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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부리코가 어때서요

너무 짜증이 났다. 먹던 밥이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오려 했다. 내 코가 왜. 그래서 어쩌라고.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본인 할 말이 있으면 상대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모르는 척 기어코 입 밖으로 내뱉고 마는 그분의 막말을 들은 직후였다.


"어머, 얘 매부리코였네! 호호호"

"...?"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인 식사 자리였다. 그때 내 나이 아마 20대 초반. 갓 성인이 되어 한창 외모에 관심 많던 시기였다. 아직 덜 여물어서 마음은 또 유리알 같은 나이. 식사가 시작돼 막 한술 뜨려는 찰나였다. 늘 허풍 심하고, 백치미 가득한 캐릭터의 그 어른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하아.. 실소가 나왔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네, 모르셨어요? 저 매부리코였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오래 보시고 이제 아셨구나. 신기하죠? 만져 보실래요? 하하하."라고 했어야 하나. 눈빛으로라도 쏘아붙였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어린 나는 그저 수줍게 민망한 표정을 짓고 거친 밥알을 씹어 삼킬 뿐이었다.


성격이 아주 쿨하거나 당당하고 자신감 있었다면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하하 왜요, 매부리코도 매력 있지 않아요? 그래도 요새 예쁘단 소리 좀 듣는데 저."라고 웃으며 받아쳤을 수도 있다. 기분도 하나도 나쁘지 않았을 수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꽤 소심한, 여고생 티를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주 민감하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겉으론 웃고 넘겼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막상 그 어른은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어릴 때부터 내 코가 싫었다. 


초등 고학년쯤부터 모양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 어릴 때는 동글동글 귀여웠던 얼굴이 젖살이 빠져가며 조금씩 모습을 갖춰갔다. 사춘기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내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 갸름하고 코도 버선코처럼 오똑한 아이들이 부러웠다. 피부도 마찬가지. 사춘기에 걸맞게 할 건 다 하는 내 피부는 여드름 역시 피해 가지 않았다. 주변에 보면 사춘기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한창일 나이에도 뾰루지 하나 나지 않고 하얗고 뽀얀 피부로 성장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비결이 궁금했다. 그 애들이 쓰는 로션을 따라 써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지성인 내 피부를 더 번들거리게 만들 뿐이었다.


'예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외모의 척도 중 사춘기 소녀를 가장 스트레스받게 한 건 바로 코였다. 매끄럽게 내려오다가 위로 살짝 솟아야 할 코가 나에겐 없었다. 중간이 살짝 튀어나왔다. 콧대도 높았다. 부드러운 코가 좋은데 내 코는 각이 졌다. 못생겼다. 너무 싫었다. 자연스럽게 옆에서 나를 보는 게 싫어졌다. 모르고 사진이라도 찍힐 때면 그게 너무 신경 쓰였다. 앞에서 보면 그래도 티가 잘 안 나는데, 바로 옆에서 보면 코의 선이 그대로 보이는 게 싫었다. 동화책 속의 마녀 코 같았다. 


나의 로망, 예쁜 코. (출처. 언스플래쉬)



그런데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코를 가지고 놀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에는 그 어른이 처음이었다. 나 혼자만의 아우성이었다. 거울을 한창 달고 살던 사춘기 소녀는 혼자 의식하고, 혼자 괴로워했다. 맘에 드는 남학생이라도 있으면 옆에 앉기 꺼려졌다. 코를 볼 것만 같았다. 사진 찍을 때도 옆모습이 찍히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대놓고 코의 모양과 그런 코를 지칭하는 이름을 친절히 각인시켜 준 분이 바로 그 친척 어른이었다. 무사히 스무 살을 넘겼으나 밥 먹다 들어온 강력한 훅에 그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지금 같았으면 제대로 불쾌한 티를 내거나, 아니면 오히려 능글맞게 뭐 어쩌라고요 식의 농담으로 역공을 했을 텐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날 때면 한 번씩 억울함이 밀려온다. 그러는 그 어른의 코나 그분 자녀의 코들은 매부리코가 아니었기에 내가 기죽었을 수도 있다. 나의 머릿속엔 '매부리코는 못생긴 코야. 못생긴 코는 부끄러운 거야.'라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 지금의 나는, 훨씬 좋아졌다. 살면서 생각보다 내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재수 없을 수도 있지만, 내가 예쁘다는 게 아니다. 나쁘지 않다는 거다.) 설령 '못생기면 어떠랴, 내 마음에만 들면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무 살까지 그 친척 어른 외에는 나에게 직접 공격을 한 자가 없었듯, 그 이후로도 그랬다. 아마도 속으로 생각했겠지만 상관없었다. 다들 누구나 별로인 면은 갖고 있으니까. 매부리코가 나에겐 별로인 부분이듯 누군가는 눈이, 누군가는 입술이 본인의 컴플렉스일 수 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에게 그걸 지적하지 않는다. '어머 친구야, 너 눈이 퉁방울 눈이구나, 입술은 순대 같아.'라고 말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외모에 잘 어우러져 모두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으니까.




인터넷에 '매부리코'라고 검색을 해보았다. 대부분이 성형에 관한 글들이었다. 길에서 보면 이런 코가 많지 않은 것도, 성형을 많이 해서 보이지 않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 수술은 정말 아프다던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게 아니라, 미인이 '되는' 시대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몇 명이 코 수술을 했다. 매부리코를 탈출한 그녀들을 보며,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예뻐졌으니 되었다.


아. 스무 살 이후 그 친척 어른 이외에 한 명 더 있었다. 내 코를 지적한 사람. 지난번 탈모 글에서 언급한 그분이다. 새로 오는 PD가 있으면 그때마다 꼭 짚어줬다. 쟤는 코가 크니까 잘 찍으라고. 젠틀함이나 예의 따윈 없이,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촬영에 필요한 부분이었다면 좀 더 예의를 갖추거나, 조심해서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참 신기하다. 우리 남편은 나에게 한 번도 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뭔가 예의를 지켜준 것 같고, 배려해 준 것 같아서 고맙다. 그래, 외모 가지고 지적하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내가 상처받을 까봐 굳이 얘기하지 않은 게 아닐까. 고마워서 한번 얘기를 해봤다. 사실 나 코에 컴플렉스 있는데, 당신은 그걸 좋게 봐주는 것 같아 고맙다고. 그랬더니 딴짓을 하며 내 말을 듣던 남편이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무심한 듯 말한다. "아 그래? 자세히 보니 그러네, 크게 생각을 안 했어." 


그럼 그렇지, 괜히 감동받았다. 그냥 관심이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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