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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미만도 독감 수액 맞을 수 있어요

타미플루 부작용에서 해방되다

지난겨울에도 독감이 우리 집을 훑고 갔었다. 지긋지긋한 독감.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전에도 호되게 당했다는 건데, 그럼에도 올해 역시 독감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약한 마음 때문이었다. 재작년까지는 그냥 무조건 고-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어르든 달래든 혼내든 해서 병원으로 끌고 갔었다. 함께하는 마음과 본보기가 되려는 의지로 내가 먼저 맞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부턴 왜 그랬는지, 귀찮아졌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고, 평상시 병치레가 줄어서일까. 내 경계심도 줄어들었다. 왠지 그냥 있어도 감기에 아니 독감에 안 걸릴 것 같았다. 


어떤 엄마들은 심지가 굳다. 자기만의 의견이 확고하다. 백신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누가 물어도 그 하나의 의견만을 내세운다. '우리는 이래서 안 맞춰요.' '우리는 저래서 꼭 맞춰요.' 등. 하지만 최근의 나는 참 애매했다.


우리 아이들은 주사를 무서워한다. 물론 나도. 10월쯤엔 주변에 누군가 걸렸다는 말에 아이들도 약간의 설득에 바로 맞겠다고 했다. 그래 내일 가자, 했다. 하지만 막상 그날 나는 바빴고, 아이들 하교 시간이 되자 귀찮아졌다. 다음에 맞추지 뭐. 며칠 후 한 아이가 가벼운 감기에 걸렸고, 또 그 핑계로 때를 놓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도 점점 '와, 이거 분위기가 주사 안 맞고 슬쩍 넘어갈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젠 화내고 어르고 달래도 아이들이 거부했다. 그래도 내가 조금만 더 압력을 넣으면 데려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재작년까진 매년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바쁘고 정신없단 핑계로 아이들을 세밀하게 챙기지 못했다. 작년의 아픔을 잠시 잊었고 사람이 아프면 얼마나 힘든지도 망각했다. 역시,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출산의 고통을 잊고 또 아이를 낳는 엄마처럼.




작년에 우리 집 남자 셋이 다 걸려도 나만 살아남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내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바빴던 한 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올 겨울은 유독 모임이 잦았다. 그날도 오래전부터 약속해 둔 송년 모임이 있었고, 자유부인이 되어 룰루랄라 놀고먹고 들어오는 길, 그분이 오셨다. 오한이 시작된 것이다. 너무 즐겁게 수다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나왔는데 이럴 일인가. 겨울치고 말도 안 되게 포근해진 기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추웠다. 몸이 덜덜 떨리고, 팔다리가 쑤셔왔다. 익숙한 느낌. 아, 몸살이구나. 지하철에서 내려 편의점 상비약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고, 주말이라 게임하느라 엄마를 하나도 기다리지 않은 아이들에게 대충 인사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씻으니 좀 나아지는 것도 같았으나 그때뿐이었다. 가져온 약을 털어 넣고 전기장판 다이얼을 한껏 돌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아이들 열날 땐 다 벗기곤 했는데, 그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성인은 정반대로 땀을 쫙 빼야 하니 이불을 덮어야 한다는 민간요법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10년 쓴 체온계도 하필 얼마 전 고장이 나서 비접촉식으로 샀는데 실패다. 체온이 제대로 재어지지가 않는다. 열이 펄펄 나는 게 분명한데 36.5도도 아닌 36.4도란다. 하다 하다 결국 집어던지고, 느낌으로 하기로 한다. 새벽 내내 열이 올랐다 내렸다, 몸이 하도 춥고 쑤셔서 기역자로 구부리고 괴로워하며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하필 일요일. 병원도 문을 닫는 빨간 날이었다.


왜 자꾸 그런 날만 골라서 아플까, 생각하며 이전에도 일요일에 문 연 병원을 찾아 헤맨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집 근처 365일 하는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럴 땐 남편이 있어 참 든든하다. 부부의 역할은 특히 아플 때빛을 발한다. 평소에 아무 소용없다 구시렁대던 사이도 아플 때는 장사 없다. 서로에게 의지한다. 특히 육아 중인 부부라면. 한 명이 아프면 한 명이 아이들을 온전히 책임진다. 아픈 상대까지도. 여하튼 그런 남편과 함께 병원을 몇 시간을 돌았다. 출발해서 전화를 돌려보니 아침 11시임에도 벌써 오전 접수는 마감인 곳이 많았고, 그중 한 곳은 주차까지 하고 올라갔으나 오후 접수는 받지도 않는다, 2시 넘어 다시 몸소 찾아오라는 쌀쌀맞은 대답만 돌아왔다. 돌아보니 아픈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로비에 한가득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약간... 피난 가는 모습 같았다. 


충격을 받고 다시 돌다 돌다 옆 동네까지 흘러들었고, 거기서도 오전진료는 끝났으나 오후 진료를 접수해 놓고 갈 수 있다는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와우, 감사합니다. 당장 접수 올릴게요. 초진 접수 입력을 해두고 이따가 언제쯤 오면 좋겠냐 하니 대기가 40명이니 오후 4시쯤 오시란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진료만 받을 수 있다면요.


결국 나의 진료는 4시가 아닌 5시 30분이나 되어 시작됐고, 그렇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독감+코로나 키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괜히 실망감이 더해졌다. 내가 실망한 이유는 1번, 독감 양성이 안 뜨면 검사비 실비처리가 안 되어서. 2번, 독감이라도 딱 걸려야 확실히 약을 먹든 수액을 맞든 치료를 하고 가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코 점막이 많이 부었다는, 그래서 검사 면봉도 잘 안 들어갔다는 피드백을 받고 진해거담제 등을 잔뜩 처방받아 돌아왔다. 진통 해열제도 함께.


그날 밤 역시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같이 자던 둘째도 저쪽 방으로 보내 버리고 혼자 침대를 구르며 맘껏 아파했다. 평소 잘 찾지 않던 하나님을 더 애타게 부르고, 기도를 하게 됐다. 이럴 때만 이러니 안 도와주시지, 그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입이 아니라 머리가 살아있다 해야 하나. 그 아픈 와중에 자기반성이라니. 


다음 날은 월요일, 평일이었다. 하아. 출근도 해야 하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야 한다. 고통으로 설친 잠을 몰아내며 아이들 가방을 챙겨주고, (알아서 하게 둬야 하는데 어떡하나) 물통에 물을 채워 넣어주고, 입을 옷을 골라놨다. 그리고 아침은 신랑에게 부탁하며 장렬히 쓰러져 다시 쪽잠을 잤다. 아. 그전에 시리얼 2숟가락 정도 먹고 약을 먹고 쓰러졌다. 다시 오른 열과 몸살 때문에, 9시 출근을 하려면 8시에는 약을 먹어둬야 약효가 생길 터였다.


철저한 계산 끝에 9시 근무는 차질 없이 시작됐고, 재택의 소중함을 느끼며 이래서 아플 땐 재택이 최고야라고 중얼거렸다. 너무 아파지면 중간에 말씀드리고 쉬려 했으나 오히려 앉아서 손만 움직이고 머리만 굴리는 정도는 내 척추가 받쳐주는 한 할만했고, 3시간은 생각보다 후딱 지나가 퇴근시간이 되었다. 와우 성공.  아픈 날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고 출근해 줘 고맙다 말해주는 상사들 덕에 마음이 보듬어져 더 좋았던 것 같다. 역시 사람은 마음을 만져주면 힘이 난다.


월요일이니 일반 병원이 문을 연다. 유료로 바뀐 똑딱 앱에 천 원을 결제하고 예약을 걸었다. 오전 진료 접수는 역시 마감. 오후진료를 가야겠다. 설마 어제 같은 일은 없겠지, 여기 동넨데. 


하지만 그날은 주말 동안 아픈 사람이 몰려 넘쳐난다는 바로 그 악명 높은 '월요일'이었다. 이 날의 진료 역시 오후 늦게야 가능했고, 하지만 예약 어플 덕에 제법 수월하게 가서 진료를 보고 올 수 있었다. 나의 병명은 예상대로 독감. 어제는 너무 초기라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늘 그런다. 병원에서 하자고 해서 하는 건데도 그런다. 그냥 아파도 하루이틀 참고 가야겠다 이제. 독감 확진이니 예전처럼 수액을 맞고 가야지. 타미플루 대신 링거로 수액을 맞으면 5일간 꼬박 10알의 약을 삼키지 않아도 되다. 후, 얼른 놔주세요. 아, 수액이 지금 없습니다. 환자가 너무 많아서 일주일째 주문해도 들어오지 않네요. 네? 뭐라고요. 안되는데, 아... 어쩔 수 없네요. 이렇게 결국 나는 터덜터덜 약봉지만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오고 또 하루를 앓았다. 아... 별 효과가 없다. 정말 아픈 월요일이었다.


월요일 밤 역시 전날과 다를 게 없었고, 화요일 오전, 난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어제처럼 시간 맞춰 약을 먹을 기운도 없고, 타이밍도 안 맞았다. 그냥 너무 아팠고, 대표님께 연락해 하루 병가를 냈다. 우리 천사 같은 대표님과 본부장님은 걱정하시며 얼른 푹 아무 생각 말고 쉬라고 했고, 감사하게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그러다 11시쯤, 문득 생각이 나서 병원에 전화를 했다. 몸살 수액이라도 맞을 수 있냐고. 그렇단다. 휴.. 그럼 어제 좀 추천을 해주시지. 말이 없다. 일단 오란다. 출발했다. 


화요일이 되니 병원은 제법 한산했다. 어제 그 바글대던 사람들은 약을 받아가 다들 쉬고 있나 보다. 다행이다 외치며 몸살 수액을 맞았다. 그러던 중 간호사님이 들어오신다. 내일 들어오려던 독감치료수액이 지금 막 들어왔는데 이거 맞고 그것도 추가로 맞으시겠냐고. 타미플루 2알을 이미 어제 먹었지만 괜찮단다. 이거 맞고 집에 가서 그 약은 더 이상 먹지 않으면 된단다. 오케이! 놔주십시오. 그렇게 나는 연달아 두 통의 수액을 흡수했고, 집에 오는 길은 제법 또렷한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몸살은 없었다. 정말 신기했다. 열은 났으나 수액 맞기 전과 같은 몸살, 즉 근육통은 없었다. 그게 몸살 수액 덕분인지 독감 치료 수액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좋았다. 하지만 목아픔과 코막힘의 고통이 시작됐다. 간사한 인간인 나는, 몸살만 없애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라던 기도를 다 잊고 코가 막히니 미치겠습니다를 시작했다. 코와 얼굴 전체에 압력이 가해지는 듯했다. 누우면 압력이 더 세져서 숨을 아예 쉴 수가 없었다. 입으로 쉬는 건 너무 답답했다. 목도 아팠다. 어지러웠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그 사이 수요일 오후엔 둘째가 열이 나기 시작했고, 바로 찾아간 병원에서 독감+코로나 키트 음성이라 역시 빠꾸. 목요일 하루 참고 금요일엔 나와 같은 B형 독감 확진을 받았다. 불쌍한 것, 엄마한테 옮았구나. 어쩔 수 없지만 안쓰러웠다. 작은 몸을 떨며 괴로워할 땐 내가 대신 다시 아파주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들 정도였다.


독감 치료약인 타미플루를 처방받을 땐 항상 같은 '경고'를 받는다. 

"30분 이내에 토하면 다시 드시고요, 30분 이후에 토할 경우엔 다시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의 경우 특히 환청이나 섬망 같은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꼭 보호자가 함께 계셔야 하고요."

하도 들어 외올 것 같은 이 멘트, 올해엔 알약이 아닌 시럽으로 받아와서일까, 아이가 토를 한다. 30분이 지나 토하긴 했지만 덕분에 이불과 베개를 다 빨았다. 나도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다 나으면 싹 빨아야지 했던걸 졸지에 아픈데도 이불을 빠는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어린이 수액을 알아봤다.



우리가 다니던 곳은 10세 이상만 놔준다고 했고, 동네에 되는 곳을 찾았다. 토요일 아침, 3번째 환자로 입성해 당당히 인생 첫 링거를 맞췄다. 이제 좀 나아지겠지, 그간 많이 호전된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이도 표정이 좋았다. 용감한 내 새끼.




지금이 토요일 밤이다. 아까 오전에 독감 치료 수액을 맞췄으니, 오늘 오후는 편안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닌가 보다. 병이 길어지려는지, 타미플루 복용의 의무는 벗어났으나, 열이라는 놈이 자꾸 습격을 한다. 4시간 간격 꼬박꼬박 열이 나고 있다. 났다 하면 거의 40도에 육박한다. 해열제가 드는 속도도 늦어지고, 엊그제만 해도 해열제를 먹이면 한 시간 내로 땀을 쭉 빼며 열이 내리던 게 이젠 땀도 안 나고, 드라마틱하게 체온이 정상을 찾지도 않는다. 그냥 좀 내려간다. 적당히. 이래도 되나 걱정하며 자는 아이 옆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나, 벌써 한 시간째 쉬지 않고 써내려 가고 있다. 무슨 독감 걸린 일주일 간의 이야기를 술술 줄줄 이렇게 써 내려가나 싶지만, 이 또한 이번 한 주를 통으로 날린 나의 기록, 이 일주일이 결코 '날려버린' 것이 돼버리지 않게 하겠다는 무언의 항의 같은 것 같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글로, 기록으로 남으면 그래도 이 시간도 나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겠지. 허공의 글로라도 이렇게 세상에 남겠지 싶다. 


한가하게 별 계획도 없이 살던 내가 요즘은 정말 하루하루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다. 특히 11월 1일부턴 주 3회 꼬박 운동까지 챙겨가며, 유튜브도 쉼 없이 꾸준히 주기적으로 올리고, 매일 출근에, 글도 연재하고 아주 쪼개고 쪼개며 살아 봤다. 그러고 얻은 건? 독감. 그리고 깨달음.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여유로운 일상을 다시 느껴보고, 아이들을 좀 더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되는 깨달음의 시간. 몸이 아파서 운동은 이미 시작한 상태니 그건 되었고, 책은 종종 읽으니 그것도 되었다. 시간을 잘 쓰는 법, 효율적으로 쓰고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며 바쁜 사람이 되어야겠다. 바빠도 늘 여유 있어 보이는 고수들처럼, 그걸 흉내가 아닌 진짜 내가 깨달아 몸에 익혀두고 싶다. 


지난주에 빌려와 아파서 제대로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책 '원씽'에서 말하는 것처럼, 바쁘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단 한 가지에 집중해서,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삶을 살아보자. 지금 너무 바쁘고, 정신없고, 늘 힘들고 피곤한 당신! 함께하자. 단 하나만 우선 찾아, 그것부터 해보자고 손을 내밀어 주고 싶다. 안 그러면 나처럼 이렇게 갑자기 일상을 잃을 수도 있다고. 실속 하나 못 차리고, 뭐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바쁜 척만 하다가 너무 아파 혼자 다 포기한다면, 그 얼마나 쑥스러운 일이냔 말이다.


아이가 잘 잔다. 예쁘다. 나도 이제 얼른 마무리하고, 아이 이마를 좀 더 짚어 보며, 사랑을 주는 밤을 보내야겠다. 오늘 밤은 제발 열이 더 오르지 않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휴, 앞으로도 기도 열심히 할게요.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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