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취미로 일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는 돈 벌려고 일하는 건 아니니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떠오른 생각은 딱 세 가지. 나는 자아성취를 위해 일을 하는 건가? 아니면 돈이 궁해서? 그것도 아님 둘 다? 처음엔 둘 다였다. 참고로 '처음'은 지금 하고 있는 일만 말하는 게 아니다. 오늘 이야기의 시작은 '결혼 이후'이다.




사실 결혼을 할 때, 나는 회사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결혼 직전 마지막으로 다니던 회사는 내 인생 가장 짧게 몸 담은 곳이었는데, 정말 별로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듯한 이미지를 보고 들어간 작고 알찬 회사였는데, 보기와는 달리 직원들에게 그곳은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직률이 말도 못 하게 높았다. 그래서였을까. 내 나이를 돌아보니 이제 막 스물아홉, 지금이 바로 결혼과 함께 일을 쉴 수 있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어리석었다)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철없던 나의 그 당시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개팅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은 너무나 매력이 넘쳤고, 나의 생각을 현실로 굳히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선사했다. 사람도 좋고, 결혼 상대로도 손색없는 느낌. 서로 그렇게 느꼈고 평생을 약속했다. 그리고 곧 회사를 그만뒀고, 나의 바람대로 '오빠만 믿고' 결혼해 가정에 충실하는 로드맵이 그려졌다. 인생에 레드카펫이 깔린 것 같았다. 남편이 대단한 부자라도 됐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난 사랑에 깊이 빠졌었고, 그야말로 장밋빛 미래만을 꿈꿨다. 자세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다니던 회사가 워낙 힘이 드니, 예비신랑이던 남편도 그만두길 바랐었고(속마음은 잘 모른다), 나 역시 그 이해심에 깊이 감동하며 결혼 후 더 잘하기로 결심하던 것이 떠오른다.


그렇게 마음 편히 일도 그만두고, 조용한 아파트에 자리 잡은 신혼집에서의 하루하루는 한동안 꿀맛이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회사를 그만둔 것이지 '일'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친 것이었다. 집안일이라는 게 저절로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었고, 밖에 나가 돈을 벌지 않고 집에 종일 상주하며 남편을 내조하기로 마음먹은 아내의 역할이 그렇게 뚜렷한 '일'이며 어려운 것인지 생각지 못했다. 너무나 큰 실수였다. 초반엔 괜찮았다. 아침엔 코스트코에서 사놓은 어린잎 채소에 크래미와 치즈를 찢어 넣고 오리엔탈 소스를 한 바퀴 둘러 샐러드를 만들고, 토스트기로 갓 구운 빵을 내놨다. 하염없이 기다린 후 저녁엔 순두부찌개와 불고기, 감자조림, 시금치나물 같은 소박한 식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응용하는 건 어려웠다.


특히 아침 메뉴. 초반엔 남편도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그는 아침에도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섞어서 해줄 걸, 난 내가 편한 대로 간단히 하기 위해, 또 남편도 좋아한다는 착각 아래 열심히 샐러드와 토스트를 내놨다. 조금 지나자 남편은 샐러드를 남기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아예 먹지 않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다.


저녁은 메뉴를 국, 찌개, 메인 등 조금씩 달리했지만 요리에 굉장히 서툴렀고 힘들어했다. 이것 역시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남편은 백반보다는 좀 더 특식류(닭도리탕 같은)를 좋아했고, 중요한 건 나의 몇 배로 요리를 잘한다는 사실이었다. 된장찌개 하나 끓이면서도 레시피를 보고 계량을 하거나 감자조림 하나 해놓고 좋다고 SNS(당시 카카오스토리)에 올리고 앉았으니, 그 철없는 아내를 보고 어땠을까 싶다. 참고로 남편과 나의 나이 차는 일곱 살이다.


출처. 언스플래쉬


그렇게 몇 안 되는 요리들로 돌려 막기 하고, 책이나 인터넷을 보고 따라 하다 보니 알게 됐다. 정말 요리가 재미없었다. 적성에 맞지 않고, 해도 해도 버거웠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일을 나가지 않으니 내 직업은 '주부'이고, 그 역할에 걸맞게 집안일을 잘 해내야 했다. 남편도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잔소리가 늘었다. 그땐 그저 서운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될 텐데 생각했다. 엄마 품에 있다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둥지 밖으로 나온 몸만 어른인 아기새 같았다. 반면 스무 살부터 자취를 하며 생활력이 강한 남편은 정반대의 성향이었으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신랑도 남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면 얼마나 좋을까도 싶었다. 그런 고민들에 쌓여 허둥대던 찰나, 임신을 했다. 결혼 4개월 만이었다.




이후로 쭉- 2년 터울로 아들을 순산하며 전업맘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너무나 감사하게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프리랜서. 이름도 멋들어진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시 결혼 전 하던 일을 하게 되니 아, 나도 아직 죽지 않았구나 자존감이 올라갔고 삶에 활력이 생겼다. 자신 없던 집안일은 여전했으니 아이들이 기관에 간 사이 용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설렜다. 그거 몇 푼 번다고 한 번씩 아이들 봐주러 와주시는 친정 부모님께도 감사했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버는 돈은 적었고, 나가는 날도 적었다. 하지만 내 용돈 정도는 커버되니 뿌듯했고, 생각을 바꿔보면 아이들 유치원비와 학원비도 충당이 되니 제법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려고 정당화하려는 자신과의 대화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사소한 부부싸움 끝에, 그 정도 돈은 벌으나 마나 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잠시 이걸 계속하는 게 맞나 고민한 적도 있었다.(계속하길 잘했다.)


많지는 않더라도 물리적으로 돈을 그만큼 벌긴 버는데 그게 왜 큰 의미가 없는가 생각해 봤다. 게다가 아이들이 원에 간 시간인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돈을 벌기 위해 한 번씩 친정 아빠가 오가신 시간과, 다녀와 피곤함에 지쳐 저녁밥도 대충, 공부도 대충 봐준 날들을 떠올려 보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이해가 좀 간다. 그럼에도 그걸 계속 한 이유는, 내 커리어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힐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조금의 돈 역시, 내겐 여전히 커다란 이유이기도 했다.


'자기는 돈 벌려고 일하는 건 아니니까~'라는 말 역시 이 즈음 들었던 말이었다. 겉보기에 그냥저냥 사는 것 같고 자주 나가지도 않으니 그렇게 말해줬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으론 '돈 벌려고 일하는 거면 어때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묘하게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었다. 돈 벌려고 일하는 거면 문제가 될까, 돈이 목적이 아니고 취미로 일하는 게 멋진 걸까, 별 생각을 다 해 보았다.(원래 생각이 좀 많다) 초반엔 그런 척도 해봤다. 갑자기 내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 집 어려운가 봐' 소리를 들을까 봐였던 것 같다. 나도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서일까, 그 당시의 생각이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누가 저렇게 물어오면 마치 긍정인 듯, 살포시 웃으며 넘기곤 했다.




그렇게 꾸준히 프리랜서로 일하는 삶을 살다 보니, 익숙해졌다. 아이들은 커갔고 더 이상 친정 부모님이 오지 않으셔도 되었다. 나는 조금씩이라도 '일하는' 엄마였기에 전업주부 시절보다 약간의 면죄부가 생겼다. 다른 건 다 웬만큼 잘했지만 유독 약했던 부분이 바로 요리인데, 그 실력은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조금은 나아졌다. 그 사이 일의 형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 지금은 더 다양한 일을 하고, 그때보단 더 많은 돈을 번다.


제목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그렇다. 취미로 일하는 거 아니다. 처음엔 철 없이 살림 탈출을 외치며 일터로 나갔지만 하다 보니 일은 꼭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아이들은 커 가고 물가는 오른다. 내가 주부로서의 일을 정말 잘 해낼 게 아니라면, 이게 맞다고 본다. 어떤 이는 전업주부로서 월 몇백만 원어치의 역할을 해내지만, 나는 일을 해서 그것을 충당하려 한다. 그게 나에게 어울린다. 가계 살림 역시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넉넉하진 않다. 어느 정도 적당히 근근이 살고는 있지만, 기준은 누구나 다르겠지만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더 벌고 싶다. 많이 벌고 싶다.


무언가 계기가 되든 생각이 바뀌든 하여 언젠가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간다면, 정말 힘주어 말하건대 대단히 열심히 역할에 충실해 보려고 한다. 당장은 그럴 일이 없지만, '역할'과 '일'에 대한 나의 개념이 이렇다는 것이다. 일과 살림 모두를 잘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저 존경을 표한다. 멀티가 어려운 나는, 이 정도로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남편을 잘 만났음에 한번 더 감사한다. 아..!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일과 살림 두 마리 토끼 다 잡는 사람이 여기 있었네. 우리 남편. 그럼 남편은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고 있는 거라고 환산해 주어야겠다.


글을 쓰다 보니 반성과 감사의 감정이 물 밀듯이 밀려온다. 이 자리를 빌려 살며시 고마움을 표해 본다.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줘서 고마워, 나도 최선을 다해 볼게!'

-빨래는 잘하지만 요리를 못해 미안한 와이프가-



남편의 요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