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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Apr 07. 2024

제15장.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제2부] 울릉도에서 만난 시인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가 아스라히 보인다. 그 오른쪽 수평선에서 우리 국토를 밝히는 장쾌한 해가 뜨고 있다. 향토사진가 이효웅 님이  2011년 9월 6일에 울릉도에서 157km 떨어진 삼척에서 촬영. 삼척 수로부인 헌화공원 경내의 울릉도 전망대 전시 작품.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滄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자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 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이 시를 만난 것은 두 번에 걸친 울릉도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후였습니다. 《울릉도, 방랑의 추억매거진을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다 발견하고 처음 읽어본 거죠. 아,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요!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던지요... 저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한없이 나무라고 싶습니다.


처음 이 시를 대했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도를 보며 제가 늘 떠올렸던 울릉도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와 감정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짙푸른 망망대해, 동해의 끝없는 수평선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울릉도를 늘 그리워했거든요. 성인봉 정상 위에 올라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창망한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무슨 느낌일까, 늘 상상했었죠.


시인도 저처럼 울릉도를 그리워하는군요. 하지만 저와는 다르게 시인은 먼 옛날 백두산 화산 줄기가 폭발하며 울릉도가 탄생할 때의 그 신비스럽고 장엄한 광경부터 상상합니다. 역시 시인과 범인凡人의 상상력은 차원이 다르네요. 시인은 점점 감정 이입이 되어 국토 사랑, 나라 사랑의 간절한 마음을 격하게 토로합니다. 이 땅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국토의 막내, 울릉도와 하나의 몸이 되어 갑니다.




누가 쓴 시일까요?


제일 먼저 이육사가 떠오르더군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광야>가 생각납니다.

아니면,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심훈? <님의 침묵>의 한용운? <논개>의 변영로?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네, 저에게는 참으로 놀랍게도... 청마 유치환(1908~1967)이었습니다. 아하! 그러고보니 그제야 생각이 나더군요. 1948년 9월에 발표한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바로 《울릉도》였죠? 그런데도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유치환이 이런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시를 다 쓰다니? 청마는 개인의 서정과 센티멘탈리즘에 몰두했던 애정 시인 아니었나요?


소년 시절의 소오생은 유치환의 그 센티멘탈리즘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시인들 중에 가장 사랑했던 시인 같습니다. 제 마음 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었거든요. 그가 없었다면 암울했던 사춘기 시절, 그 답답함을 어찌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요. 고등학교 시절, 장위동 산꼭대기 집... 그 옆 채석장 절벽 끝에 걸터앉아 밤을 새며 그의 시를 암송하던 기억이 나는군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 2>

유치환 작시, 김성희 작곡 <그리움>. 노래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저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한 시는 <행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유부남 청마는 미망인이었던 시조 시인 정운丁芸 이영도(1916~1976)에게 5,000통 손편지를 썼다죠? 그 바람에 저도 청마를 흉내 내어 최소한 500통은 써보았을 겁니다. 나이 들어서는 그 마음 헤아려보고파 통영 중앙우체국도 찾아가보았죠. 그 옛날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면서, 작년에는 아예 통영에서 한달살이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청마가 은근히 미웠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늘 나약한 감상感傷에 빠져 지낸 것이 꼭 그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거든요. 아니, 청마를 미워한 게 아니라 그를 닮아갔던 제가 미웠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목마는 하늘에 있고 술병은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에서 강경 작가님과 이런 대화를 주고 받은 적도 있었죠.



<강경> 서간문 수필의 예로 유치환의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일부를 읽었습니다. 저는 유교걸이라서 그런지 유치환이 아내를 두고도 이영도에게 절절하게 사랑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백석도 사랑 없는 결혼으로 아내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사랑 없는 결혼. 그 시대여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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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생> 통영은 예술과 문화의 고향. 그러나 박경리도 쫓아내고 윤이상도 발 못 붙인 심각한 수준의 유교 마을이지요. 이영도 시인이 연인의 편지 모아 발간하자 난리가 났다나요? 근데 오직 플라토닉 러브였다 밝혀지니 갑분 뜨거워져 찬양 분위기로 바뀌었다나요? 유치환 아내 분은 더 기분 더럽지 않았을까요? 사랑 없는 결혼? 혹시 식민지 겉멋 들린 짜가 문학 탓은 아닐까요? 그렇게 유치환을 변명해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청마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죠. 교과서에는 유치환을 생명파 시인이라고 합니다. 남성적이고 강인한 어조의 시어를 구사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를 나약한 바람둥이 감상주의자로만 알고 있었을까요? <울릉도>에서 표출된 나라와 겨레, 국토 사랑의 마음은 또 무엇일까요? 대체 그 사랑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원래 2주 전에 '발행'했어야 했습니다. 물론 예기치 못한 일들이 계속 발생해서였기도 하지만, 글의 '발행'을 질질 끌었던 더 큰 이유는, 아마도 울릉도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청마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너무나 고민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마는 진득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학력을 살펴보면 꾸준히 한 학교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개인적으로 한문 교육을 받다가, 11살 때부터 4년 동안 통영보통학교에서 공부한 게 가장 꾸준한(?) 기간이었죠. 그후로는 3년 동안 일본 유학을 갔다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서 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6개월 다니다가 중퇴하고, 다시 일본에 가서 이번엔 사진 공부를 합니다. 그것도 겨우 1년, 22살에 귀국하며 그의 모든 학력을 마감합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24살 때 난데없이 평양에 가서 1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다가(사진관을 경영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26살에는 부산 화신백화점에서 1년 근무. 29살부터 2년 남짓 통영에서 교사. 33살 때는 만주에 가서 3~4개월 동안 정미소를 경영. 그리고 금방 다시 통영에 돌아와서 백수로 지내다가, 38살 때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합니다. 그후로는 부산, 함양, 통영, 경주, 대구 등지에서 1~2년 씩 주로 여자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여기저기 전전. 그러다가 1967년 2월 1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향년 60세.


하지만 이런 종류의 '끈기 부족(?)'이야 무슨 문제겠습니까? 그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여성 편력 때문이었죠. 흔히 우리는 청마가 손편지를 쓴 대상이 이영도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데요, 사실은 소꿉친구였던 아내 권재순 여인이 첫 번째 손편지의 대상이었습니다. 청마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게 아니라, 일본에서의 유학도 포기하고 돌아와 22살(1929년) 나이에 결혼을 서둘렀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는 이야기. 그의 문학 재능은 아내 권재순과의 연애편지를 통해 갈고 닦여져 빛을 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청마는 신혼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4년 후, 그러니까 27살(1934년) 때 부산 화신백화점에서 근무할 때 이란李蘭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장남 유일향을 낳게 되죠.(1935년)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만은,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1>. 1935년, 12월.《시원》 5호


시기적으로 보아 이 시는 이란을 찾는 그리움을 노래한 것 같군요. 그녀가 핏덩어리 아이를 넘겨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걸까요?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무렵의 기록은 그가 30세 때(1937년) 통영에서 또 다른 어느 여성과의 밝혀지지 않은 스캔들이 있었고, 33세(1940년) 때는 뜬금없이 만주로 가서 서너 달 지내는 동안에 아들 유일향이 그곳에서 병사했다는 이야기만 남기고 있을 뿐입니다. 바람을 피운 것으로도 모자라, 외도에서 얻은 아들까지 잃었군요... ㅠㅜ


그렇다고 아내인 권재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진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늑막염으로 몸져 누운 아내를 간호하면서 시인은 지극한 심정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노래합니다.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중략) ......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의 푸른 나무러니...... (중략) ......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짐승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병처 病妻>, 《신동아》1936.5.


아내 권재순은 만주에서 통영으로 돌아온 후 '통영문화유치원'을 운영하며 가계를 책임집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가는 동안 청마는 가정의 경제를 거의 돌보지 않았던 아주 무책임한 룸펜이었던 거죠. 나는 내가 청마인 양, 혹은 그 청마가 내가 될까봐 그가 좋으면서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1946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10월에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지 겨우 반 년이나 되었을까요? 오래간만에 백수 신세를 면하고 아내에게 월급을 건네줄 수 있는 가장이 되었나 보다 싶었더니, 거기서 덜컥 같은 학교 선생으로 부임해온 이영도 시조 시인을 만난 겁니다. 39세의 유부남과 31세의 미망인...

20대 시절의 청마와 이영도.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의 외모 어디에도 플레이보이 기질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첫 눈에 그녀에게 반한 청마는 그후 20년 동안 그녀에게 5,000 통의 편지를 썼다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청마와 같은 뇌섹남이 마음을 다하여 오천 번을 찍어대니 아니 넘어갈 여인이 어디 있을까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유교걸 이영도 역시 점차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생각을 멀리 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이영도, <그리움>

      

그런데 이영도는 하필이면 아내 권재순의 친구 동생이었다네요. 찾아간 권재순에게 이영도는 말했답니다. 그저 플라토닉한 관계의 문학 동지일 뿐이니 안심하시라고 했다는군요. 그런데요, 만약 두 사람이 육체관계를 맺었다면 청마가 과연 5,000 통이나 편지를 보냈을까요? 저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


재미있는 것은 청마가 51세 때(1958년)부터 문학동호회에서 만난 반희정이라는 또 다른 여성과도 5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사실. 물론 이영도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있었을 때이니 그 무렵엔 이를 테면 양 다리, 아니 세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쩝... 자, 사연이 이러하니 청마의 이 다채로운 여성 편력을, 그 내면 세계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청마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얼마나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이겠습니까?  
- 유치환, 《자작시 해설 - 구름에 그린다》1959.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가 이렇듯 당신을 애모함은 무슨 연유이다?
당신의 용모? 당신의 자질?
- 아니거니! 당신을 통하여 저 영원에의 목마름을 달래려는 한 가상假像으로 - 
그러기에 아득한 별빛을 우러르면 더욱 애닯게도 그리운 당신...
- 유치환 산문, 단장斷章, <목마름>.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에 수록.  

후세의 평론가도 그의 편에 서서 이렇게 변명해줍니다.

청마의 이 같은 여성편력은 세속적인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생의 갈망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오세영,《휴머니즘과 실존 그리고 허무의 의지 - 유치환》, 건국대학교출판부.

브런치의 여성 작가님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위와 같은 '변명'에 동의하십니까? 


아니거니! (^^) 


소오생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변명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청마를 누구보다 좋아하면서도 누구보다 싫어했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울릉도 여행을 통해 청마의 <울릉도>를 만나게 되어 오래오래 생각하고 깊이깊이 고민해본 결과,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청마를 위해 변명해보고 싶습니다. 




서구의 사유방식은 이원론, 분리의 패러다임입니다. 그들은 사랑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니 에로스의 사랑, 동성 간의 우정인 필리아Philia, 부모 자식 간의 스토르지Storge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사랑이란 것이 과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먼저 개념 정의를 내리고 잣대로 정확하게 분류할 있는 성격의 연역적 명제일까요?


그에 비해 일원론 패러다임에 기반한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사랑은 '하나'입니다. 나라 사랑, 겨레 사랑, 인간 사랑, 자연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등등... 삼라만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결국 '하나'로 인식합니다. 동아시아의 '사랑'이란 단어는 그 어느 고정된 대상자에게 국한된, 그리고 변화무쌍하기 마련인 '뜨거운 감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사람들은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사랑의 대상자'를 찾기에만 급급해 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기술'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 세계에 언제나 지녀야 할 그 어떤 내면적 가치이지, 상대방이 누군가에 따라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기분 내키면 다시 나타나는 그런 '감정'의 성분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인간이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함'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혜안'이요, '선한 의지'이며또 그것을 맑고 곱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과 ''과 '행동'으로 표현해내는 '실천력'이 아닐까요? 




청마는 바람둥이가 아닙니다. 오천 통의 편지가 증명합니다. 


청마는 마치 연애라는 것을 처음해 본 사춘기의 소년처럼 매일매일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지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작가님들이라면 그게 얼마나 정성을 쏟는 일인지 아실 겁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쓰는 글 아닙니까. 누구나 사랑 앞에서는 간절해지고 작아지는 법. 그런 마음으로 오천 통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 특정한 대상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의 성격을 뛰어넘었을 것입니다. 


그 행위는 필경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삼라만상의 이면에 흐르는 원리를 톺아보는 수양의 행위나 마찬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청마의 1/10에 불과한 수량이지만 소오생도 아주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사랑의 가장 큰 특성은 '영속성永續性'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상대방에게, 특별히 인연이 닿는 이에게는 2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마음을 다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은, 청마의 내면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 사랑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는 것 아닐까요?  


청마는 바람둥이가 아닙니다. 그의 창작 결과물이 증명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모든 중국인들은 그를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라고 비난하지 않고, 위대한 애국 시인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합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이소離騷>라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죠. 굴원은 자신의 내면에 가득 찬 나라 사랑의 마음을 맑고 곱게 정성을 다하여 <이소>라는 작품을 창작하여 후세에 남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극진한 내용의 글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해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이겠지요.


청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에게 창작 결과물이 없었다면 그는 바람둥이 카사노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名詩 명구名句를 수없이 많이 남겼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의 맑고 고운 내면 세계를 증명해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작품을 '관념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관념'이 무슨 말일까요? 사전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청마의 시가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내면세계의 핵심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그의 첫 시집 《청마시초》의 첫 작품 <박쥐>를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본래本來 기는 즘생

무엇이 싫어서
땅과 낮을 피하야
음습한 폐가廢家의 지붕밑에 숨어
파리한 환상幻想과 괴몽怪夢에 몸을 야위고

날개를 길러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호올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박쥐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요.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포유류. 쥐도 새도 아닙니다. 이를 테면 땅의 존재이면서 천상의 세계를 지향한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야윈 박쥐가 되어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날개를 기르겠노라 다짐합니다. 때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시대이니, 지식인으로서의 좌절과 절망, 그러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워 끝까지 저항하겠노라는 시인의 마음이 읽혀지는군요. 그 마음 자체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 아닐까요?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생명의 서 1장>을 읽어봅니다. <박쥐>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1938년 10월 19일. 동아일보에 발표      

나는 누구인가? 참선하는 스님들의 영원한 화두이지요. 삶의 애증 속에서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끼던 청마도 '참 나'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유한한 자신의 지식 만으로는 뼈저린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작열하는 하얀 해와 뜨거운 모래만이 존재하는 사막과 같은, 극한 환경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운명처럼 '참 나'의 존재와 대면하고자 합니다. 역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입니다. 


청마는 '참 나'의 존재를 찾았을까요? 훗날의 얘기입니다만, 그가 1955년 경주고교 교장으로 근무했을 때 학생들을 위해 만들었던 교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큰 나의 밝힘>
일. 나란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
일. 나란 나만으로써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일. 나란 나만에 속한 내가 아니다.

요컨대 '나'는 모든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너'의 인식이라는 이야기.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나 아닌 삼라만상 모든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뜻 아닐까요? 저는 그 '관계'를 '사랑'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시집 《울릉도》에 수록된 <바위>입니다. 해방 이후, 이영도를 만날 무렵의 작품이군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精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시인은 망각의 신이 되고픈 모양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심無心과 무정無情을 노래한 이백의 <경정산에 홀로 앉아>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군요. 이 역시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지요. 


뭇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혼자서 한가히 거닌다.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싫증 내지 않으니,

오로지 경정산이 있을 뿐.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자, 이제 다시 한번 <울릉도>를 읽어볼까요?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滄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자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 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이 역시 사랑이 주제입니다. 해방이 되자 이제 시인의 정체성이 명쾌하게, 거칠 것 없이 드러납니다.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극도로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자 시인은 나라 사랑의 마음을 여과 없이 토로합니다. 대체 무엇이 관념적이란 말인가요? 혹자는 청마가 울릉도를 가보지도 않고 지도만 보면서 지은 작품이라 관념적이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관념적인 거 아닌가요? 

 

청마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4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자원하여 문인구국대를 조직, 육군 제 3사단에 종군합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종군 시인이 되었을까요? 1951년에 발표한 《보병과 더불어》를 읽어봐야겠습니다만 저는 그 역시 나라 사랑 인간 사랑 생명 사랑의 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흔히 세간에서는 청록파니, 순수파니, 참여파니 구분을 합니다. 그리고 청마 유치환은 생명파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남성적 강인한 의지가 엿보인다는 둥,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그리움과 슬픔 등의 여성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둥,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카사노바적인 바람둥이 성향이 있었다는 둥 수근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자신부터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하나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청마는 그저 극진하게 사랑을 하고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의 오천 통의 편지가,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수많은 아름다운 시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라 사랑, 국토 사랑, 인간 사랑, 남녀 간의 사랑... 그 모든 사랑은 필경 하나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하죠? 저는 울릉도 여행을 통해 새롭게 청마를 만나고 새롭게 사랑을 만났습니다.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만났습니다. 차제에 모든 이분법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시각을 버리고 세상을 보다 폭넓게, 거시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둠 속에 도동 약수공원이 보인다. 저곳에 <울릉도> 시비가 있단다. 시간이 늦어 공원을 살펴보지 못했다. 


청마 유치환의 <울릉도> 시비는 독도 전망대로 향하는 케이블카 탑승대가 위치한 도동의 약수공원에 있다고 합니다. 그곳을 지나갔으면서도 저는 미처 몰랐네요. 이제 청마의 <울릉도>를 알게 되었으니 새로운 사랑의 안목으로 다시 한번 울릉도에 가봐야겠습니다. 


1960년대의 도동 마을. 청마는 1961년~1962년 경주 여자 중고등학교 교장 재직시절 울릉도를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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