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32
‘전쟁(戰爭)’은 ‘국가(또는 사회 집단)가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戰(싸울 전)은 ‘싸움’을 뜻하고, 뜻을 나타내는 戈(창 과)와 소리를 나타내는 單(홑 단)이 합쳐진 글자이다. 爭(다툴 쟁)은 굽어진 U자 모양의 물체를 사이에 두고, 손의 모양을 본뜬 又(또 우) 자가 위아래로 놓인 형태로, 어떤 물체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뺏으려고 다투는 모습에서 ‘다투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것만은 틀림없다. 역사적으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멸망한 대부분 국가가 전쟁으로 사라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에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고대부터 전쟁이 학문이 될 정도로 발전한 것을 보면 그 역사는 인류와 함께해 왔고 발전한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손자병법’은 전쟁학의 최고봉이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선 많은 군사학자가 관심을 가지지만, 실제 사회와 전쟁은 수많은 변수가 개입하기 때문에 누구도 전쟁의 원인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한다. 원인을 알고, 그것이 조절 가능한 원인이라면 미리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시작되었지만, 말 그대로 희망 사항일 뿐이다.
고대에 전쟁의 원인은 새로운 땅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명확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부족한 땅, 노동력, 여성을 얻고 부강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 전쟁이었다. 이후 전쟁의 일반적 목적은 영토를 넘어서 자원, 종교, 사상, 이권 쟁탈 등이 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보다 근본적인 전쟁의 원인으로 국제적 패권, 경제적 이득, 정치적 상황 등을 꼽고 있다. 국제정치학자 중 하나인 케네스 월츠는 전쟁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는데, 개인의 심리, 국가 내부의 정치, 국가 간의 정치라는 이미지를 도입해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공격적인 성격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폭력적인 심리가 있어서 전쟁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하여 동물을 공격하여 더욱 사냥을 잘하는 쪽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격성의 진화가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진화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 전쟁하는 건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 때문이지만, 반대로 전쟁하지 않는 건 인간의 평화적인 본성 때문일 테니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당한 권력, 정당한 이유, 정당한 의도 등 세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정당한 권력은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국가의 지도자가 국가의 공익을 대표해야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정당한 사유 역시,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는 등의 명분이 있어야 하며, 정당한 의도는 나쁜 쪽으로 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지키기도 어렵고, 모두 충족하는 전쟁을 한다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해결책을 따라올 전쟁은 없기 때문이다.
정복자들이 활개 치던 시대에만 해도 전쟁은 손실은 적고 수익은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핵무기와 사이버 전쟁은 피해만 막대할 뿐 수익은 적은 사양산업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쟁은 온 세계를 파괴할 수 있겠지만 부유한 나라는 절대 건설할 수는 없다. 집단 차원에서 인간의 자멸을 부르는 대표적 행동이 전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 전쟁이 아무리 실속 없는 사업이라 해도, 그런 사실이 평화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규제를 벗어난 욕망은 이제 국가나 사회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양산되어, 지금도 곳곳에서 자살, 살인, 전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우리 한반도에도 휴전의 불안한 평화를 지켜가고 있지 않은가?
‘전쟁은 현대판 지옥이다.’라고 할 만큼 그 피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전쟁이 벌어지면 각종 범죄와 비극이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인류 죄악의 총합이자 인류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는 주로 폭력 위주의 범죄만 일어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전쟁은 모든 비리와 범죄를 다 모아놓은 것이다. 유일하게 적군에 합법적인 제압을 포함한 살인을 허용하고, 살인 외에도 적을 상대로는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던 거의 모든 범죄(부녀자 및 유아 살해, 상해, 강간, 방화, 폭행, 협박 등)가 용인된다. 인간의 전쟁에서 전쟁에 참여한 남성은 죽고, 여성은 성폭력의 대상이 된다. 고대부터 지속된 전쟁 폭력의 여성에 대한 형태다. 정규군도 이럴 정도인데 반군 무장 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국제법이 정한 선이 있지만 이를 성실히 지키면서 수행하는 전쟁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전쟁은 일부 지도자의 망상에서 시작되지만, 수많은 전쟁을 수행하는 죄 없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을 뿐이다. 한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나라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국가와 종교에 대한 믿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이에 따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집과 신체 일부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이때도 고통의 몫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다. 소유와 탐욕을 주된 행동으로 하는 지도자나 국민으로 구성된 국가 간에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근대의 물질문명이 인류에게 행복만을 선물한 것은 아니다. 그중에 가장 비극적인 것이 대량 살육의 전쟁을 발명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게 엄청난 인명 피해와 파괴를 선사했을 뿐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종교 간 분쟁과 전쟁이 발생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 믿음이 전쟁의 원인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종교적 믿음의 다름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전쟁은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일부 지도자들이 세속적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떤 종교의 경전에도 세속적 이익의 추구하라는 구절은 없다. 세속적 이익은 추구하는 것은 종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회 현상을 개혁하는데 목숨 걸고 해야 할 만큼 긴급할 때 전쟁이란 말을 빗대어 사용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범죄와의 전쟁이다. 국가적으로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전국의 폭력조직을 와해시키고 실질적으로 범죄 발생 건수도 많이 감소했다. 다만 경찰의 실적 위주의 수사와 검거로 선의의 피해자도 많이 발생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입시도 전쟁, 취직도 전쟁, 사랑도 전쟁, 나이 들면 질병과의 전쟁, 사는 것이 모두 전쟁이라 표현한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이 녹록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사랑과 전쟁은 드라마, 영화, 부부 클리닉 프로그램 등 단골 메뉴로 등장할 만큼 흔하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니, 그래도 전쟁 중에 가장 좋은 전쟁이 아닐까?
그렇게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삶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생은 혼자만의 전쟁이다. 전쟁, 혁명, 천재지변 등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 삶은 멈추지 않았다. 사랑했고, 아이들이 태어났고, 삶이 계속되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며 오늘의 행동을 선택해 왔다. 그러니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라 하지 않던가. 주 5일제가 무색하게 월화수목금금금 쉬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 오늘도 거친 파도를 헤치고, 괴물 같은 사회와 싸우고, 유혹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모두 세상을 살아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네가 죽고 내가 사는 전쟁은 인제 그만~! 미래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환희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전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