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전 철인동 여인들의 떼죽음을 애도하며
11월 11일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나시나요?
젊은이들은 우선 빼빼로 데이를 연상할 겁니다. 쇼핑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광군제'를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네요.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아주 드물게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나, 뭐라나요. 그리고 오늘은 제1 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이기도 하죠.
'광군제'는 한국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우리말 외래어 표기법에 의거해서 표기한 것. 한자로는 光棍節[guānggùnjié], 우리말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면 꽝(→)꾼(↘)지에(↗), 원래 '독신자의 축제일'이라는 뜻이다. 몽둥이(棍)처럼 생긴 아라비아 숫자 1111은 가련한 '솔로/독신자'를 의미하고, 앞에 '빛 광光' 자를 붙인 것은 독신자를 위로하는 뜻에서 '빛나는, 화려한'이라는 말을 추가해 준 것. 맨 뒤의 '절節'은 '축제/페스티벌'이라는 뜻.
1990년대에는 중국의 싱글 남학생들이 모여 술 마시고 노는 날로, 싱글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연인들도 싱글들에게 염장 지르는 행위를 자제하는 날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2009년 중국 알리바바 그룹이 운영하는 타오바오淘宝 온라인 쇼핑몰에서 이 날을 상업 마케팅 데이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에는 전 세계 최대의 할인 쇼핑 행사일이 되고 말았다. 금년에는 알리 익스프레스와 티엔무의 한국 시장 진출로 한국 소비자들의 대규모 참여가 예상된다.
저는 이 날이 되면 47년 전 일이 기억납니다. 그렇군요. 1977년 11월 11일의 일이었으니, 벌써 47년이 지났네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슬프지 않은 날을 찾기란 정말 참 힘들지만, 이 날은 더욱더 슬퍼집니다.
제가 이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세 달이나 지난 1978년 2월이었죠. 당시 저는 최전방 DMZ 안의 GP에서 대북방송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6개월 만에 휴가를 가기 위해 후방의 자대로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푸세식 변소에 가서 앉아 휴지로 가져간 전우신문을 열심히 꼬깃꼬깃 꾸기는데, 어라? 이상한 뉴스가 보이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큰 뉴스를 석 달 동안이나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당시 최전방 GP에는 TV는 물론, 라디오도 딱 한 대밖에 없었던 터라 바깥세상 소식을 알 수가 없었죠.
그때 제가 어떤 뉴스를 본 것인지, 당시 전우신문은 구할 수가 없어서 같은 뉴스를 전하고 있는 한국일보를 검색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최대의 폭발 사고라는 '이리역 폭발사고'였습니다. 저는 아버님 직장이 목포였던 관계로 수없이 기차를 타고 지나다녔기에 너무나 친숙한 곳이어서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랬습니다.
1.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역(현 익산역)에 정차하고 있던 화약열차가 폭발했다. 화약 호송을 책임 맡고 있던 신무일(당시 36세)이 술을 마신 후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침낭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하여 40톤의 다이너마이트와 기타 고성능 화약에 옮겨 붙어 연쇄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어떻게 수십 톤의 다이너마이트 옆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잘 수가 있을까요!
화약 호송원 신무일은 왜 술을 마셨을까요? 화가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화가 났을까요?
철도 위쪽의 완전히 파괴된 마을이 철인동이다.
2. 원래 한국화약 호송 담당 직원 신무일은 이리역에 정차를 하지 않고 목적지 광주를 향해 계속 달리려 했다. 당시 단선單線을 달리는 열차의 교행 원칙에는 폭탄 및 화학 화물 열차가 가장 우선으로 운행하며, 철도운송규정 46조에는 화약 열차는 모든 철도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해야 한다는 안전 수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리역 직원들은 신무일에게 이른바 '급행료'를 요구하며 열차를 정차시키고 출발을 계속 지연시켰다. 돈이 없었던 신무일은 22시간 이상 이리역에 발이 묶이자 저녁 식사를 하며 홧김에 술을 마시고 추위를 막기 위해 술김에 촛불을 켰다가 그만 잠이 들었던 것이다.
추위를 막기 위해 촛불을 켰다니, 어이없게도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생각나는 장면이군요. 그나저나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급행료'를 요구하며 그 위험한 다이너마이트 화물 열차를 계속 붙잡아둔 역무원들의 소행머리도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긴 그 당시에는 동사무소에 서류를 떼러 가도 급행료를 내야 하는 게 관행이다시피 했죠. ㅠㅜ
제일 화가 나는 건 '한국화약'입니다. 1960~1970년대 이 회사는 국내의 각종 폭발물을 거의 독점으로 취급했지요. 건축 현장이나 광산에 필요한 화약을 공급하기 위해 한국화약 직원들은 각종 폭발물을 싣고서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다이너마이트 40톤을 비롯한 엄청난 폭발물을 혼자서 호송한 신무일은 화약 취급 자격이 없는 무자격자였다네요. 자, 이 정도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3. 암흑천지가 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이리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밤새 공포에 떨었다. 시가지는 유리 파편과 초연으로 전장을 방불케 했다. 역에는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집 앞에서 가족을 잃고 추위 속에 밤새 유족들이 통곡했다.
밝혀진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반경 500m 이내의 모든 건물이 전파되었다. 반경 4km 이내의 건물은 반파되었고, 반경 8km 이내 건물의 유리창이 전파되었다. 사망자는 59명, 부상자는 1,343명. 이재민은 9,973명이었다. 재산 손실은 당시 금액으로 약 23억 원.
그러나, 이 통계를 과연 믿을 수 있는 걸까요? 당시는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는 '당연히' 통계에서 누락되었죠. 그 숫자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언론에서 많이 다루었던 뒷이야기 두 개가 있습니다.
1. 사건이 발생하던 그날 그 시간에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과 이란. 2대 2로 비기는 바람에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같은 시간 이리역 부근의 삼남극장에서는 인기 가수 하춘화의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700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9시 15분, 대폭발이 일어나고 삼남극장의 천장이 무너졌다. 쇼의 사회를 맡아보던 코미디언 이주일(1940~2002)은 본인의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서도 하춘화를 업고 탈출하는 의리를 보여주었다. 깊이 감동받은 하춘화는 당시 무명이었던 이주일을 적극 밀어주어 마침내 '코미디의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끔 도와주었다. 이주일으로서는 이 사건이 인생의 대 전환점이었다.
2. 그날 밤, 철로와 열차를 점검하고 수리하는 철도검수원 18명이 열차 100여 량의 검수를 막 끝내고 쉬고 있었다. 화약 호송원 신무일이 도망가면서 “불이야!” 소리를 질렀다. 검수원들은 본능적으로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신발을 벗고 있던 11명은 뒤처지고, 신고 있던 7명이 먼저 수백 미터 떨어진 화재 현장까지 득달같이 달려갔다. 7명이 철로 변의 자갈과 흙을 주워 들어 뿌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화약 열차는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십 미터 뒤에서 따라오던 동료들도 후폭풍에 날아가버렸다. 그중에는 이리역 운전조역으로 근무하던 송석준도 있었다. 후폭풍에 휘말려 나가떨어졌던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잠시 후에 이리역으로 들어올 특급열차가 생각났다. 그는 미친 듯이 1km를 달려 특급열차가 보이자 웃옷을 벗어 흔들었다. 천만다행으로 특급열차는 그를 발견하여 긴급 정차했고 승객 600명은 불지옥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언론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도 알아보죠.
사건을 일으킨 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 신무일은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 급행료를 요구하며 열차를 역에 묶어둔 역무원 두 명은 징역 8 개월을 선고받았다.
▶ 한국화약, 오늘날의 한화그룹 사장은 1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벌금 20만 원으로 감형받았다. 그러나 여론이 나빠지자 90억 원을 이리시에 기증했다. 한화는 2024년 추모식에도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편 호남 민심에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군인 3만 명과 예비군, 학생 등 5만 명을 동원하여 천막촌을 세우고 피해 복구 예산으로 130억 원을 투입하여, 사고 발생 200일 만에 26개 동의 1,180 가구가 살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를 건립한다. 2010년에 재개발된 모현주공아파트다.
이리시는 현대식으로 완전히 환골탈태하게 되었다. 원래 발전 계획을 30년 이상 앞당긴 셈이었다. 이리 시민들은 폭발사고가 난 것을 오히려 남몰래 좋아하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다. 사고가 난 1년 후, 모 신문에는 이리 시민들이 사고를 낸 신무일의 동상이라도 세워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고 다닌다는 기사가 날 정도였다.
실제로 1979년 12월 21일, 가족을 잃었던 유족들은 신무일을 석방해 달라고 탄원서를 올린다. "사고를 계기로 입었던 뜨거운 동포애에 보답하고, 자랑스러운 시민상 정립을 위해 펼치고 있는 애향운동에 호응, 이 같은 탄원을 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월간 김창주, 이리역 폭발사고>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만큼 이리 시민들은 옛날 이리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가, 새롭게 바뀐 모습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사고 발생 자체를 내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글쎄요, 뭔가 씁쓸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폭발사고의 가장 큰 피해지역은 이리역을 끼고 있는 창인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철로변에 붙어있는 철인동이었죠. 그런데... 창인동은 뭐고 철인동은 또 뭘까요? 잠깐 창인동의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전, 이곳은 갈대가 무성한 평지였다고 합니다. 그 갈대밭 속에 10여 가구가 있었다는데요,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속 이裡', '마을 리里', '이리裡里'라고 불렀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이리역
그런데 일제가 나라를 침탈하면서 이 부근의 기름진 평야에서 나오는 쌀을 수탈하기 위한 근거지로 이리를 점찍은 거죠. 그래서 1912년 3월 6일 이리역을 만들고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이리역 부근은 일본인을 위한 신도시 역할을 했던 일출정日出町과 환락가였던 굉정轟町(기차의 굉음이 그치지 않는 동네)으로 구분되었답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로 일출정은 북창동北昌洞, 굉정은 철인동鐵仁洞으로 개칭되었는데, 1957년 북창동과 철인동을 통합하면서 각각 창인동 1가, 창인동 2가로 부르게 되었다네요.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습관대로 북창동, 철인동으로 불렀답니다.
먼저 철인동의 위치가 어디인지 지도로 살펴볼까요?
창인동 1가, 즉 북창동 지역은 익산대로의 동쪽, 하춘화가 공연했던 삼남극장을 중심으로 한 일대입니다. 그리고 철인동은... 어라? 바로 익산역전 광장 일대네요? 그렇습니다. 철인동은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에 동네 전체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 거죠.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겁니다.
문제는... 그 철인동에도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거죠.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들이 떼죽음을 당한 겁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온전한 시체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밤을 새워 달려온 군인들이 트럭에 팔다리만 남은 시신 조각들을 싣고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네요. 통계에 잡히지 않은 신원 미상의 사망자들이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든 언론은 입을 닫고 있는 걸까요? 정말 몰라서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1995년 익산으로 이름을 바꾼 익산 시민들이 무겁게 입을 닫고 있어서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오생도 바람결에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소위 '언론'이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요?
파괴된 열차 뒤쪽이 철인동이다.
철인동은 집창촌이었습니다. 이리시와 시민들의 오랜 골칫거리였죠. 이리역은 한때 서울역 다음으로 유동인구가 많았던 역이었다는데, 당연히 몸을 파는 거리의 여인들이 수없이 몰려들었겠죠. 기차를 제대로 타러 갈 수가 없을 정도로 호객 행위가 심했을 것입니다. 밤이 되면 우범 지역이 되어 여성들은 근처에 가기도 무서웠을 겁니다. 왜 아니겠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이 깡그리 없어진 겁니다. 앓던 이가 빠진 이리 시민들은 아마도 속으로 환호하지 않았을까요? 거기에 도시 전체가 급속도로 현대화가 되니 내색은 제대로 못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심정... 일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 역시 '인간' 아닙니까? 그 여성들의 99.999%는 본인들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내몰린 사회적 약자 아닙니까? 최소한 그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원혼을 달래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리역 폭발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간 그 어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들의 원혼을 달래줄 한두 마디 비석에 새겨 넣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가슴이 아픕니다... ㅠㅜ
김우한, 연작 <미정지>.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 김대례 무녀의 씻김굿 장면이 보인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원혼들을 위한 씻김굿이 절실하다.
1950년 7월 11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기가 나타나 이리역을 두 차례 폭격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4일이 지난 후, 미공군기가 다시 나타나서 재차 이리역을 폭격하였습니다. 양민 400명에서 600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는 미공군기의 오폭이라고 밝혔습니다. 무슨 놈의 오폭이 이렇게 엄청나고, 무슨 놈의 오폭이 이렇게 자주 있답니까... 독도를 폭격한 미공군기 사건도 생각납니다. <제12장. 독도의 눈물>
우리의 근현대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지, 하늘의 깊은 뜻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 보는 11월 11일의 밤입니다...
# 이리역 폭발사고
# 철인동
# 2018년 익산 여성영화제에 출품한 김민혜 작가의 <철인동의 밤>을 첨부합니다. (첨부 기간 20241111~ 202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