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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조은 Oct 28. 2022

하루의 실종

2

아버지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나에게 손 말 책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틈틈이 봐 두라.”


할아버지, 할머니 중 한 분이 말을 못 하시나 싶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날그날 익힌 손 말을 매일 점검했다. 나는 제법 암기력이 좋았던 편이라 문제없었다.


드디어 길 떠나는 날 아침, 엄마는 짐을 내어주며 눈물을 흘렸다.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 있던 나는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엄마도 같이 가면 좋았을걸.”

 

엄마는 기어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여보 그만하지. 조금 있으면 지도원 동지가 올 텐데…….”


아버지 말에 엄마가 황급히 눈물 훔치고 감정을 추슬렀다. 엄마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다 마치 내 얼굴을 새겨 놓기라도 할 것처럼 정성껏 어루만지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때 우리를 데리러 온 일행이 도착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차에 오르는 것이 망설여졌다. 부두까지 배웅하기 위해 엄마도 함께 차에 탔다. 지도원 동무가 퉁퉁 부은 엄마 눈을 힐끔 쳐다봤다. 


나는 항구에 있는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뱃전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차갑게 피부를 때리던 바닷바람이 점차 순해졌다. 일본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2월인데도 떠날 때는 진눈깨비마저 흩날려 한겨울 여운이 짙었다면 이곳 항구엔 한 발 앞서 봄이 먼저 도착해 있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안절부절못했다. 상기된 얼굴에는 전에 없던 생기마저 감돌았다. 


할머니와 삼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삼촌은 거뭇거뭇 웃자란 수염에 꽁지머리까지 묶고 있어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한눈에 아버지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발을 땅에 딛자마자 아버지와 할머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포옹을 푼 삼촌은 나에게도 다가와 서슴없이 끌어안았다. 지도원 동무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는 내내 삼촌에 대한 주의 사항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로 외국으로 떠돈다는 삼촌은 할아버지 병환을 계기로 우리보다 먼저 고향 땅을 밟았다고 한다. 


지도원 동무는 삼촌을 두고 불온사상에 물든 사람이니 되도록 말도 섞지 말라고 강조했다. 짧지만 강렬한 포옹에서 풀려나자 할머니가 다가와 내 손을 잡고 볼을 어루만졌다. 배웅해주던 엄마 손길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와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삼촌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지도원 동무는 마중 나온 조선총련계 간부들 차를 타고 우리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기어이 감시원까지 붙이다니.”


삼촌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버지가 일본어로 한마디 하자 삼촌이 운전대 앞 거울로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과 할머니의 흐느낌만 남았다. 아버지는 차창을 열고 팔을 밖으로 쑥 뻗었다. 햇볕을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물기 가득한 눈을 감았다. 나는 아버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을 못 본 척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과 북적이는 시내 풍경은 평양 시내와 사뭇 달랐다.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 이런 곳이었구나, 생각하며 그 낯섦에 당황했다. 이윽고 도착한 할아버지 집은 정갈하고 깨끗했다. 처음 본 일본식 집은 그림같이 예뻤다. 크지도, 작기도 않은 마당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고 물고기 두어 마리가 헤엄쳤다.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붙은 지도원 동무는 근처 숙소에 묵기로 했다. 삼촌은 집으로 들어서기 전 지도원 동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집에 들어서자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사진이 우리를 반겼다. 아버지를 닮은 주름진 얼굴에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서 군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가슴팍을 촘촘히 메꾼 훈장 때문에 위엄이 있어 보이기보다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할머니가 내 등을 살짝 떠밀었다.

 

“올라가서 옷 갈아입으렴. 아버지 방 옆이 네가 묵을 방이야.”


나는 아버지를 쫓아서 이 층으로 향했다. 반질반질 닳아 있는 나무계단이 밟힐 때마다 삐거덕! 삐거덕!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감회에 젖어 벽을 손으로 훑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먼저 방에 닿은 아버지는 미닫이문을 열더니 못 박힌 듯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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