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공자의 리즈 시절]
무엇이든지 첫출발이 중요하다. 찬란하게 빛나며 저물어가는 대자연의 황혼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흔 살 나이의 노년을 맞이하려면 첫출발을 잘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吾, 十有五而志於學.
오, 십유오이지어학.
해석이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 "나(공자)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라고 해석한다. 필자는 다른 해석 방법을 더 선호한다. "너희들은 열다섯 살 나이 때에는 놀기만 좋아했지? 흠, 난 그때부터 배움에 뜻을 두었다구!" 공자가 그렇게 잘난 척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랬다면 그가 인류의 3대 사표師表로 추앙받을 리가 없다. '나 오吾'라는 글자는 후세에 공자를 신격화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가필일 확률이 높다. '나 오吾'를 빼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교육적이며 평소 공자의 언행과 부합한다. 이렇게 말이다.
일흔 나이가 되었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리즈 시절을 맞이하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열다섯 살 나이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껏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아름다운 시절을 맞이할 수 있다.
궁금증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열다섯 살'이라고 했을까?
그 연령대의 특성이 배움을 게을리하고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공자가 삶의 시기별 특성을 파악하고, 시기마다 화두로 삼아야 할 말을 던져준 것이다.
공자는 ‘열다섯’이라고 했지만 평균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에는 ‘이십 대 초/중반’까지 연장해서 해석하면 좋을 듯. 아무튼 학생들에게 공자의 이 말을 들려주면 십중팔구 반감을 보인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요? 난 평범하게 살고 싶걸랑요? 그냥 아무나 되면 안 돼요?” 이효리가 아무나 되어도 상관없다고 그랬다나?
그 말은 나도 동의한다. '평범'은 가장 큰 진리 중의 하나이니까. 문제는, 그러면서도 열다섯 스물 나이의 그들의 욕망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만족시키려고 발버둥을 친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도 그랬으니까. 그게 열다섯 스물 나이의 보편적 특성이니까.
공자의 이 말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가 있다. '배움 學'이라는 단어다.
'배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공자의 시대에는 열다섯 나이가 된 본인의 결심이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아니다. 학생 본인의 의지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부모,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의 생각이 중요하다. 얘, 그만 좀 놀고 공부 좀 하렴! 공자님도 열다섯 나이에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대잖아! 앞으로 뭐가 되려고 그래? 아유, 내가 못살아! 많은 분이 애꿎은 공자님을 팔면서 자식을 들들 볶으며 간섭한다.
그분들에게 여쭤보고 싶다. 당신들 스스로는 그 나이에 어떠셨는지? 하나 더 여쭤본다. 이 문장에는 ‘배운다 學’는 동사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시느냐고, 다시 말해서 공자님이 무엇을 배우라고 한 것인지 아시느냐 여쭤보고 싶다.
목적어를 생략하지 않은 완전한 어휘는 ‘학문’이다. 공자는 열다섯 나이가 되면 '학문'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단어의 한자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십중팔구 ‘學文’으로 알고 있다. 즉 '머리로 글을 배우는 단순 두뇌 활동'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NO! 아니다! 차제에 분명히 알아두시라. ‘학문’은 ‘學文’이 아니다. ‘學問’이다.
다시 말해서 ‘배움 學’의 목적어는 ‘글 文’이 아니라 ‘물어보는 것 問’이다. '물어보는 마음가짐'을 배우는 것이다. 설령 내가 더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겸손하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학문學問’의 뜻이다. 그 과정에서 지혜와 정성을 배우고, 또 그렇게 배운 것을 반드시 온몸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학문'이다. 지식을 얻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얻어질 수밖에 없는 부수적인 효과다.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 결합 패러다임의 '학문' 》참조.
‘학문’이란 ‘글 文’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지식'이나 '정보' 따위를 배우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18세기 당시 서구식 낡은 공부 방법이었고, 또 그걸 맹목적으로 베껴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학문이었다. 21세기 현대 서구의 교육은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지식과 정보의 축적 위주 교육에서 판단력 · 통찰력 · 비판적 사고 · 창의력 등의 '지혜'를 배양하는 교육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동아시아의 패러다임과 '학문 學問’의 특성을 받아들여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 · 우리 것으로 학문하기(2)》참조.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떠한가! 아직도 전근대적인 교육 방법에 매달려 있다. 아니,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하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던 대학은 취업 준비 학원, 중고등학교는 입학 준비 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초등학교는 아이들 교육 장소라기보다는 욕망을 분출하려는 헬리콥터 맘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빽 있고 돈 많은 동네에서는 심지어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장소 같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대한민국 사회의 '공부'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 당국, 특히 학부모님들이 무엇을 자녀에게 교육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내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AI의 시대가 도래했다. 궁금한 지식과 정보는 컴퓨터를 검색하면 바로바로 알 수 있다. 사법고시 따위를 본답시고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죽자 사자 머리로 암기하는 그런 공부의 시대는 지나갔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1분 1초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다. 이제는 그런 걸 '배움'의 대상으로 삼아봤자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쏟아져 나오는 그 지식과 정보를 올바로 운용할 줄 아는 마음가짐과 지혜, 그리고 제대로 사용하는 실천력이 중요한 시대다. ‘학문 學問’이란 바로 그 ‘물어보는 마음가짐’을 배우는 것이다. 물어본다고 해서 꼬치꼬치 따지며 물어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겸손하게, 간절하게, 꾸준히 가르침을 청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열다섯 나이가 되면 그런 마음가짐을 배우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찌 피교육자인 학생들만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겠는가. 학부모, 선생님, 교육 당국자들이 합심하여 도와주어야 한다. 그 모두가 가르침을 담당한 '선생님'이다. '교학상장 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다.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하게 만든다는 뜻. 그러니까 가르침을 담당한 사람들도 배워야 한다는 말. 공자 시대에는 열다섯 나이의 피교육자들만 배움에 뜻을 두면 됐지만, 이제는 교육자들도 함께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한다. 열다섯 스물 나이의 우리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 새롭게 고민해봐야 한다.
첫출발이 성패(成敗)를 좌우한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꾸준함을 배우는 것.
갈림길마다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하지 않으면 길을 잃게 마련이다.
인생의 목적지인 저물면서 빛나는 리즈 시절을 맞이할 수 없다.
< 계 속 >
[ 표지 사진 설명 ]
◎ 최초로 공자의 일생을 그림으로 그린 <성적도 聖跡圖>의 일부. 명나라 영종英宗 정통正統 9년(1444)에 발간한 작품이다. 위의 장면은 공자가 유년 시절에 소꼽놀이를 하는 모습.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을 늘어놓고 '예禮'를 익히고 있다.
◎ 사마천의《사기 · 공자세가》를 보면, 열다섯 스물 나이의 청소년 공자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맹리자孟釐子라는 노나라의 유명한 대부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임종 직전, 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유언으로 남겼다는 말이 너무 재미있다. 공자라는 사람이 '예禮'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하니, 꼭 그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라는 당부였단다. 그런데 당시 공자가 몇 살이었느냐? 겨우 열일곱이었다. 그 정도로 공자는 청소년 때부터 이미 '예'를 잘 아는 사람으로 노나라의 유명 인사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는 양호陽虎라는 자였다. 그가 노나라의 유명 인사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공자도 스스로 참가하려고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났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이 공자가 몇 살 때 일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기 · 공자세가》에 '맹리자 사건'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5~17세 무렵의 일로 판단된다. 열다섯 스물 나이의 청소년 공자는 자타가 인정하는 '예'를 잘 아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들이다.
◎ 공자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예'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지 체계를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예'라고 하면 예의범절과 같은 형식 측면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자는 '예'의 본질은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주장했다. 매사를 대할 때 언제나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겸손하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 '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게 바로 곧 '학문'이다.
'학문'과 '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그것이 유가 사상의 출발이다.
공자의 그러한 인식은 어쩌면 청소년 시기부터 이미 정립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