 것이다.




나는 두 번째 울릉도 여행을 가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몰 전망대에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그 사실을 돌이켜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조선 왕조는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을 시행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섬에는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쇄환刷還 정책까지 시행했다. 몰래 그 섬에 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몽땅 잡아와 치도곤을 돌린다는 내용이다.


엄청나게 큰 충격에 빠졌다. 나는 왜 이런 것도 몰랐을까, 자책이 되었다. 조선 왕조는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시행했을까, 분노가 치밀었다.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건 명분일 뿐. 그게 겁이 난다면 해안가에 살지도 못하게 해야 하고, 산적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산에도 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 아닌가. 당연히 적극적으로 국방 정책을 펼치는 것이 위정자로서의 기본적인 책무 아니던가.


그것은 사실 백성들이 통치가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도망가서 역적질을 할까 봐, 가렴주구를 피해 세금도 안 내고 부역도 안 할까 봐, 그래서 자기네들 기득권자들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봐, 그래서 눈앞에서 다스리기 편하도록 장난친 것 아니겠는가!


놀라운 것은 우리가 성군으로 받들어 모시는 세종대왕마저 공도 정책, 쇄환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권 153 지리지》에 보면 우산도(독도), 무릉도(울릉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중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래 사진 한가운데 붉은 줄 쳐놓은 곳)

태조 때 유랑민에게 들으니 밖에서 그 섬(울릉도)에 들어가는 자가 매우 많다고 했다. 다시금 삼척 사람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그 섬의 주민들을 모조리 비우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인우가 말하였다.

그 섬은 토지가 비옥하여 대나무가 나무 기둥만큼 굵고, 쥐가 고양이만큼 크고, 복숭아씨가 됫박만큼 큰데, 섬에서 나는 모든 물건이 전부 다 그처럼 크더이다...

그 당시 울릉도가 얼마나 살기 좋은 땅인지 알려주는 증거다. 이렇게 좋은 땅이라면 마땅히 개척하여 백성들을 살찌울 생각을 하는 것이 위정자의 마땅한 도리 아닌가! 그런데 성군이라는 세종대왕마저도 그 비옥한 섬들을 방기해버린다. 그뿐이 아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종 1년(1419)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했다. 그때 대마도주였던 소 사다모리 宗貞盛는 조선의 신하가 되어 충성하겠으니 대마도를 조선의 행정 관할에 넣고 그 대신 통상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대마주 對馬州'라는 행정 명칭을 하사하고 경상도에 속하게 했다. 비록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외교적으로 대마도는 엄연히 '조선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독도의 눈물>


흘러간 역사에 가정(If) 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만약 그때 세종대왕이 제주도에 그랬듯이 대마도에도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였다면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이제 와서 세종대왕을 원망하고 폄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자는 이야기다.




내가 울릉도에 두 번 여행 와서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바로 고종 황제를 만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정말로 놀라웠다. 고종은 내가 알고 있었던 그런 무능한 임금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역사를 좋아했지만 우리의 근현대사가 너무나 속상해서 19세기말부터의 역사에는 늘 눈을 감고 도피해 버렸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렇게 도피하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친일파들을, 독재세력을, 반민족세력을 도와주는 것 아닌가 싶었다. 아프고 괴롭더라도 역사를 직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풍감에서 해안산책로를 따라 태하 마을로 내려가다 보면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 빙글빙글 돌아서 내려가는 재미있는 모습의 다리가 나타난다. 그 다리의 벽면마다 고종 황제가 조선 왕조가 450년 동안 시행해 오던 쇄환 정책을 폐지하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1882년, 고종은 왜놈들이 울릉도에 자주 출몰하여 나무를 베어간다는 장계를 받고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한 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인지 살펴보라고 명령한다. 이규원은 선박 3척에 102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울릉도에 와서 11일 간 꼼꼼하게 살펴본 후, 충분히 살 수 있노라고 장계를 올린다. 보고를 받은 고종은 1883년 울릉도 개척령을 내리고 본토 주민(주로 강원도 사람)들을 울릉도로 이주시킨다. 조선이 쇄환정책을 폐기하고 해양으로 눈을 돌린 역사적 사건이다.

1884년 울릉도로 이주한 본토 백성들은 2천 명이 넘었다. 그다음 해는 다시 삼천 명, 사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450년 동안 텅 비어있었던 울릉도를 새롭게 개척하자는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국운을 동해의 생명력을 통해 부흥시키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수탈이 계속되자 1900년 10월 25일 고종은 칙령 제41조를 반포한다. 울릉도를 강원도 소속의 행정구역인 울도군으로 승격시켰다.(오늘날 10월 25일은 독도 기념일이다.)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를 관할하도록 하라는 칙령이었다.


세종대왕을 포함한 모든 조선 왕조의 임금들이 한결 같이 버렸던 땅 아니었던가! 만약 고종의 그 조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도는커녕 십중팔구 울릉도마저 일본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아래의 구글 지도를 보시라. 울릉도와 독도가 저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상상을 해보시라. 저 창망한 동해의 주인이 왜인이라고 상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치지 않으신가.


고종 임금은 대한제국의 '황제'다. 생각해 보시라. 아무리 나라가 어렵기로소니 중화 사대주의를 벗어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황제만이 '만세' 소리로 칭송 받을 자격이 있다. 과거 조선의 국왕들은 모두 '천세' 소리로 칭송받았다. 고종은 만세 소리를 듣는 자주 국가의 황제 임을 선포하였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민족 정기를 세운 일이었다. 훗날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겪고 3.1. 독립운동을 벌였을 때, "대한독립만세!" 그 외침 소리 대신 "조선독립천세!"라고 외쳤다면? 생각만해도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세운 후 1905년 을사늑약의 수모를 겪기 전까지 고종 황제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 돌이켜보시라.


광개토대왕 이래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시대였고, 동아시아 최초로 에디슨 회사와 다이렉트로 계약하여 전기를 들여오고 철도를 들여왔다. 3천 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해군사관학교가 만들어졌다. 2만 명 이상의 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와 애국가와 태극기가 만들어졌으니,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와 자부심, 민족 호연정기의 기틀을 다졌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유튜브를 보면 많은 역사 전공 학자들이 고종을 비판한다. 나라를 위해서 나름대로 애쓴 것은 인정하지만 우유부단해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 아닐까? 사방에 온통 시커먼 야욕을 가진 제국주의자들이 호시탐탐 침탈을 엿보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과연 무엇이 정답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백년도 훨씬 지난 지금 살펴봐도 답이 안 나오더라.


백번을 양보해서 설령 고종 임금에게 이런저런 아쉬운 점이 있다 하더라도, 저 위의 구글 지도를 보시라. 저 창망한 동해바다를 왜인들에게 송두리째 빼앗기는 참담한 비극을 막아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위대한 업적을 길이길이 칭송해 마땅하지 않겠는가. 세종대왕도 대마도를 일본에게 넘기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는데, 꼭 A+ 임금이어야만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남양 일몰전망대에서 20년에 걸친 두 번의 울릉도 여행을 곰곰 돌이켜본다. 서쪽 수평선 너머 한반도를 향해 해님이 달려가고 있다.

여행은 거시적인 안목을 배양하는 최고의 공부 방법이다. 공부란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배움사색을 통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고, 여행 통해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야한다. 공부란 이 과정의 반복이다.


나는 울릉도에서 대자연과 만났다. 겨레의 호연정기를 느끼고 익혔으며 나라 사랑 국토 사랑에 마음의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편견에서 벗어나 지증왕과 고종황제의 개척 정신과 생명력을 새롭게 느끼고 배웠다.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나는 울릉도를 통해 배우고 느낀 것을 어떻게 증명해내야 하는 것인가. 어떤 공부와 어떤 삶을 새롭게 시작해 나가야 할 것인가. 어떤 지혜를 어떻게 발휘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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