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오생 Dec 24. 2023

제3장. 눈 이야기

[제1부] 2003. 1. 10.

나그네 여러분,

우리나라 최고 적설량 기록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나요?

1930년대에 울릉도에 내린 6m가 최고 기록이래요. 60cm가 아니라 6m예요, 6m!      


아니,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살죠?

집집마다 새끼줄을 연결해서 눈이 내리면 그걸 줄넘기하듯 빙빙 돌려서 굴을 뚫고 다녔대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아닌가? ^^;;

1980년대 폭설이 내린 도동 사거리. 울릉도역사체험관 자료집에서.

어렸을 때 그 얘기를 들은 저는 언젠가 그런 눈 속에서 며칠 지내봤음 좋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겨울 울릉도는 제가 겪어 보고픈 은밀한 욕망 중의 하나였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눈의 고장, 울릉도에서 눈 이야기나 해 볼까요?



2003년 1월 10일 아침 8시.      


부스스 눈을 떠보니, 이궁~ 벌써 해가 중천(?)에 떴네요?

에혀~ 오늘도 그 신령스러운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었는뎅...

아, 거 봐, 어제 참 잘 보신 거여, 참 잘했서.

어르신 목소리에 후다닥 밖으로 나가보니 날은 쓸 만 한데, 해안선엔 잔뜩 구름이 끼어있구먼요?

하하 근데 왜 웃음이 나오는 걸까용? (난 봤다, 이거지... ㅋㅋ)      


오널은 푹 쉬어! 젊은이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다님 큰일 나!

(흑흑... 어르신, 젊은이도 아닌 사람이라뇽? 무슨 말씀을 그렇게...)

오널은 봉래 폭포랑 내수전 상봉이나 다녀와!

(아니, 그럼 어제보다 더 많이 다니라는 말씀 아냐? ㅋㅋ)

상봉이 성인봉보다 전망이 더 좋은 데여. 아, 그람 거게가 좋고 말고...

(넵! 충, 성!)


그리하여 그 즉시 상봉으로 길을 나서려는데, 엥?

오늘 오후에 육지로 돌아간다는 옆 방 30대 커플이 지금 내수전 상봉에 올라간다네요?

애고, 그럼 난 오후에 가야겠다...

괜히 같이 가서 무드 깨고 싶지는 않아용? 제가 이래 봬도 한 눈치 한답니다. 하하.


핑계 김에 오전엔 푹~ 쉬어야지?

사실은 잠자고픈 유혹에 빠져서... 크크크

코~~~ 애고, 울릉도의 잠은 왜 이리 달꼬? ^^

    


오후 1시 50분.     


애고고~~ 너무 늑장을 부렸나 봐요.

12시쯤 일어나서 잠시 장을 보았더니 이제야 출발하네요.

얼른 짐을 꾸리고 내수전으로 출발!         

약수터까지는 이미 가 본 길!

친숙해진 해안길을 20분쯤 걷다가 삼거리에서 왼쪽 산길로 접어들었답니다.

뭐 산길이래 봤자 포장된 길이니까 아주 가뿐하네요. 하하.

잠시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바다 건너 죽도가 보이네요. 저긴 또 언제 가보나.

내수전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죽도. 울릉도 순환도로가 여기서 끝나고 있다.(2003년)

상봉 능선까지는 포장이 잘 된 외로운 산길.

약수터까지는 차가 많이 다닌 흔적.

약수터부터는 어느 한가한 자동차의 두 줄기 타이어 자국만이...

쭉- 쭉- 시원스럽게 뻗은 키 큰 소나무들이 연도에서 반겨주는 적막한 산길.  

애공~~ 여기서부턴 안 되겠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지...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니 미끄럽지 않아 좋기는 한데, 애구구 발이 넘 무거워용~~ ^^;;

하지만 홍길동도 발에 무거운 걸 차고 도술을 수련했다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무협소설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주인공치곤 쫌 늙긴 했지만) 전진, 또 전진!   

우측이 내수전 전망대가 있는 상봉

오후 3시 10분


가뿐하게 능선 도착. (생각보담 훨 쉽네? 하하)

[도로 끝] 표지판이 서 있는 여기서 상봉은 '겨우' 15분 거리.

능선에서 바라본 상봉. 중턱 나무 사이로 산장(?)이 보인다. 2003. 1.10.

여기 이 능선과 비슷한 높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저기 저 상봉을 올라서서

오늘은 또 어떤 세리머니를 펼칠까요?      

허튼 생각을 하며 포장도로를 벗어나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드니,

허쭈? 눈에 발목까지 푹-- 빠져드네?

히야, 그래 이거야. 이래야 눈길을 걷는 재미가 나지.


이번엔 무협소설에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눈길 밟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5분 정도 걸으니 예쁘장한 산장에 도착!


보이소! 아무도 안 계싱교?

한 바퀴 둘러보니, 어라? 문이 굳게 잠겨있네? (나중에 알고 보니 겨울엔 사람이 안 산다고...)


아무튼 여기서 정상은 그야말로 지척 간!

사람 발자국은 조~기 언덕 등성이까지만 나 있네요?      


어휴, 눈에 푹푹 빠져서 도저히 못 올라가겠더라구요!

오전에 다녀온 커플이 들려준 경험담(?) 생각이 남.      


아니, 요기서 바로 조긴데 그걸 못 올라갔어?

은근히 비웃으며 발을 옮기는데, 에그머니낫! 무릎까지 쑤~욱 빠지네?

몇 발자국 더 옮기니, 으악! 이번엔 허벅다리까지?

간신 간신히 눈 속에서 발을 빼는데, 어쭈? 이거 장난이 아니네?      


음, 이건 제 코스가 아닌 것 같군.

평소에도 와 본 길이라믄 문제가 아닌데 말이야, 말이야...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결국 능선 길은 포기!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측면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공략!

이번에는 측면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공략!

탁 트인 경사진 길을 골라 올라가 보는데, 에공, 장난이 아닌 건 여기도 마찬가지군여...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눈밭을 일이백 미터쯤 돌아가다 보니,

아니야, 아니야... 이 코스도 승산이 없는 걸? 결국 다시 포기하고 산장으로 귀환...ㅠㅠ

  

돌아와 보니... 에효~~ 그러게 함부로 남 비웃을 일이 아니여...

그나저나 왜 이렇게 날이 금방 어두워진다냐?


성인봉 저쪽에서 몰려오는 먹구름... 어라? 게다가 눈발까지 휘날리네?      

하지만 천하의 드래곤이 예까지 와서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우선 시간을 확인하고... 음, 오후 4시군. 그럼 아직 일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 한번 도전하는 거야! 삼 세 번! 치열하게 올라가는 거야!


배낭은 이곳에 내려놓고... (유품? ㅠㅠ) 이번엔 꾀(?)를 부려서 올라가 보자...      

카메라만 메고서 다시 능선 코스로!

체중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두 발로 걷는 건 포기! (그러게 다요트를 했어야 했는데...)

만약의 경우,

눈에 폭 빠져도 기어 나올 수 있도록 듬성듬성 나와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올라가자! (머리 좋죠? ^^;;)

  

그때부텀은 그야말로 악전고투!

나뭇가지가 몇 미터 떨어져 있을 때는 진기를 잔뜩 모았다가, 점프~~~!

샤샤샤샥~~~

경공술(?)을 발휘하여 신속 무쌍하게 기어 올라가 나무 가지 하나 붙잡고! (애고고, 살았다!)


잠시 나뭇가지에 무게를 의지해 서서 숨을 고르는데,      

옴마야, 푸~~~~~~~욱! 애고고, 이번엔 허리까지 빠지넴~~~

죽을힘을 다해 눈 위로 올라왔더니, 쑤~~~~~~~욱, 또다시 허리까지... (ㅠㅠ)      


아, 힘 빠져. 잠시 동작 그만...


아, 눈이란 게 참 따스하구나... 발만 안 시리면 더 따스할 텐데..

발목으로 눈이 들어가니 완전 방수 등산화도 소용없군용... ㅜㅜ


그래, 맞아! 열량을 보충해야 해!

왼쪽 주머니에서 위스키, 오른쪽 주머니에는... 뭐가 있었더라?

앗, 호박엿! 호박엿이 있었군요!

호박공장 공장장 아저씨, 흑, 고맙습니다... 눈물이 다 나오네요...

     

위스키 한 잔, 아니 서 너 잔 마시니, 다시 온몸이 후끈후끈...

호박엿 하나, 아니 서 너 개, 입에 집어넣으니, 다시 입안이 달착지근...


돌발 퀴즈!

그래서 결국 올라갔게요, 못 올라갔게요?  

답이야 뻔하지 않겠음메? 못 올라갔으면 쪽 팔려서 내가 이런 글을 우찌 쓰겠음메? ^^;;



오후 4시 40분!      


아아,

함박눈을 맞으며 정상에 우뚝 섰을 때 (앉고 싶었지만, 앉을 데가 없네요... ㅠㅠ)

그때의 그 벅찬 희열이여! 그 벅찬 감격이여!

회색의 어둠에 싸인 망망한 동해바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림 같은 저동 마을이

수직의 절벽 저편 아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펼쳐져 있군요!!!      

참으로 아름다운 대한민국, 참으로 보배 같은 금수강산!!!

이야~~~~ 호~~~~

흩날리는 눈발 속에 통쾌하게 고함을 치다!

맑은 날, 상봉 내수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저동 마을. 2022. 10. 25.

 

(좌) 성인봉 (우) 울릉도 일주 유람선에서 바라본 상봉. 2022. 10.20.

오후 6시 10분!


천근만근 물에 젖은 솜덩어리가 되어 귀가하니, 뛰어 나오시는 할아버지!

아이구, 내가 을매나 걱정을 했는지 알어?

핸드폰은 안 되지, 눈은 펑펑 쏟아지지, 올 시간은 지났지, 내가 내수전 입구까지 가 봤대니까, 글씨?

한 시간만 더 있었으믄 신고하려고 했어!


왈칵,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운 울릉도 인정...

나그네 여러분,

산다는 건 역시 행복한 일이지요? ^^    

  


오후 7시 10분


오늘 저녁도 빨간 고기 생선회 파티! (낮에 미리 장만해 놨죠. 히히)

살아서 귀환한(아이고 챙피) 내가 자랑스러우신지,


그래, 잘했어. 잘 한기여! 아이, 그래 을매나 장해?

연방 그 귀한 복분자 술을 계속해서 따라주시는 어르신...      

아니, 이제 이건 그만 주셔요. 어르신 아끼면서 드시는 보약이라면서요...

슨상님하고 맴이 맞으니께 주는 거지, 딴 사람 같으믄 어림두 읍서! 끽해 봐야 한 잔이지...      



오후 10시


푸~~욱 자고 일어나니 밤 열 시.

아이고, 온몸이 쑤시네요. 그래도 여러분한테 보고는 해야겠죠?

천근만근의 몸을 일으켜 피씨방으로 오는데...

오늘밤은 별이 하나도 없구먼요?     



[참고] 1930년대 울릉도의 눈과 나리 분지 주민들의 삶


2022년 가을에 울릉도를 다시 가보니, 도동에 '울릉도 역사문화체험센터'라는 곳이 생겨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사카모토 나이지로라는 일본인이 살던 주택이었다가, 해방 후에 이영택이라는 분이 소유주가 되어 포항여관을 운영했고, 다시 이영관이라는 분이 주택으로 살았던 일본식 가옥이다. 목포나 군산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적산가옥인데, 2008년 문화재청에서 구입하여 2011년 '역사문화체험센터'로 운영하기 시작했단다.

2003년에 왔을 때는 없던 곳이고, 도동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많이 피곤하고 지쳤는지라 얼른 들어가 보았다. 입장료가 있지만 입구에서 커피/차를 구입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냉난방 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1층의 넓은 마루나 2층의 다다미방에서 아주 편히 쉴 수 있다.

그런데 2층 역사자료실에서 아래 사진과 같은 글귀를 보았다.

잔혹한 울릉도의 겨울. 1933년 말부터 폭설이 쏟아져 눈이 4m나 쌓이고 사람이 죽었다고? 근데 6m가 아니라 4m라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궁금해졌다. 울릉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아일보 1934년 12월 11일 자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폭설은 1934년 정월에 쏟아졌던 것 같다. 그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동아일보 송기찬 기자는, 그 후 대 기근으로 주민들이 참혹한 상황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겨울 울릉도에 파견된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돌아와 1934년 12월 10일부터 12일까지 3회에 걸쳐, 리포트 형식으로 현지 상황을 보도한다.


기사를 읽는 내내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울릉도 주민들과 함께 폭설 속에서 지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니... 그분들께 너무나 죄송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검색을 하다 보니, 12월 15일 자에 눈에 띄는 기사가 보였다. 당시 울릉도 인구는 12,000명이었다는데 기근을 면하려면 주민 5,000명을 육지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그 기사의 바로 옆에 송기찬 기자의 또 다른 리포트 기사가 실려 있었다. 1934년 12월 5일에 울릉도 주민 450명을 원산으로 이주시키는 배에 탑승하여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내용이었다.


울릉도에 이런 한 맺힌 사연이 있었다니! 나는 도대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 한심했다. 죄송한 마음에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기사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해보고 싶었다. 그 당시 울릉도에 쏟아진 눈과 함께, 너무나 힘들게 살아갔던 주민들의 고된 삶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때문이다.


기사는 철자법과 띄어쓰기, 말투 등에 있어서 다분히 고어체古語體여서 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익숙하지 않은 면이 있어서 현대식으로 고쳐 썼다. 그러나 최대한 원문을 존중했음을 밝힌다. 분량이 짧지는 않지만 금방 읽으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울릉도에서 돌아와서 (1)

1934. 12. 10  


반세전半世前 성인봉 아래 낙토樂土!

이금而今엔 기근飢饉의 고도孤島  


취학생은 겨우 1/7. 학동 중 80%가 결식

대설大雪의 재난 뒤에 흉작, 흉어의 참혹한 재난

항구에는 오적烏賊(오징어)이 풍성


(좌) 1934년 12월 10일 송기찬 기자의 리포트 기사. (우) 동아일보 제공의 기사 내용.


동해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에 고단하게 쌓여 있는 울릉도는 한창 당년에 살기 좋은 낙토樂土(살기 좋은 땅, 파라다이스)라 하여 모여들던 것도 불과 40년 전후였지만, 흐르는 세월을 따라 땅이 여위고 사람이 불어나고 또한 세고世苦의 변천에 시달리는 그 위에다가 작년과 금년에 대자연의 재난까지 포개어 놓였다.


길길이 쌓이는 눈은 6,7척(약 2m) 내지 15척(약 4.5m)이라는 엄청난 적설이 이 섬을 덮어 생령을 빼앗고 곡물을 얼게 한 백설의 참화가 있어 세상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적도 어제와 같은 지난 정월의 일이니, 이제 그러한 대재난을 겪고 일 년이 못된 오늘에 또다시 굶주림에 허덕인다는 이 섬사람의 정경이라니, 얼마나 불행하고 가엾은 일인가!


굶주림! 먹어야 사는 사람이 못 먹게 되었다는 이 말은 과연 인생으로의 가장 크게 비참한 일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금년 같은 큰 수해를 입은 곳이 어디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이없는 이재민이 없으랴마는, 그래도 그들은 기분만이라도 걱정해 볼 이웃이 있고, 몸부림쳐볼 길이나 자유스럽다 하려니와, 쳐다보면 천봉만학千峯萬壑(수많은 산봉우리)이 가로지르고, 내려다보면 망망한 창해滄海가 아득할 따름인 이곳 궁민窮民의 궁상窮狀은 더한층 고달프지 않을 것인가!


청조새의 그것처럼, 7일이나 10일 만에 한 번씩 세상과의 내왕을 틔워주는 태동환太東丸을 타고 모진 풍랑에 몇 번이나 부대껴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이 섬을 찾게 되는 기자는 지난번의 설화에 눈물의 대면을 하였거니와, 이번에 다시 굶주림의 참상을 또한 어찌하랴 생각하매, 참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 도착을 고하는 기적 소리조차 이 섬의 비명을 표함인가 하였다.


낯익은 도동항. 여기는 상륙하니, 나는 굶주림의 세상은 모른다는 듯이 오징어잡이에 흥이 겨워 있다. 발동선은 연기를 뿜어내며 보통 어선은 어구를 챙기기에 분망 하다. 잡이 하러 나가려는 진용의 정비는 정히 활기가 넘치는 바 있다.


더욱 거리를 들어서니 눈 가는 곳마다 말리는 오징어의 횃대가 질펀하다. 묻지 않아도 오징어의 풍어로 풍성풍성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 사이로 걸어오던 생도 한 명이 낯선 기자에게 공손히 예를 한다. 누구인지 알고 경례를 하는 것인지. 하여간 선생이 힘들게 가르친 보람의 표현이겠다.


굶주림과 항구의 풍성.

너무나 엄청난 차이에, 생각이 헷갈린 기자는 경례하는 생도를 붙잡고 고이 물어보았다.


[기자] 어느 학교에 다니니?

[학생] 도동공립보통학교요.  

[기자] 너희 학교에는 점심 안 싸가지고 다니는 생도가 없니?


이 말에는 대답이 없이 고개를 돌린다. 그에게 또 무엇을 물으랴. 고개를 돌린 어린이는 말없이 걸어가고 만다. 나부터 안 싸가지고 온 부끄럼과 설움이 있다는 동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약 2천 명의 학령 아동이 있다는 이 섬에서, 그의 약 1/7(도동공보 170명, 남양공보 70명, 북면 사립 신명학교 110명)밖에 안 되는 취학 아동이라면, 그래도 이 섬의 정도로는 대개가 중류 가정의 아동들이라 할 것이거늘, 이 방면 당국자의 말을 들으면 점심을 싸가지고 오는 아이가 20%가량 밖에 되지 않으리라 하니, 벌써 기막히는 소리인 것이다.


해발 983m의 성인봉에 잇달리어 산골로만 된 이 섬의 지세이니, 어디 한 군데 평탄한 곳이 없이 고개 넘어 산이고, 산 넘어 또 고개의 여기에 10리 20리 산골의 험한 길을 더듬어 배우러 다니는 어린이. 그들이 점심을 못 싸고 통학을 한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은 눈에 띄는 일이니, 누가 먹고 안 먹는 것을 알아내기 쉬운 일이거니와, 아침을 못 먹었거나 저녁을 굶었다는 것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 섬 안의 월사금 금년도 조정액이 약 1,500원인데 체납금이 약 1,000원에 달한다고 하니, 그들의 궁상을 잘 말하여 주는 바의 하나지만, 여기 월사금 징수하러 간 관리가 징수는커녕 가긍한 정상에 도리어 깊이 동정하여 일금 50전을 주고 왔다는 이 사실이 저간의 소식을 말하고도 남는다.


마누라가 해복解腹(해산)을 하여 강냉이죽 한 그릇을 넉넉하게 끓여 먹이지 못하여 누렇게 부황이 들고 꿈쩍도 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학교에 가는 아이인들 옳은 아침저녁식사가 돌아갈 수 있으랴. 하루에 한 끼도 먹여서 학교에 보내고, 혹은 두 끼도 먹여 공부하러 가는 그 아이의 월사금이 열 달이나 밀렸다는 정경에 도동 징수 관리 유금파가 동정하였다는 것쯤은 이 섬으로서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울릉도에서 돌아와서 (2)

1934. 12. 11


산막과 알봉의 절벽 위에

온돌논도 불모지로


토굴 속의 창백한 안색


(좌) 1934년 12월 11일 송기찬 기자의 리포트 기사. (우) 동아일보 제공의 기사 내용.


바닷가에서는 오래간만에 오적어 풍어로 활기가 넘치는데, 한 걸음 올려 디뎌 산비탈 산골짝에는 가난에 쌓여 울고 있는 무리들. 이 두 개의 사실은 한층 더 고르지 못한 느낌을 새삼스럽게 한다.


남면의 주사골과 서면의 산막골, 북면의 알봉. 이 세 군데는 10~30호의 집단 궁민촌이라 한다. 10리에 하나, 5리에 하나, 이 비탈 저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울릉도의 민가로는 흔치 않은 마을이다.


제철을 만나 빌리기 어려운 발동선 한 채를 얻어 거친 물결에 동댕이를 치며 먼저 주사골을 향하였다. 배에서 올라서는 산골길이다. **를 들어서니 이 섬으로써는 평탄한 논이 보인다. 돌담을 길로 쌓아 올려 20~30평의 면적을 간신히 만들어 놓은 여기서 이르는 바, ‘온돌논溫突畓’이 그것이다.


온돌논이라 하는 것은 흙이 흔하지 않으므로, 돌로 쌓아 올려서는 그 위에 물이 새지 않도록 흙을 바르고 다시 벼포기를 꽂을 약간의 흙을 덮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니 귀한 논임에 틀림없거니와, 이와 같이 어렵게 지어서 거둔 쌀은 그들의 입에서 알지 못하는 물건이 되고 마는 것이라고 한다.


언덕에는 흰 눈이 쌓이고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울릉도의 기후를 말하는 현상 이어니와,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길은 과연 험하다. 이리 돌고 저리 굽어 오르다가 보면 앞길이 안 보인다. 간신히 **와 바위 사이로 더듬어 찾아 ***은 바로 머리 위로 기어올라야 되는 절벽이다.


이리하여 면직원과 구장의 안내로 오르고 또 오르기를 15리(6Km).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곳에 인가가 나타난다. 여기저기 떨어질 듯이 붙어있는 집이 두 골짜기 합하여 열아홉 집이다. 원래는 스물한 집이 살았는데, 지난번 대설의 재난으로 두 집이 굴러 떨어지는 눈바위에 여지없이 쓰러지고, 어른 아이 합하여 여덟 명의 생명까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 열아홉 집 백여 명의 권구眷口(식구)가 명맥을 붙이어 놓았다는 경작지라고 하는 것은, 80도 이상의 경사진 골짜기에 헌 누더기 깁듯, 혹은 방석만 하게 혹은 손바닥 넓이처럼 가로세로 다져 놓은 것이 그것이다.


집이란 집들은 나무 판때기를 이리저리 덮고 그 위에 돌덩이를 눌러둔 것은 여기만 있는 지붕이 아니지만, 울타리나 담이 있을 리 없고 겨울의 추위를 막아 처마 밑으로 둘렀다는 것이 풀로 엮은 뜸장이다.


낯선 양복쟁이가 나타나니, 이집저집에서 아이도 나오고 어른도 나온다. 핏기 하나 없이 검고도 누런 얼굴에 개중에는 부황 증세까지 보이는 것은 못 얻어먹는 탓인 줄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추운 겨울에 그들이 걸치고 있는 옷들은, 잘 입었다는 사람이 바지나 또는 저고리 하나가 솜옷이고 그렇지 않으면 겹옷으로, 어른은 참는 것인지 떠는 모양을 보이지 않으나, 아이들 가운데는 바지말을 추켜잡고 오들오들 오그려 떨면서 무슨 진기한 구경이나 있는 듯이 몰려온다.


구장 되는 이가 앞장서서 이집저집 들여다 보이면서, 사는 모양이 말 못되지요 하며 가리킨다. 이 마을 사람들도 뒤를 따르며 우리 사는 것이 어디 사람 산다고 할 수 있나요. 말을 어찌 다 할 수 있어야지. 하면서 한숨을 내어 쉬면서 탄식하는 말로 뒤를 단다.


함께 따라오는 철 모르는 아이들은 이 사람이 이 말하고 저 사람이 저 말하면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이리 쳐다보고 저리 쳐다본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가.



울릉도에서 돌아와서 (3)

1933. 12. 12.


갈근葛根(칡뿌리)을 가루 만들어 미역초 죽 쑤어 연명

참담한 이 인간애사人間哀史


(좌) 1934년 12월 12일 송기찬 기자의 리포트 기사. (우) 동아일보 제공의 기사 내용.


집 뒤 산등에서 산채 캐는 노인이 있다. 동구마리를 옆에다 놓고 호미로 덤불 속을 헤쳐 한 포기 두 포기 캐내는 것이다. 장정이나 아이들이나 젊은 부인이면 손으로 뽑아도 될 것을, 노인이라 팔 힘이 줄어서 호미를 가지고 파내어야 되는 모양이다.


그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몰려 앉아서, 노인이 캐어낸 산채 뿌리를 베어 흙을 털어버리고 그대로 씹어 먹기에 분주하다. 노인더러 무슨 산채를 그리 캐시냐고 물으매, 노인의 답이 오기 전에 안내하는 구장이 앞질러 “그것은 미역초라는 풀이오.” 한다. 구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를 따르던 동네 사람들이 “그것이 우리들 양식 택이지요.” 하며 뒤를 잇고는, 더욱 그들은 너도 나도 서로 힘없는 어조로 하소연처럼 설명과도 같이 이야기를 한다.


“미역초란 이런 것이오.” 하며 노인이 캐어 놓은 것을 집어 보이는데, 이 겨울 눈 속에도 푸르고 생생한 풀로 흡사 배추가 되지 못한 잎사귀처럼 되었는 바,


갑: 이것이 울릉도에는 어느 산이든지 많습니다.


을: 부지깽이라는 풀이 있는데 그것은 봄에 뜯어다가 말려두죠. 그 말려 둔 부지깽이와 요새 캐는 미역초를 삶아서 죽을 끓여 연명을 한답니다.


병: 그 죽에는 약간의 강냉이 가루와 감자 조각을 빚어 넣지만, 어찌 사람의 요식이라 할 수 있겠소.


정: 흥. 기막힌 일이지. 그래도 그 풀이 없으면 우리 살 길이 더 말 못될 것이지요. 요즘은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나물 캐기가 일이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침만 먹으면 나가서 종일 점심도 못 먹고 캐어 오는 것이오. 오늘은 바람이 좀 차서 나갔다가 금방 돌아오고 말았소.


무: 그럴 밖에 더 있소? 지난해 눈바람에 보리가 안 되었지요. 금년은 바람이 불어 강냉이도 거둘 것이 없었소. 농사가 잘 되어도 봄이 되면 칡뿌리(갈근)를 캐어다가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부지깽이나 ‘맹이‘와 범을 넣어서 끼니를 때우게 되는데, 금년 같은 해야 농사가 그 모양이니 어디 살 수가 있소? 우리가 살아가는 정상을 입으로 다 말할 수가 없소.

 (기자 주: ‘맹이’는 명련초命連草라는 풀인데 이곳 방언으로 맹이라 한다. ‘미역초'니 ‘부지깽이'니 하는 것도 정식 학명은 무엇인지. 여기서만 들을 수 있는 풀이름이다.)


기: 보시오. 저 사람(정해경이라는 이를 가리키며)도 부황 기가 나고, 이 사람(장화유라는 이를 가리키며)도 얼골이 저 모양 아뇨. 어른들은 그래도 어른이라 덜하지만, 아이들 얼골에까지 부색이 도는 일이니, 과연 금창이 메어질 일이지요.


말은 여기에서 그쳤다. 일동은 아무 말이 없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머리가 숙여졌던 기자는 이윽고 그들의 한숨짓는 소리에 머리를 들고 보니 모두들 처연한 빛에 잠겨 있다.


죽느니 못 사느니, 하는 양을 너무도 수없이 보고 듣고 하여 신경이 둔해질 대로 둔해진 기자는, 이곳을 찾을 때 다만 창해滄海 중의 고도孤島라는 느낌 만이 다를 뿐이고, 그밖에는 그저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니 딱한 일이라는, 눈물이 스스로 솟는 감격이 일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들의 주고받는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이 메어지게 하는 바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부황 기까지… 눈물 없이는 못 들을 비참한 소리가 아닌가. 말로 듣는 나물 죽은 어떠한고? 기자는 그들을 향하여 여러분이 자시는 죽을 한 그릇 먹게 하여 줄 수 없느냐 청하매, 그중 장화유라는 이가 나서며 “무슨, 자시기야 하겠소? 구경이나 하시지.”하며 자기 집으로 인도한다.


문턱에 다다르니 주렁주렁 엮어서 달아놓은 미역초가 첫눈에 들어온다. 부지깽이나물을 말려서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도 여기저기 놓여있다. 부잣집에서 볏섬을 쌓아 놓은 대신에, 어느 집이나 이 두 가지 나물의 준비가 있는 것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던 장 씨가 점심으로 (때는 정오 경) 떠 두었던 죽 그릇을 가지고 나와 “자, 이것입니다.” 하며 기자의 눈앞에 내민다. 나물 건더기만 그릇 안이 빽빽한 푸른 죽이다. 죽 그릇을 든 장 씨가 죽 설명을 한다.


이 죽을 숟가락으로 뜨면 한 술에 공식 알맹이가 강냉이 쪼가리가 두 낫 세 낫 얹히고, 감자 쪼가리 빚어 넣은 것은 세 술 만에 한 조각 담길지 말지 하고, 99%가 두 가지 나물이고 맛은 약간 쓰다고 하니, 떠먹어보기까지는 너무도 가슴을 누르는 노릇이다.


지금 몇 알 안 되는 강냉이 알맹이와 감자죽을 넣게 되는 것도, 보통 같으면 하루 먹을 분량을 나흘이나 닷새 동안의 분량으로 나눠 끓여 먹기 때문에 아직도 약간 남아 있다고 하니,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고도 비타민A BC가 어떻다 하여 과일에 과자까지 가미해야 된다는 이 세상에, 대자연의 재해로 곡식을 빼앗기고 제대로 나서 제대로 자라는 자연의 산나물로 기근과 추위를 면하려는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열아홉 집에서 숯을 구어 팔아먹고 사는 집이 세 집. 나머지는 농사로 그중 하루 한두 끼 힘든 일을 하러 나가는 장정에게만 강냉이 감자의 밥을 먹게 되는 집이 두 집 있고, 나머지는 나물죽에서 모진 목숨을 이으려는 이들뿐이라 하며, 숯 구어 파는 집에도 허리가 구부려지도록 팔아보아야, 안 쓰이는 여름철과 눈에 막혀 못 굽는 겨울철을 제하면 결국은 나물 세상이 그들의 안전지대라고 한다.



울릉도에 인구 과잉.

경지 부족으로 기근. 12.15.


해결책은 인구 5천 이민. 경북도에 조사를 의뢰.


(좌) 1934년 12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우) 동아일보 제공의 기사 내용.


울릉도의 기근 참상은 기보旣報(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말이 못된다는 바, 이에 대한 최대 원인은 이 섬에는 인구가 7천밖에 살 수 없는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는 12,000명이나 들어가서 살고 있으므로, 경지 면적이 도저히 12,000명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까닭에 이들을 구제하자면 현재 인구에서 5천 명은 다른 곳으로 이민移民치 아니하면 해결할 길이 없다 한다. 그런데 이들을 당장 구제하자면 우선 27,000원의 예산은 있어야 할 터인데, 이에 대한 아무 예산도 없고, 총독부로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조사도 없는 형편이므로, 경북도 당국으로 이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시급히 하도록 통첩을 발하였는 바, 이것의 회답이 돌아오는 대로 이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할 모양이라 한다.



동해의 창랑滄浪도 무색無色   

1934. 12. 15.


잘 있거라! 손톱으로 개척한 울도鬱島야.

경성환鏡城丸에 고달픈 차가운 꿈을 꾸며

수로水路 천리 울도에서 원산까지 이민선移民船 동승기


(좌) 1934년 12월 15일 송기찬 기자의 리포트 기사. (우) 동아일보 제공의 기사 내용.


뛰~! 뚜~!

요란하게 울리는 기적 소리는 이 땅의 사람을 실어가려는 경성환鏡城丸이 도착을 고하는 기별이니, 때는 4일 오전 다섯 시. 이 섬을 떠나는 최후의 하룻밤을 고달프게 보낸 이주민들은 떠날 준비에 바쁘다.


이리저리 뒤숭숭한 마음에 지친 그들은 아침밥도 먹는 듯 마는 듯. 마누라는 옷 보퉁이를 싸고, 남편은 의농작을 묶으며, 노인은 아이들을 수습하기에 안비막개開(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이다.


가는 사람도 가는 사람이거니와 보내는 사람도 슬프기 그지없어 동리 일대는 아침부터 상갓집 모양으로 어느 집 할 것 없이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이리 갔다 저리 왔다 어수선한 동원이다.


낙토樂土로 찾아왔던 곳. 못 살아 떠나는 심사 비할 데 없는 설움이나, 어느 때 떠나게 될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보내는 사람의 서로 어여삐 여기는 심정에 못 견뎌하는 양들은 이 고도에서 볼 수 있는 눈물겨운 정경인 것이다.


남남끼리 모여들어 이웃 삼고, 마을 만들어 산을 쫓고 바다를 헤치며, 안주지安住地를 만들기에 손톱 발톱이 자지러지도록 자욱 자욱 피땀을 흘려 개척을 하였던 것도, 이제는 그 보람을 찾을 길 없이 한갓 삶의 패잔병 신세로, 일에 설고 낯설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하여 몰려가게 된 것이다.


북으로부터 불어닥치는 삭풍은 에이는 듯 몹시 추운 날씨는 사람을 더욱 차게 한다. 오전 열한 시까지 건견장乾繭場(누에고치 건조장)에 몰려 여좌도사餘座道士의 앞길을 격려하는 송별사가 있은 뒤, 일장의 누별연淚別宴(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는 연회)이 열렸다.


어른에게는 한 잔의 술로, 아이들에게는 한 봉지의 과자로 친절한 대접을 받은 그들은, 선창에 넘치는 관민의 송별을 받으면서 두 척의 종선從船으로 한 패 한 패 본선本船 경성환으로 태워다 나르기 시작하였다.


선창에는 전날부터 아침까지 잡아 온 오징어를 배 따고 씻어내기에 모닥모닥 둘러앉은 어민들의 웃음이 넘치는 작업으로 자리가 좁은 성황이며 부두에는 빈틈없이 몰려 있는 어선들의 출어 준비로 야단인, 이 사이로 보내는 눈물 떠나는 울음의 걸음이 걸어가게 되는 것. 얼마나 빈정거리는 대조라 할 것이냐.


오후 4시까지 450명의 이주자는 경성환 선상의 승객이 되었다. (이미 보도한 429명보다 당일에 이르러 초과되었다.) 화물 싣는 데까지 치우고 그 위에 자리를 펴서 층계層階(계단) 구석구석에 옹기종기 실리며 원산까지 수로水路 천리를 이 배 안에서 구르게 된 것이다.


부두에서나 배 안에서는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곡성이 끊이지 않는다. 동해의 창랑도 이에는 무색한 듯, 흰 거품을 뿜어내는 물건은 톱니 서듯 주름을 잡는다. 그렁저렁 밤이 되어 저녁밥을 나눈다. 못 먹어보던 쌀밥에 단 맛을 느끼련만, 준비로 몸이 피곤하고 떠나는 슬픔에 마음이 지친 그들은 먹을 줄을 잊고 있으며, 철 모르는 아이들이 엄마 바빠해도 잡이 하러 나가는 어선을 보다가 손들며 잘 가거라 하는 말에 다시금 목이 메인다.


배는 이들을 실은 채 여기서 하룻밤을 지낸 뒤 예정보다 거의 일주일이나 늦게 이튿날 새벽 다섯 시에 닻을 거두어 일로 원산으로 원산으로 향한다.


아직도 이들의 앞길이 험난함을 예고하는 듯 물결은 거치어 배는 조리처럼 심한 동요를 한다. 대부분이 처음 타보는 기선에 취하여 여기저기서 못 견디어 곤두박질을 친다.


5일 오후 6시. 강원도 삼척군 임원항에 특히 동승한 기자 일행을 위하여 기항했을 때는, 여기서 좀 쉬게 해 달라는 일동의 비명으로 해상의 둘째 밤을 임원 바다에서 지내리라 한다. 아직도 그들은 하룻밤 하루 낮을 지내야 육지 구경을 할 것이고, 그리고도 기차로 얼마를 더 가야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부디 다행하여지이다.




[ 표지 사진 ]

◎ 태하령에서 태하로 내려가는 길에 쌓인 눈. 다른 곳보다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쌓인 단면을 포착해보고 싶어서 촬영했다. 2003. 1.11.







이전 03화 제2장. 일출에서 일몰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