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은 늘 너무 단순하다. ...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p.158)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다 -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얼룩덜룩했다. (p.160)
1. 간단하고 명료한 말은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단순할수록 복잡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안녕하냐는 인사에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지난밤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룬 괴로움은 들어있지 않다. 별일 없냐는 안부에 잘 지낸다고 대답하지만 그 안에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은 들어있지 않다. 규칙은 단순할수록 좋지만 이야기는 단순할수록 왜곡된다.
우리들의 대화는 언제나 단순하다.
나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운이 닿지 않아 우리가 제대로 알 기회도 얻지 못했던 사람과 마주치면 우리는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젖는다. ...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p.161)
2. 얼마나 많은 운명이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만약에 그때 행동을 다르게 했다면, 그때 그곳에 갔었다면, 그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다면 다른 인연이 이어졌을까. 마치 평행우주 같은 상상 때문에 우리는 현재에 만족하기 어렵다. 낭만적인 노스탤지어는 사실 부질없는 거짓말이다.
우리는 가끔 과거를 후회하기도 한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때와는 다른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현재의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선택은 과거든 미래든 늘 반복될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고, 내가 바뀐다면 과거도 어떤 의미에서는 바뀔 수 있다. 미래 역시 그렇다.
미지의 존재에는 거울이 달려 있어, 거기에 우리의 가장 깊은, 가장 표현할 수 없는 소망들이 모두 비친다. ... 나는 클로이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녀를 알기 때문에 그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 갈망에 필요한 신비가 없기 때문이다. (p.163)
3. 알고 있기 때문에 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알고 있다는 인식은 얼마든지 무지로 바뀔 수 있다. 한 때는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지금에 와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 지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지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누군가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착각에서 비롯된 일종의 마비된 감각이다. 그 감각은 그것을 잃어야만 깨어난다.
사람은 어떤 것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한동안 나는 클로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을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었다. (p.164)
4. 익숙해진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무감각해진다는 것일까,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감각에 가까운 것 같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일 뿐 심드렁과는 다르다.
기적은 반복되지 않아야 신비롭다. 매일 반복한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그저 일상일 뿐이다. 일상은 기적으로 채워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적으로 부르지 않는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도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분명한 기적이다. 단지 익숙해졌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 감정의 고정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현실에서는, 불과 하루 동안에도 나는 먹을 수 있는 감정의 요리를 모조리 빙글빙글 돌려가며 내 내부의 접시에 올려놓는다. (pp.167-168)
5.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하지만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이성(또는 관계)이기도 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감정적인 고백뿐 아니라 나와 그녀의 관계를, 어쩌면 변하지 않을 평생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성의 상태를 고백한 사랑과 순간적인 감정의 사랑은 자주 오용된다. 여전히 사랑하는 상태이지만 우리는 그 사랑하는 대상에게 순간적인 감정으로 인해 분노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면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우리의 사랑은 갑자기 시작되었듯이 갑자기 끝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동의 운명에 호소함으로써 현재를 강화하려고 했다. (p.171)
6.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유일하고 불가피한 하나의 도피다. 과거는 이미 함께할 수 없고, 현재는 바뀔만한 여력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저 미래라는 불확실한 소재를 장난감삼아 쉽게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그려야할 것은 현재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