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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Dec 31. 2023

제4장. 태고의 태하령

[제1부] 2003. 1. 11.

울릉도 벌써 네 번째 밤이네요.

아직 살아있답니다~~ ^^;;

오늘은 짧게 쓰고 빨랑 자야 할 텐데...


태하령?


클 태(台)에 안개 하(霞)라, 안개가 자주 끼는 고개인가 보죠?

아, 글씨 태하령이 성인봉보다 훨씬 더 좋다니께?

증말 기가 막힌 곳이여. 거글 안 가보믄 후회하지, 후회해...


민박집 고덕진 어르신의 적극 추천으로 오늘은 태하령을 넘어가 보기로 결정!      

짠!

어떤 곳일까요? 기대 만땅입니다. ^^       



오전 10시


봄날 꿈처럼 따사로운 날이네요.

넉넉한 시간에 집에서 나와 버스로 도동 도착.      



오전 11시


도동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그저께 걸어갔던 해안 길을 이번에는 버스로!


왼쪽 창가에 앉아 해안선을 바라보며 이틀 전의 그 감격을 다시 한번 복습해 봅니다.       

통구미를 지나서, 남양 일몰 전망대 아래를 지나갑니다.

통구미에서 남양으로 이어지는 울릉도 남해안. 2022. 10. 20.


근데... 하하, 이거 뭐 전혀 쨉이 안 되누먼요?

천천히 걸어가며 동해의 정기 서린 바닷바람을 가슴에 하나 가득 받아들일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더라구요.

그니깐 여러분도 대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음미하려면, 될수록 많이 많이 걸어 다니도록 하시와요?      

[ 저동(버스) ⇒ 도동(버스 환승) ⇒ 구암(도보) ⇒ 태하령(도보) ⇒ 태하(버스) ⇒ 저동 ]


그저께 걸어가다 되돌아온 구암 마을에서 하차!

그때 다섯 시간 걸려서 걸어간 거리를 버스는 불과 30분 만에 도착했군요. 그 버스 되게 느리죠? ^^

여기서 태하령을 넘어 울릉도 서북쪽에 자리 잡은 태하 마을까지는 약 10km!

울릉도 일주 유람선에서 바라본 구암 마을. 가운데 협곡의 좌측 길이 태하령 가는 길이다. 2022. 10. 20.


어르신, 말씀 좀 여쭐게요. 태하령 넘어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태하령예? 눈이 제법 쌓였을 긴데? 뭘라꼬 글루 가능교? 해안선으로 난 큰길 놔뚜고. 올라가는데 한 시간쯤 걸릴낌니더... 예전에는 차가 다 이 길로 다녔지예. 하이고 메, 그 길이 우찌 험한지 여자들은 전부 다 오줌을 질금질금 흘렸다 아잉교!

네? 아, 네, 그렇구먼요... ^^;;  


구암에서 같이 내린 동네 할아버지, 친절도 하시지,

민박집 고바우 어르신께서 해주신 말씀을 복습(?)해서 또 한참 들려주시네요?      

하지만 차가 다녔다는 포장된 길인데, 이거야 뭐 문제없지 않겠어요?

어제 그렇게 눈 쌓인 상봉도 올라갔었는데 말이죠, 흐흐흐... (어허, 교만은 절대 금물인데...)


 


11시 42분


구암 마을 출발!      

어제 상봉 능선 올라가는 눈 쌓인 포장도로 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호젓한 산길.

구암 마을에서 태하령 가는 길의 초입. 2003. 1. 11.

생각과는 달리 도로가 습기 하나 없이 말짱 말랐네요?

하하, 이거 완전히 하이킹 코스구나?

길 한 복판에 굴러 떨어져 있는 거대한 바위들... 이그 무시라.. 낙석 조심!  


휘파람을 불며 30분쯤 올라가다 휴식.

사방을 둘러보니 곳곳마다 깎아지른 절벽!

그 위에 우뚝 서서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소나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울울창창 짙어지는 원시림! 아, 그래서 이름이 울릉도인가?


울릉도 명 가이더 고덕진 어르신 말씀:

울릉도는 소나무가 구부러진 게 읍서.

짐생도 읍고, 비암도 읍서. 비암을 갖다 놨더니 못살고 죽어버리드래여. 그 참 희한하지?

이 조그만 절벽 섬에 물은 또 곳곳마다 천지여, 천지!


훌륭한 가이더 말씀은 언제나 진리! ^^      

볼수록 정말 신비로운 섬, 울릉도!

맑은 계곡 물 한잔에 목을 축이고 앞을 바라보니 능선에 보이는 청명한 하늘이 기운을 북돋아주네요.  

에구 기분 좋아라. 어제 어두컴컴 눈발 흩뿌리던 상황과는 전혀 다르군용?      


음, 한 시간쯤 올라가면 된다고 했으니깐두루 이제 반쯤 왔겠군. 하하.

빨리 태하에 도착해서 점심 챙겨 먹고 오늘 아예 북쪽 해안까지 제대루 한 탕 뛰자!

새롭게 각오를 다지면서 기운차게 출발!


근데...

모퉁이를 싹~ 돌아서니, 드디어 눈이 보이네요?

조심조심 밟아보니... 애개~ 겨우 이 정도야?

하하, 어제 그 지독한 눈구덩이도 헤쳐나갔는데, 이쯤이야...


자동차 바퀴도 선명한 눈길을 따라

눈앞에 빤히 보이는 저 능선을 향해 또다시 힘차게 전진!

짜가 김삿갓 드래곤 앞길에 거칠 것이 있으랴!!!  



12시 40분


길은 이제 자동차 한 대가 엉금엉금 기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로!

길만 콘크리트로 포장이 되었다 뿐, 이건 강원도 울창한 숲 속의 비상 산림 도로 보다 훨씬 더 비좁네?

아니, 일방통행도 아닌데 이런 길로 어떻게 차가 다녔다지? 울릉도 기사들은 재주도 좋아?

신기한 마음에 쉬엄쉬엄 계곡 양쪽 절벽 원시림의 정취를 음미하는데, 어느덧 발목까지 삼키는 눈...

거의 다 왔겠지? 눈길이었으니까 30분쯤은 더 걸릴 거야... 나름대로 짐작하며 여유 있게 올라가는데...



1시 20분      


비 오듯이 흐르는 땀...

발목이 완전히 푹푹 빠지는 심하게 경사진 눈길.

보통 길을 걸을 때보다 세 배는 더 힘든 기분...


엇!

타이어 자국 끝? 자동차가 심하게 몸부림친 흔적이 보이네?

하하, 이런 길을 자동차가 어떻게 올라오겠어? 미련스럽긴...


경사진 눈길에는 사람 발자국 몇 개만이 더욱 정답고...

그나저나 태하령 정상은 얼마나 남은 거지?



1시 40분


아이고, 힘들어라. 어디 쉴 데가 없을까?

앗, 조오기 마른자리가 있네요?

눈 녹으며 흘러가는 길 한복판에 마른자리 한 평(?) 발견!

(좌)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며 (우) 오랜만에 눈 녹은 곳을 만나 쉴 수 있었다.

위스키 몇 잔, 간당간당 남은 육포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음, 이거 시간 계산을 잘못했는걸? 태하령을 넘어가면 그쪽은 북쪽이라 눈이 제법 많을 것 같은데...

라면이라도 하나 사 먹고 올라왔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막급입니다...



2시 10분      


햇볕마저 사라진 울창한 계곡. 음산...

구불구불 뱀처럼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터무니없이 비좁은 산길. (여길 자동차가 다녔다고? 말도 안 돼...)

드디어 사람 발자국마저 끊기고...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오로지 하아얀 백설의 세계.


무릎이 눈에 푹푹 빠지는데... 도대체 정상은 어딘 거야? ㅜㅠ

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올라온 듯.

(되돌아간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지만...)

심한 허기...

문득 밀려오는 두려움...




2시 30분      


심하게 구불구불 기어 올라간 도로.

설마... 정상 일보 직전의 몸부림이겠지? 그렇다고 해줘요. ㅠㅜ

헉, 도로변의 표지판이 절반쯤 눈에 잠겨있넹? 적설량이 1m는 되어 보이죠?

도로 표지판이 절반 이상 눈에 잠겨 있다. 적설량은 1m 이상일 듯.


다행히(?) 무릎까지만 눈에 빠지고 있답니다. 그동안 체중이 좀 줄었나?

하지만 언제 몸 전체가 폭~~ 빠져 들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어제 상봉 오르면서 허벅다리까지 빠졌을 때도 헤어 나오기 어려웠는데,

1m 깊이면 자칫 가슴까지 빠진다는 이야기. 만약... 그럼 어떻게 빠져나온다죠?  


앞을 바라보니, 오르막 길이 100m 정도 전방의 음산한 곳에서 커브를 틀어 다시 이쪽 방향으로 오는 군요.

옆을 바라보니, 흙으로 된 절벽? 60도쯤 되는 경사면.

여기를 10m 정도만 기어 올라가면, 200m 이상 눈길을 우회하는 수고를 절약할 수 있다는 얘기네요.

무엇보다 여긴 경사가 심해서 눈이 별로 안 쌓였을 것 같아요.


그리하여 그 흙 절벽에 용감하게 도전!

근데 웬 걸? 으악~ 여기도 무지 많이 쌓였네?

젖 먹던 힘을 다해 기어오르니, 애고고~ 그야말로 기진맥진...

게다가... 올라와 보니 또다시 끝없이 하늘 향해 이어진 가파른 산길입니다. ㅜㅠ


으~~~~

여기도 정상이 아니었네...

하늘이 하얗게 보이누나...

현기증... #$@%^$#@



2시 50분      


드디어 능선에 오르다!

그런데, 어라? 바다가 안 보이네?


아름드리나무들이 양쪽 절벽 끝에 서서 위용을 자랑하는데,

그 사이 성인봉 쪽으로 엿보이는 아찔아찔한 봉우리, 봉우리들!

아니, 이게 무슨 섬이야? 백두대간 한 복판에 떨어진 기분.

(좌) 태하령으로 이어지는 능선. (우) 빽빽한 대나무 사이로 엿보이는 장쾌한 성인봉 능선.


이제 체력은 완전 고갈... 그나마 조금 가져간 먹을 것도 다 떨어졌군여.

문제는, 아직도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


아... 핸펀이 터지네?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꾹, 참다!

지금 이 순간, 무슨 좋은 말이 나오랴.

라면, 라면 한 그릇만 먹었으면...



3시 10분


정상.

구암 마을에서 무려 세 시간 반 만에 올라선 태하령 정상입니다.

양쪽 산봉우리 사이 까마득한 그곳에, 북쪽 바다가 어슴프레 펼쳐져 있네요.

태하령 정상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네요. 아, 어지러워...

하지만 정상에 올라선 세리머니를 안 할 순 없겠죠?


이야~~ 호!

이야~~ 호!

이야~~ 호!      

세 번 악(!)을 쓰고, 간단히 세리모니 끝!


이제 일몰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는데,

하산할 일이 까마득하군요. 후유...


----------------

오 마이 갓!


정상 모퉁이를 돌아서니...

키를 훨씬 넘어서는 눈더미가 길을 가로막고 있네요. ㅠㅜ

아마도 정상을 넘나드는 바람의 조화인 듯...     

태하령 정상 북쪽 길에 쌓인 눈.


아, 저길 어떻게 지나간다지...

1, 2m가 아닌 것 같은데... 저런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이쪽은 북쪽 길, 올라온 길보다 눈이 훨씬 더 많이 쌓였을 텐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핸펀이 터지는지 다시 한번 확인.

음. 터지는군. 최후의 사태 땐... ㅜㅠ      


어떻게 건너가지? 한동안 궁리...

길 옆을 살펴보니, 오호, 산 쪽으로 철망이 쳐 있네요?

안내판도 보입니다.

울릉도의 명물, 너도밤나무, 향나무, 백리향 등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낙석 방지용이군요!


그래, 맞아. 저걸 타고 가는 거야... (궁즉통이라...)    

  

절벽을 타는 기분으로 아슬아슬 200m쯤 내려갔을까요?

음, 여기는 좀 만만해 보이는군...

땅 위로, 아니 눈 위로 뛰어내려 다시 눈길에 도전!

휴우, 다행히 여기서부터는 무릎 높이로 빠지는군요.

우측 철망을 붙잡고 200m 정도 내려가니 눈이 덜 쌓인 곳이 나왔다.


다시 끝없이 이어진 눈길...

이번엔 닥터 지바고로 변신한 짜가 김삿갓...


퍽! 퍽!

소리와 함께

커다란 도넛 모양으로 굴러 내리는 눈뭉치들을 신기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은백색의 눈길은 하염없이 급경사로 내려가고 또 내려갑니다.


(좌) 퍽, 퍽, 소리 내며 도넛 모양으로 굴러 내리는 눈뭉치들. (우) 거의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태하령 북쪽 하산 길.


그나저나 왜 이리 멀미하듯 어지럽죠?

나중에 얘길 들으니 푹푹 빠지는 눈길을 오래 걸으면 그런다고 하네요?

그런 눈길에선 똑바로 못 걸어가고 비틀비틀 걸어가게 되니까요.

짜가 김삿갓, 졸지에 울릉도 산길에서 만취하여 비틀비틀... 꼴이 말이 아니군요. ^^;;


아, 제임스 본드는 이럴 때 스키 타고 내려가던데...  

썰매라도 가져올걸...



5시 25분    


태하 바닷가.

온몸이 쫄딱 젖은 채, 잠시 일몰을 지켜보았습니다. 조금은 덜덜 떨면서.


뒤를 돌아보니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신비스러운 절경들이 울릉 나그네를 전송해 주는데,

모든 것이 그저 한 바탕의 꿈인 것 같군요.


그래도 참으로 아름다운 울릉도!

걸을수록 사랑스러운 신비의 섬, 울릉도!

이렇게 신령스러운 땅이 또 있을까요...



오늘은 별이 아주 많군요.

내일 아침, 또다시 그 장엄한 일출을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나그네 여러분,

오늘 글은 어쩐지 힘이 없지요?

양해하여 주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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