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출근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따뜻한 햇살이 밤새 식어버린 곳곳을 데운다. 외출하기 적당한 온도로 동네가 데워지면 나는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와 숫자 30이 적힌 축구 반바지를 입고, 떨어지기 직전의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원룸을 나선다. 정문을 나오면 걸어서 2분 거리의 낡고 허름하지만 정이 가는 동네슈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 원룸 바로 맞은편에 GS25 편의점이 있지만 어디에서나 갈 수 있는 획일화된 편의점보단 우리 동네에서만 갈 수 있는 슈퍼가 더 끌린다.
편의점에 가면 점원의 표정 없고 무뚝뚝한 계산을 마주해야 하지만, 슈퍼에 가면 가게 주인인 아주머니의 활기찬 인사를 받을 수 있다.
"총각, 출근했으면 뭐 해야 혀?!”
"거 옆에 빗자루가 심심하다 잖어~”
부산이 고향인 나는 처음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아주머니의 충청도식 넉살에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아주머니와 환상의 파트너가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평소대로 아주머니의 반가운 인사가 있다.
"오늘은 어째 허리가 쪼까 뻐근하구먼”
"저 짝에 있는 양파랑 아직 아침인사도 못했구먼 우째스까이”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양파그물망을 두 손으로 들어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에 무심히 놔둔다.
핫바 한 개와 비락식혜 한 캔을 외상하고 슈퍼 앞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저 멀리 언덕 아래 보이는 분주한 도심의 풍경을 멍하니 몇 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핫바의 고소한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볼품없고 위태로워 보이는 파란색 원형 테이블 위에 핫바와 비락식혜를 나란히 놓고 사진을 한 장 찍는다. 그러곤 ’이게 행복’이라는 문구를 적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린다. 이렇게 올리고 나면 진짜 이게 행복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딱히 행복이 아닐 이유도 없다.
핫바와 식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 노랗게 물든 단풍 하나가 바람을 살랑살랑 타고 테이블에 살포시 떨어진다. 그 단풍을 보니 새삼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느낀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어언 6개월이 지났다. 호기롭게 이직을 했고, 못해도 3년은 다닐 것이라 굳게 다짐하며 회사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 하지만, 입사 1개월 만에 나는 회사를 때려치웠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 형편이 어려워져 경기도 구석인 여주로 사무실 이전을 하게 되었다. 전세로 2년 계약한 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주로 출퇴근을 했지만, 총 4시간의 통근시간을 견디지 못해 입사한 지 1개월 만에 퇴사를 질러버렸다. 월세, 관리비, 생활비 등은 차후의 문제였을 뿐이다.
10시 10분, 나는 시계를 보지 않아도 10시 10분인 것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시간만 되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 노랫소리의 출처는 저편에 보이는 빙그레 할아버지의 오래된 라디오이다. 할아버지는 이 시간만 되면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편의점으로 걸어온다. 언덕 밑에서 또 하나의 해가 떠오르듯 깔끔하게 정돈된 민머리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나와는 상반되게 아침부터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노란색 슈트와 중절모는 어딜 가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할아버지의 말끔한 차림새는 단 하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알고 지낸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말끔한 차림새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본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사실 육군 주임 원사로 전역하셨다고 한다. 본래 깔끔한 성격이지만 군대에서 매일 아침 깔끔하게 군복을 차려입는 것이 습관이 되어 전역하시고도 여전히 깔끔하게 차려입으신다고 한다. 단지 바뀐 것은 군복에서 정장으로 바뀐 것 밖에 없다. 그 후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내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었다.
“어이 채수 반가워, 이 얼마나 환상적인 날인가!”
나에게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이렇게 완벽한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게나.”
그러곤 단지 모양 바나나 우유를 하나 꺼낸다.
“이보게 충청댁 바나나 우유 하나 외상 달아주게.”
아주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구수한 말소리는 슈퍼 정문을 타고 넘어와 들린다.
“할배, 빨대는 찾지 말어. 잠깐 외출 나갔응께.”
이내 자리에 앉은 빙그레 할아버지는 바나나 우유를 시원하게 들이켠 후, 라디오 채널을 돌린다.
채널을 돌리니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가 흘러나온다.
내일은 더 낫겠지 그런 작은 희망 하나로 사랑할 수 있다면 힘든 일 년도 버틸 거야 일어나 앞으로 나가 네가 가는 곳이 길이다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노래 가사는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노래하고 있지만 가을 하늘에서는 갑자기 여우비가 부슬부슬 소리 없이 내린다.
갑작스러운 비에 어제 깜빡하고 잠그지 못한 서점의 창문이 문득 떠오른다.
“할아버지 먼저 들어갈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오야”
나는 자취방에 들어가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우비는 금세 그쳐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날씨가 나를 맞아주었다. 이왕 나온 김에 서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