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한비야. 내 나이대의 여성이라면 한 번쯤 읽어봤을 그런 책이다. 한비야는 확실히 사회현상이었다. 보호받고 특혜 받는 대상에서 자유롭고 거침없이 탐험하는 독립적인 주체로, 그렇게 시대의 여성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었다. 혼자서 배낭만 메고 사과 한 알에 생수 한 병 들고 베이징, 파리,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는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외무고시 3차 면접에서 "최근 여성 외교관이 늘어나는 추세라서 여성 외교관들도 이제는 아프리카, 중남미 등 험지에도 파견될 텐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난 속으로 헛웃음이 났었다.
'이게 질문인가?' 하면서. 속으로 난 '이게 생각할 문제인가, 조직에서 가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 게다가 '이제는 여성 외교관도' 라니? 그럼 그동안에는 여자라고 봐준 건가?'하고 그 짧은 시간에도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최종 답변은 "여성 남성 관계없이 험지에 파견되는 것은 외교관으로서는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험지에 파견되게 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겠습니다!"였다. 물론 그때 그 당시엔 합격만 시켜준다면 외교부 청사 전 층의 화장실 청소를 시켜도 기꺼이 할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으니까. 그러한 답변이 절로 나오는 거는 당연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면접 질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와 내 여성 동기들은 아프가니스탄, 짐바브웨, 리비아 등 지구 곳곳의 험지에 파견되었고, 내전, 코로나, 자연재해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임무를 마쳤다.
# 미얀마 갈래? 피지 갈래?
2019년, 중국 근무 3년이 되자 드디어 나에게도 때가 왔다. 여러 험지들 중에서 최악을 피해 차악을 골라야 하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미얀마 갈래? 피지 갈래?"였다. 당시 내가 켈리에게 선물했었던 세계 지도 그림책에 미얀마에는 쉐다곤 파고다(불탑), 피지에는 돌고래를 타고 노는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당연히 켈리는 돌고래를 탄 아이가 되고 싶었겠지. 켈리의 손가락은 피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상사들도 "피지 가서 육아에 집중하면 되겠네! 잠깐 여유 좀 가져"라고 해 주셨다.
험지 근무는 현지 생활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도전과제이지만 외교 업무 차원에서는 중국과 같은 핵심공관에 비해서는 널럴하다. 전문(외교부에서 사용하는 보고서 형태) 쓸 일도 적고, 본국에서 고위급 인사가 방문하지 않는 이상 달리 주목받을 일도 없는 곳이다. 피지는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섬나라이고, 큰 이슈가 없었다. 있다면 어떤 한국 사이비 종교단체가 피지에 정착하여 이들로 인한 사건사고 영사 문제 정도였다. 이에 비해, 미얀마는 정무적으로 나름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미얀마에는 오랜 군부 독재 끝에 민주화 이행 문제가 있었고, 라카인 지역에 로힝야족에 대한 인권 탄압 문제도 있어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 주목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의 (거의 독점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받고 있었기에 미중관계 측면에서도 전략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미얀마 갈래? 피지 갈래?" 하는 것은 "일 배울래? 쉴래?"였는데, 역시 난 일을 배우는 쪽을 원했다.
# The Devil wears Prada
내가 미얀마를 택했을 때 다들 걱정해 주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미얀마 대사관에 워커홀릭 대사님이 파견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오히려 좋았었다. 미얀마의 정무, 개발, 인권 분야에서 다양한 업무를 접하면서 워커홀릭 상사를 모시고 일하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짧은 기간 안에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어떤 선배는 "네가 이길지도 몰라, 겡끼야."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그래, 나는 그래서 프라다를 입는 악마를 택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프라다는 멋지니까.
그런데 막상 미얀마에 파견되어 업무를 시작해 보니, 정말 상상 밖이었다. 우선, 대사님의 워커홀리즘 성향을 차치하더라도, 여러 부처에서 주재관들도 다수 파견되고, 외교부 동료들도 많아서 함께 나누어 일했었던 주중대사관과 달리, 미얀마에서는 핵심 실무인력인 내가 모든 분야의 업무를 다 하는 구조였다. 미얀마의 수도는 네피도인데, 우리 대사관이 소재한 양곤에서 1시간가량 국내선 비행기를 타거나 5시간가량 차를 타고 가야 갈 수 있었다. 미얀마 정부 카운터파트와 협의하기 위해서는 매일 새벽 5시에 첫 비행기를 타고 오전 면담, 오찬 협의, 오후 면담, 만찬 협의를 마치고 저녁 8시쯤에 부랴부랴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양곤에 돌아왔다. 출장 간 기간에는 업무가 계속 쌓여만 갔다.
여기에 더해 매 업무 노드마다 체크하고 완벽한 상태를 지향하는 상사를 맞추려다 보니, 어느 순간 인정하고 말았다. '아, 내가 이기진 못하겠구나!'
"겡끼 서기관, 다음 주 만찬 때 초청된 장관이 나이 먹어서 치아가 약하다는군. 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숙성되도록 식당 요리사에게 미리 말해 두세요."
"겡끼 서기관, 다다음주 내가 만날 비서관에게 우리 한국 관련 기사를 미얀마어로 번역해서 제공하고자 하니 미리 준비해 두세요."
"겡끼 서기관, 상무관이 작성한 보고서가 수준 미달이니, 겡끼 서기관이 다시 작성해서 올리세요."
등등... 쉴 새 없는 지시에 '넵 알겠습니다"를 답하다 보니, 나중에 드디어 "넵넵"을 하게 되었다. 참, 나는 바위와 같이 단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낙숫물에 바위가 뚫린다"는 말이 있듯이, 바위와 같던 내 내면이 너덜너덜해짐을 느꼈다.
# 대사님 너무한 거 아니야?
사실, 켈리는 미얀마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가 끝까지 "고민해 볼게"라고 했다. 내가 중국에서 바로 미얀마로 갈 때, 켈리는 잠깐 한국에 보냈었다. 켈리는 매일 통화할 때마다 미얀마를 온다고 했다가 안 온다고도 했었다. 그만큼 많이 고민했었나 보다. 미얀마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거의 없고, 양곤 길거리에 들개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괜스레 자극되면 사람을 물기도 한다. 광견병 발병률이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말라리아, Elephant disease 등 풍토병들도 많았다. 켈리는 결국 "엄마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미얀마행을 최종 결정했다. 미얀마 출발 전 여섯 종류도 넘는 예방접종을 견디면서, 그렇게 엄마 곁에 와 주었다.
다행히 켈리는 미얀마를 좋아했다. 미얀마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보다 착하다고 하면서. 그리고, 당시 우리는 대사관과 20분 거리에 있는 롯데호텔 레지던스에서 살았었는데, 켈리는 호텔 레지던스 생활을 너무나 좋아했다. 매일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을 벗어나면 야근, 주말출근이 없을 것이라는 엄마의 말과 달리, 켈리는 미얀마에서도 엄마와 함께 대사관에 나와야 했다. 주말에 켈리가 대사관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대사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누가 출근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대사관 안의 모든 사무실 문을 다 두드려 보고 출근한 사람이 엄마 혼자라는 것을 알아챈 켈리는 "대사님 너무한 거 아니야?"라며 씩씩 거리곤 했다. 평일 저녁 내가 만찬 일정으로 늦어지면 늘 나에게 "빨리 와"라는 그림을 그려서 보모를 통해 문자로 보냈다. 생각해 보면 켈리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그래도, 그때가, 나와 켈리가 가장 가까웠던 시절 같다. 모녀의 전우애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