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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woo Feb 05. 2024

“나중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네요.”

 결국 핵심은 기다림 그리고 인내심입니다.

“나중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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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백이 대화방에는 ADHD자녀를 둔 부모와 미혼인 성인ADHD인이 각각 수백 명씩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결혼과 육아가 주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두 집단으로 나뉘어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ADHD는 유전적 소인이 있어서 성인ADHD인이 자녀를 낳으면 아이도 ADHD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 미혼인 성인 ADHD인들은 대개 자녀가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출산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ADHD아이를 자녀로 둔 여러 ADHD부모님들께선, ADHD자녀를 키우는 일이 고된 것은 맞지만 그만큼 행복하다며, 힘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보통 두 집단의 대화는 평행선을 이룹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각자 양보할 수 없는지, 다른 주제의 대화에서 보여주던 ADHD인들의 열린 태도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래는 제가 방장으로서 당시에 대화방에서 했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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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가봤습니다. 스키장도 가본 적이 없네요. 몇 살 더 먹으면 마흔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하시는 자영업마다 잘 안됐다 보니 집에 빚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조부모님은 성실함과 거리가 멀어서 부모님도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지요. 그래서 부모님 역시 조부모님에게 여가생활을 배운 게 없었고 즐긴 적이 없으셨지요. 여행이나 취미에 필요한 돈을 생각하면,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것부터 생각나더라고요. 성장기의 이런 여건은 저의 여행관, 취미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해외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저렴하게 가 볼만한 국내 여행에 대해 추천을 받아도 딱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유아기 등 아주 어릴 때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셨지만 당시의 추억은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이 글을 쓰면서 기억에 남는 가족여행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군요. 그렇게 20살이 넘어서 스스로 다녀볼 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행에 대한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행의 매력과 여행이 주는 장점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여행 과정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훗날 나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점, 새로운 환경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자극으로 창의력 등 여러 인지 기능 향상 등등. 여행이 단순히 재밌고 즐거운 경험이라는 걸 넘어서 신경생리학적인 관점에서도 여러 이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여행을 권해도 어린 시절에 많은 영향을 받은 건지 소극적인 태도가 됐습니다. 아내와 결혼 전, 함께 여행을 가본 것도 국내 여행 2회가 전부였지요. 자녀들과 해외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가 꺼낼 때면,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 긍정적으로 검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볼 때는 여전히 소극적인 모습으로 보이나 봅니다. 제가 한번이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와본다면, 또 가고 싶은 마음에 적금을 들고 계획을 세우는 등 다음 여행지를 고민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 그 말이 인상 깊었었거든요. 아무튼, 저도 언젠가 해외여행을 떠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언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인간에게 해외여행이 주는 장점과 매력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듯,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며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지속되는 이상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출산율은 계속 낮아지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사는 게 녹록치 않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예전만큼 결혼을 못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갖는 데에 많은 각오가 필요한 상황이지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이전 세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답답한 마음도 듭니다. 남북 전쟁과 새마을 운동을 경험한 사람들 눈에는 지금 세상이 좋게 보이거든요. 같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있지만, 각자 사는 세상이 다른 거지요. 이렇게 서로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을 때,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까요? 

 일상에서 해외여행을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면 보통 저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여행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나름대로 논리적이게 말하더라도, 상대방이 공감하지 못했던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조용히 듣고 있던 중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지 질문을 받으면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여유가 없어서 해외여행을 다녀와본 적이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계획이 없어"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반응합니다. 

'해외 여행이 얼마나 좋은데~ 그 장점이 뭐냐 하면 ~'

'해외 여행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지 않아. 일본부터 가보는 게 어떨까?'

'해외 여행은 젊을 때 가야 돼. 그게 진짜 재미야. 나이 들어서 가면 ~'

정말 자주 들었던 얘기들이고 앞으로도 제가 해외로 여행을 다녀오지 않는 이상 계속 듣게 될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해외여행 말고 다른 데서 내 삶의 행복을 찾을 거야. 앞으로도 나는 해외여행을 갈 일이 절대 없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해외여행의 단점에 대해서 줄줄 말하면서 해외여행 도중 사건사고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금 ‘결혼을 하고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안 낳고’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또는 집단과 무난하게 지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대화방을 보면 회사, 학교, 가정 등에서 크고 작은 논쟁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게 되는 ADHD인들이 참 많습니다. 의도치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다면서 곤란한 모습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났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ADHD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끊임없이 권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상황이 괴로울지라도, 상대방의 마음은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좋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너무 괴로워서 못 견딜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의 말에 반박하면서 열심히 방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세요. 그러는 것이 상황에도 좋고 내게도 좋습니다. 경험상 이 정도 멘트가 무난한 것 같습니다.

"저도 나중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네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겠네요."

이대로 대화가 마무리될 수도 있고, 나에 대한 주변의 평가가 '쟤는 독특한데다 고집이 세다'로 이어지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주변에 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쌓는 것보다도 안 좋은 이미지가 쌓이는 것을 피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ADHD인은 "너는 왜 (A)를 안 해? 내가 (A)를 해보니까 좋아. (A)를 하는 게 왜 좋은 지 설명해 줄게." 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A)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 상황, 근거 등을 하나씩 따져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열을 내는 상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자신을 쉽게 "방어적인 자세”로 만들었던 대화 주제가 있다면, 무난하게 넘어가기 위한 적당한 멘트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그 주제에 대해서 대화할 때 같은 실수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성인ADHD인 저의 과거 모습과 지백이 대화방을 보면, ADHD인은 위 상황에서 반대입장이 되는 모습도 많이 발견됩니다. 상대방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자라왔는지 잘 모르면서도 내가 (A)라는 것을 통해서 도움을 얻었다면, 상대방에게 (A)를 끈질기게 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많은 ADHD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설득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순수한 마음은 ADHD인에게 자신의 끈질긴 태도에 대한 면죄부를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권하는 태도에서 상대방은 우리에게 무례함, 불쾌감 등 자칫 선을 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순수한 마음은 절대선이 아닌, 양날의 검입니다.) 이런 모습은 친구나 주변 동료와 대화 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흔하며, 갈등 상황의 시작됩니다.

내가 (A)의 좋은 점에 대해 말하며 상대방에게 권했는데, 상대방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반박하는 등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발 상대방의 생각을 그 자리에서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상황을 ‘질질 끌지 않고 그 자리에서’ &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조급한 마음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욕망대로 행동한다면, 상대방은 앞으로 더 (A)를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저도 부모이기에, 부모가 자식을 설득하는 상황에서 이를 지키는 게 매우 어렵다는 건 잘 압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고 흥분하게 되더군요. 자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갔다 하더라도 자녀가 크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친구, 동료, 자녀 등 어떤 관계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상대방이 (A)에 대해서 영영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은 상황이 마땅하지 않나보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때가 되면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서로에 대한 감정은 상하지 않고, 관계는 좋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음에도 한 번 더 말을 해볼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실제로 상대방을 기다리는 태도 외에 더 나은 대안은 없습니다. 결국 핵심은 기다림 그리고 인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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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지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교만이다. 기다릴 자신이 없으니까 빨리 해결하고 싶을 뿐이다. 내 존재와 영향력을 당장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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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뚜렷하게 자신을 주변에 드러내는 것이 우리 대화의 목적이 아닙니다. 정보 공유, 문제 해결 등 특정 목적을 가지는 대화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대화는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데 중요한 수단입니다.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즐거움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낮추는 도구입니다. 그렇기에 주변과 대화를 통해서 나의 평판이 깎이고 걱정거리가 늘어난다면 본말전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관이 있듯 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르더라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충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는 것은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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