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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세수를 하며 하는 생각

나에겐 대단한 결심

찬물이 싫다. 더울 때 차가운 물을 마시는 건 괜찮은데 찬물이 몸에 닿는 것은 진절머리 나게 싫다. 아침마다 세면대에서 물을 틀고, 적어도 미지근한 물이 조금이라도 섞여나오길 (때로는 한참을)기다린다.


삼 년 전쯤인가, 캠핑장에 갔었다. 바닷가의 오래된 캠핑장이었는데, 시설마다 세월의 흔적이 많았다. 저녁이 되어 샤워실을 찾았다. 입구부터 애매했다. 나무로 된 신발장이 있었는데 모래 투성이에 쓰레기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더 놀라웠던 건, 그것이 신발장 겸 물품보관대라는 사실이었다. 너무 더러운 나머지 여기서 옷을 벗어야 하는 건가, 그럼 어디에다가 올려두지, 누가 소지품을 가져가는 건 아닌가, 보안이 허술한데 남자라도 훅 들어오는 건 아닌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모녀가 들어왔고, 자연스레 나를 제치며 수다를 떨면서 훌렁훌렁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분명 이들은 여기 한두 번 방문한 게 아닐 거야, 속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옷을 벗고 주섬주섬 물건을 놓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무 자리나 거침없이 찾아 들어가 쏴- 샤워기를 틀고 금방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반대로 겨우 겨우 안전한(누가 불쑥 들어와도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자리한 나는 샤워기를 틀고도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었다. 물이 차가웠기 때문이다.


출처. 언스플래쉬


낯선 곳에서의 낯선 시설과 차가운 물. 모두 '이를 어쩌나'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모습과 이질적으로 어우러졌다. 빙글빙글 도는듯한 그곳에서 나와 반대로 거침없이 내지르는 모녀를 보며, 잠시 멋지다는 생각까지 했으니.


결국 난 조금은 느리지만 차근히, 무사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그 모녀는... 이미 본인들의 텐트로 간지 오래였다. 텐트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 상황을 한참을 떠들었고, 남편은 오히려 그 모녀와 비슷한 성향이기에, 나의 말을 그냥 듣고 흘리기만 했던 기억이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할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얼마 전, 그러니까 작년 여름쯤부터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아침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기다리지 말고 씻어보자."


누가 보면 엄청 황당한 결심일 수도 있다. 일부러 또는 어쩔 수 없이 그리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대단한 결심이었고, 성공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타박하시겠지만(그 옛날엔 따뜻한 물 없이 잘들 씻었다고) 나에겐 다르다. 두려워하던 걸 깨는 기분, 밤새 묻은 이불속 온기를 확 떨쳐 버리는 기분.


그렇다고 찬물로 손도 못 씻고 하는 건 아니다. 그저 갑작스러운 일을 접할 때 일단 망설이는 나만의 벽을 깨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 상징으로 아침 찬물 세수라는 도전을 하고 있다. 물론, 피지와 기름기 제거엔 따뜻한 물이 필수라 저녁 세안과 샤워는 온수로 하고 있다.


오늘도 아직 가시지 않은 잠을 깨울 겸, 나만의 벽을 깰 겸 틀자마자 나오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오늘도 시작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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