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탈모, 아니 원래 숱이 없는 건데요

'진행자 이모 머리가 휑..'

'흑채가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세월은 어쩔 수가 없네요~'


댓글이 후두둑 달렸다. 진행자로 활동 중이던 유튜브 영상 댓글창에서 벌어진 일이다.





오랫동안 한 회사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고정 진행자로 출연했다. 최근 몇 년, 그리고 십수년 전에도 몇 년. 그렇다. 그곳은 나의 첫 직장이었다. 풋풋했던 20대의 내 모습은 그 회사의 채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풋풋이라, 쓰고도 웃음이 난다. 나이를 먹다 보니 많이 관대해져서 풋풋이라 표현할 뿐, 사실 내 마음에 썩 드는 과거는 아니다. 촌스럽다.


어릴 때의 내 모습부터 최근의 내 모습까지 쭉 지켜보고 응원해준 구독자들도 꽤 있었다. 알아봐 준 것 만으로도 감사했다. 세월이 얼만데. 문제는 그들이 내 나이와 과거까지 모두 유추가 가능하다는 거였다. 고인물이라고 놀리는 구독자도 있었다. 다 늙어서 다시 나온 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나름 즐거웠다. 불러준 게 어디냐, 그저 감사하자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숱이 없었다. 늘 없었다. 머리카락도 얇았고 손톱도 얇았다. 멸치를 더 많이 먹을 걸... 그런데 이건 유전이다. 엄마가 그렇다. 불만은 없었다.


얇았지만 없진 않았다. 늘 머리카락이 두피에 딱 붙긴 했지만, 그래서 아래로 내려 묶으면 일명 '한석봉 머리'가 되곤 했지만 괜찮았다. 그러려니 했다.


서른 살, 아이를 낳고 누구나 거친다는 머리빠짐을 겪었다. 딱히 심하게 많이 빠지진 않았던 것 같다. 원래도 숱이 없었으니까.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돈 양호하다.



이후 지속적으로 머리는 빠져갔다. 그냥 탈모는 아닌 것 같았다. 머리 감을 때 마구 빠진다기 보단, 빗다가 빠졌다. 안 그래도 얇은 머리카락이 상해 가면서 뻣뻣해지고, 자꾸 엉켰다. 엉킨 상태로 있을 순 없으니 빗질을 하면 머리가 마구 당겼다. 쥐어 뜯듯 빗질을 하다보면 두피가 아파왔다. 빗다가 머리가 다 빠지고 있었다.


예전엔 어땠더라, 기억이 희미했다.


'내가 머리 감고 빗질 하는데 원래 이렇게 힘이 들었었나? 아니야, 예전엔 파마하고선 파마머리는 빗는 거 아니라고 빗질조차 안 하던 때도 있었어. 그래도 머릿결은 멀쩡했다고. 긴 생머리일 때도 머릿결은 늘 찰랑찰랑 했었어.'


혼자 이리저리 생각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앞머리 쪽이 휑하다. 두피가 너무 많이 보인다. 가르마가 이렇게 하얗다니. 고속도로 새로 뚫었나 보네. 이거 왜이래. 뿌염 할 때가 돼서 그런가. 까만 머리가 나오니 하얀 두피랑 대조적이라 더 눈에 띄나봐. 얼른 밝게 뿌염이나 해야겠다. 나름 친한 지인들에게 고민 상담을 하고 우선 해결책을 뿌염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당연한 거였다. 근본적 해결이 될 리가 있나. 가르마를 바꿔봐도 마찬가지 였다. 머리 전체에 숱이 적었다. 이럴수가, 너무 구리다.


그 댓글이 달린 영상은 내가 봐도 참 없어 보였다. 촬영하던 날이 떠올랐다. 평소 안 쓰던 천장 조명을 사용했었다. 담당PD가 나름 신중하게 조명을 이리 저리 만져봤던 기억인데, 그가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다. 다른 출연자들은 이런 일이 없었을 거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촬영하면서 모니터를 보긴 봤겠지만.... 설마 내 정수리에 집중 할 생각이나 했겠냐 이말이다. 진행자 얼굴을 보지 누가 정수리를 봐.


화면 속 내 정수리는 정말 돋보였다. 찬란한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흔히 대머리 아저씨를 생각할 때 빛을 받아 반짝 거리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듬성한 머리카락 속 정수리가 하얗게... 아니 살짝 갈색으로 빛이 났다. 두피에도 썬크림을 발라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지금에야 이렇게 글로도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지만, 그땐 완전히 무너졌다. 부끄러웠다. 옆에 아무도 없는데 숨고 싶었다. 마주보고 대화하면 내 정수리만 보는 것 같았다. 키가 큰 사람과 마주해도 그랬다. 움츠러 들었다.


평소 친하다는 핑계로 자주 외모 타박을 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출연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이른바 노골적인 '얼평'을 받아왔다. 살이 쪘네 빠졌네, 머리가 크네 작네, 못생겼네 귀엽네, 치열은 어떻고 피부는 어떻고...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얼굴 평가. 20대 때는 어려서 아픈 건가 했는데 4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정수리 탈모, 바로 이 사건으로도 나에게 한 마디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지 않아 다행이다. 늘 웃으며 날리는 팩폭에 나도 웃으며 툴툴댔지만 그때마다 사실, 참 아팠다.


나의 빛나는 정수리를 본 구독자들은 나름의 의견을 댓글로 피력한 것이었다. 개중에 외모가 아닌 콘텐츠 내용에 집중해 댓글을 단 사람에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탈모'는 이제 금기어라고, 상처받으시니 그만하라고 해주는 신사(?)같은 분도 있었다.


이후로 나의 촬영 시간엔 천장 조명은 절대로 켜지 않았다. PD도 알고, 나도 알았다. 켜면 안 된다는 걸. 모르고 켜는 날엔 뭐냐고 당장 끄라고, 웃으며 째려봤다. 미안했다.




이젠 괜찮다. 참 웃긴 게, 이게 불과 한 2-3년 전의 일이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체감으로 대충. 그 사이에 괜찮아졌다. 어떻게 괜찮아졌냐고? 나도 모른다. 그저 얼굴 내비치는 일을 계속 하면서 얼굴이 두꺼워진 걸까. 나도 내년이면 만으로도 진짜 마흔이 되니, 나이를 먹어서 관대해진 걸까. 정말 모르겠다.


아직도 머릿결이 너무 안 좋아서, 빗다가 투두둑 뜯긴다. 빗에 머리카락이 한움큼이다. 이럴 수록 트리트먼트며 영양이며 머릿결에 신경을 좀 써야 하는데, 아직도 대충이다. 탈모의 원인은 나의 게으름일 수도 있다. 유전 만이 아니라.


미용실 언니가 그랬다. 사람들이 얼굴 피부는 엄청 신경써서 세수하고 나면 이거 바르고 저거 바르고 난리 치면서, 머리에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러면서 머릿결은 좋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뜨끔했다. 어릴 때야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피부가 보송보송 하지만, 청소년기만 되어도 스킨 로션 안 바르면 건조하고 뒤집어지고 난리가 나는 걸 겪어 보고도 이런다. 머리에는 적용을 하지 않았다. 샴푸 린스만 겨우 하는 내 머리카락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건조하고 얇은 머리카락인데 말이다.


다행히 이제 탈모..아니 머리 숱이 없는 이런 모습이 지금은 덜 부끄럽다. 원래도 숱이 없었는데, 머릿결이 너무 상해서 억지로 빗다보니 자꾸 빠진 것 뿐이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빠지는 탈모가 아니다.


뭐..... 이렇게 구차하게 변명할 일은 없겠지만, 누가 물어보면 이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저는 탈모가 아니라 원래부터 머리 숱이 없는 거예요. 아.. 그게 그건가요."

역시, 쪼오금 비겁한 변명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