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드로잉
책장 앞에 쌓아둔 책을 이리저리 옮겨본다. 어떻게든 눈에 띄게 만들어 읽으려는 요량으로 쌓아둔 것인데, 괜히 각 角이 마음에 안 든다. 크고 두꺼운 책은 아래에 두고 작은 책을 위로 옮겼지만, 읽고 싶은 순서와 맞지 않아 다시 책을 정리한다. 쌓인 모양이 마치 분황사 모전석탑 같아 혼자 흐뭇해하다가도 갑자기 허탈해진다. 이 피곤한 성격을 어찌할 것인가.
쌓인 책들과 눈을 맞춘다. 늘 그래왔듯이 유명한 책은 조금 묵혔다가 읽는 습관이 있어 제목만 익숙한 책들. 가끔은 무엇이 책을 유명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 구매할 때도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 반응할까.
뉴욕의 한 미술관에서 일하던 경비원의 자전적 에세이를 꺼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다. 제목으로만 본다면 내 취향은 아니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이지만 ~입니다.’ 식의 제목이라 거부감부터 생긴 것도 사실이다. ‘나는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사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책으로 쓸 수 있는 고상한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읽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내 심사를 자극한다.
원제는 「all the beauty in the world」. 작가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자신이 일하던 박물관(미술관)에서 본 듯하다. 세계 5대 박물관 중 한 곳에서 일했으니 이런 대담한 제목을 지을 수 있었으리라. 그는 사랑하던 형의 죽음이 고통스러웠고 자신의 삶을 더는 그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이 다니던 직장이 모두가 선망하는 <뉴요커>라고 해도 말이다. 갑자기 내 눈빛이 유순해진다. 상실이란 그런 것이다.
도망치듯 숨어 살고 싶어도 일은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대형 미술관의 경비원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빈자리에선 상처만 보일 테니 눈을 밖으로 돌려 상처가 아물길 기다리는 게 현명하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본다. 작가는 보통 사람이라면 압도당할 법한 방대한 양의 동양과 서양, 고대와 근대, 예술 작품과 공예품을 가리지 않고 관찰한 후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치 연고를 바르듯 예술 작품을 상처 치유에 활용했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잊고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예술이 어떤 역할을 했을지 말이다. 본질적으로 예술작품에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혼재한다. 상실도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작가는 자신의 상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랜 시간 작품을 관찰했고, 작품의 주제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픔은 본인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가 제일 사랑한 그림은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다.)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작가는 동료들을 사랑하고 관객들에게 친절했다.)
무엇보다 다행인 사실은 그의 곁엔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도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의 소란스러움이 자연스러워질 무렵, 그는 경비일을 그만두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곳곳에서 내 모습이 겹쳐진다.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빠르건 늦건 알아차리게 된다. 아름다움은 삶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삶은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패트릭 브링리>
어제 대학교 은사님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뵌 교수님은 푸석해 보이는 얼굴만 제외하곤 평소와 다르지 않으셨다. 말씀을 들어보니 연로한 어머니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신 듯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자세조차 교수님다웠다. 특별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듣기만 하는 일이 죄송했다. 중간중간 찾아오는 조문객들에게 교수님은 긴 한숨처럼 같은 이야길 반복하셨다. 교수님이 많이 지쳐 보일 때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엔 다른 빈소의 조문객이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벌써 이번 달에만 장례식장에 다녀온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봄의 문턱을 넘지 못한 고인들과 남아서 봄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있었다. 나는 바깥의 공기가 마시고 싶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뺨에 닿는 찬 공기가 겨울의 꼬리쯤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시기가 눈물 난다. 긴 겨울 뒤에도 봄이 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