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일상적인 것이라도 특별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경이의 빛을 발산하기 마련이다. ... 전이의 한 형태이겠지만, 나는 그녀가 소유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p.60)
1.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대상이 되는 존재의 모든 것을 동경하게 된다. 그녀의 특별한 안목과 취향을 닮아가고 싶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대상과 동화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그녀를 둘러싼 그녀가 선택한 모든 사물에 옮겨간다. 마치 연예인이 공항에서 입었다던 공항패션과 집 앞에서 신었다는 만 원대의 지압 슬리퍼까지. 모두 그 자체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감정의 전이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p.63)
2. 사랑은 본래 쌍방이다. 주고받는 의미의 상호작용도 있지만 그보다는 잘 주고 잘 받는 일방향의 의미로써 쌍방이 일차적이다. 또,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을 잘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받는 것이 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을 잘 받는다는 게 무엇이 어렵냐 물어본다면, 받는다는 것의 본뜻은 주는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린다는 데 있다. 물론 주는 사람 역시 받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잘 줄 수 있다. 그러나 주는 것은 능동적이고, 받는 것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잘 받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잘 받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 물론 이것도 잘하려면 상대를 오래도록 그리고 깊이 생각해야 하지만 일단 하는 것 자체는 쉽다. 이런 이유로 짝사랑을 즐겨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는 또 다른 마르크스(Grucho Mar, 1890-1977, 미국의 희극인. 저자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그루초 마르크스와 관련된 것이다.)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 클럽에 가입하기를 소망하면서 그것이 실현되자마자 그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pp.66-67)
3. 그런데 이런 짝사랑의 형태도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소심함으로 선뜻 티 내지 못하는 짝사랑이 있는가 하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단언해 버리는 짝사랑도 있다. 전자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후자는 자존감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마치 동경의 대상이 나와 이루어진다면 내가 그 사람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되레 그 사람의 안목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도 사실 나처럼 별거 없는 거 아닌가라는 상상은 곧 자신의 떨어지는 자존감에 달려있다.
간혹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날 좋아한다고 하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사랑의 주고받음이 동등한 감정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상하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과 같다. 나보다 위에 있어 올려다보던 존재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그 순간, 상하 관계가 바뀌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기를 갈망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이 공상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pp.67-68)
4.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일종의 자기 비련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보다 이별 영화의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목표를 성취하면, ...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면 소진되어 버린다. (p.71)
5. 오래된 광고 카피 중 이런 말이 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사랑은 정말 정처 없이 떠도는 그런 것일까? 사랑이라는 상태는 소멸되지 않지만 대상만 바뀌는 그런 것일까? 한 사람에 머무는 사랑은 이상일뿐일까?
사랑은 정말 변할까.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p.72)
6. 인디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음속에는 늑대 두 마리가 존재한다. 기쁨과 친절의 착한 늑대와 불만과 오만한 나쁜 늑대. 두 늑대는 늘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늑대는 바로 우리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가 늘 싸우는 상태에서 결국 승리하는 쪽은 우리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늑대 이야기와는 다르게 우리의 마음속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는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야 좋겠지만 그래도 혐오보다는 사랑이 낫다. 자신의 부족함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혐오하면서 타인을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은 타인을 완벽하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아직 타인에게서 환상을 지우지 못하고 마음의 눈을 감은 상태임에 불과하다. 곧 자신을 혐오하듯 타인에게도 그러할 것이 분명하다.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는 의미는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