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61
‘쾌락(快樂)’은 ‘인간의 감정 상태 중 재미와 만족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상태이다. 快(쾌할 쾌)는 ‘쾌하다’를 뜻하는 한자다. 樂(음악 악/즐거울 락/좋아할 요)은 신을 모시는 춤을 출 때 손에 가지는 방울을 본뜬 글자로, 기본음은 ‘악’이고, 파생된 음으로 ‘락’과 ‘요’가 있다. ‘락’은 주로 형용사로 사용될 때, ‘요’는 ‘좋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쾌락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우리말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데 의미는 약간 다르다.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으로 물질적 행복을, 즐거움은 마음의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행복한 느낌이나 마음으로 정신적인 충족에 의한 행복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기쁨은 행위의 결과로 인한 행복이고, 즐거움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행복을 뜻한다.
쾌락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치명적인 중독의 병이라는 의견도 있다. 쾌락을 탐욕스럽게 충족시키도록 사람들을 부추긴다는 이유에서다. 납치, 강간과 그런 종류의 범죄는 쾌락의 유혹으로 유발된다는 것이다. 쾌락은 심사숙고를 방해하고, 이성에 적대적이고, 마음의 눈을 멀게 하고, 미덕과는 함께하지 않는 것,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부터 쾌락을 누리는 것을 죄악이라고 여겼고, 쾌락이 허용되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중세 내내 금욕주의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별로 다양한 종류의 축제와 민중문화가 활발하게 발달했는데, 쾌락을 사회 전체가 죄악시하고 법으로 금지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과도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무분별하고 절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다. 간디도 양심 없는 쾌락의 추구는 사회악이라 지목하고 있다.
정신적인 즐거움의 정도는 행복도와 정신건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삶이 즐거우면 활력이 생기고 긍정적이며, 즐겁지 않으면 무기력하고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같은 환경에서도 외향성이 높고 신경성이 낮은 사람일수록 즐거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고, 우울증에 걸리면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는 가장 강렬한 쾌락이 성적 쾌감과 맛의 쾌감일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걸 보고 싶고, 맛난 걸 먹고 싶고, 멋진 이성과 섹스를 나누고 싶다. 우리의 삶에서 압도적인 쾌감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중에 섹스만 한 것도 없다. 섹스를 통해 극한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존재하도록 번식을 위한 본능적인 장치이겠지만, 섹스를 통한 쾌락은 행복 추구의 기본이다. 하지만 성적 쾌락에 의한 행복은 극도로 억제되었던 성적 욕구가 일회성으로 충족되어 오기 때문에 일시적이다. 성적 쾌감뿐 아니라 이러한 감각적 쾌락은 일시적으로 충족되는 경향이 많고, 추구하는 마음이 모두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성과도 갈등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아에 대한 절제가 없는 쾌락은 행복한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즘 맛의 쾌락을 주제로 하는 대표적인 방송이 일명 ‘먹방(먹는다는 뜻의 ‘먹’과 방송의 ‘방’이 합쳐진 신조어)’이다. 인간에게 먹는 행위는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먹는 행위는 생존을 넘어서 삶과 문화가 되었다. 전통적 건강과 예절 문화의 정체성과 가치를 벗어난 먹방 문화는 인터넷, 종편 및 지상파 방송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오죽하면 한국어 먹방의 영어 병음 ‘Mukbang’이 그대로 고유명사가 되었을까. 현재 지구상에서 굶어서 영양실조로 죽는 수보다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죽는 수가 훨씬 더 많고, 비만이 질병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마냥 웃고 즐길 수만은 없다.
프로이트는 인류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쾌락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명제,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쾌락 원칙의 프로그램이다. 둘째 명제, 쾌락 원칙은 행복해지기 위한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부과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완수될 수 없다. 셋째 명제, 성 본능을 ‘목적 달성이 금지된’ 충동으로 바꿈으로써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 ‘이성’과 ‘의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것도 없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고통과 불쾌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쾌감을 경험하려고 애쓴다. 전자는 넓은 의미의 행복이고, 후자는 좁은 의미의 행복이다. 인간의 삶에는 고통이 쾌락보다 훨씬 많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최선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고, 차선은 쾌감을 추구하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마음 상태가 아니므로 쾌락 원칙은 현실 속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없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 쾌락보다는 고통과 불행을 제거하는 소극적 행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적으로 생활하면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주는 쾌감의 정도를 숫자로 나타낸 ‘쾌락 지수’가 있다. 재미 삼아 살펴보면, 마약 150, 도박 115와 같이 중독성이 강한 행동이 극한 쾌감을 느끼고, 섹스와 여행 55, 숙면 35, 합격 20, 험담 19, 칭찬 13, 독서 10, 등이다. 반면에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스트레스 지수는 배우자의 죽음 100, 이혼 73, 별거 65로 배우자와의 분리 불안이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고, 교도소 수감 63, 가까운 사람의 죽음 53, 결혼 47, 임신 39, 등이다. 결혼이 상당히 큰 고통을 주는 원인이라는 결과는 의외다. 쾌락 지수나 스트레스 지수 모두,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도 더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행복과 마찬가지로 그럴 수 없다. 더 많은 쾌락을 좇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 강한 쾌락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희망 고문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쾌락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과 충동을 갖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그 행복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런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이 쾌락 충동이다.
쾌감과 행복은 지속 가능한 인간의 마음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100% 행복해지려 하면 100%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행복을 채우기 위해 문명은 발달한다. 개인들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쾌락 원칙을 따르지만, 이 목적을 실현하려면 인간 공동체에 순응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타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음으로써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의 욕구를 제어하거나 승화시켜야 한다.
과거와 미래가 없는 쾌락의 늪에 빠지지 말고,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