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의 숲>
사슴이 내려간 뒤, 숲은 다시 잠잠해졌어요.
하지만 그 잠잠함은 평화가 아니었어요.
말하지 못한 말들이 바람 속에 쌓이며 만든 정적이었죠.
동물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리를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
사슴을 이해한 자와 실망한 자
사이엔 보이지 않는 금이 가 있었어요.
그 틈을 비집고 한 마리 큰까마귀가 돌판에 올랐어요.
깃털은 반짝였고 목소리는 또렷했으며 말은 단단히 내려꽂혔죠.
"숲은 더 이상 흔들려선 안 됩니다.
말 많고 복잡한 시대는 이제 끝입니다.
숲의 규칙을 회복하겠습니다."
동물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의 말은 명료했고 혼란은 피로했으니까요.
"이번엔 명확해."
"혼란은 끝날 거야."
"질서가 필요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큰까마귀는 돌판에서 말했어요.
"누구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숲을 어지럽힌다면 곤란하겠죠.
선 넘는 말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바라봤어요.
"선이 어디지?"
"뭘 하면 안 되는 거야?"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었어요.
그날 이후, 나뭇가지 아래 말 많던 새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어요.
말소리가 줄었어요. 새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지저귀지 않았어요.
동물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어요.
"저 새, 어디 갔지?"
"말하다가 사라졌어."
큰까마귀는 돌판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깃털을 돌판 곁에 꽂았고
검은 털빛의 짐승들을 높은 가지마다 앉히기 시작했죠.
그 뒤로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말은 가지에 닿지 않았고
오직 위에서 내려오는 말만이 숲을 메우게 되었어요.
어느 날 저녁, 나뭇잎 아래 모인 동물들이 속삭였어요.
"뭔가... 이상해지고 있어."
"처음엔 명확했는데."
하지만 누군가는 말했어요.
"그래도 전보단 나아."
"혼란스럽진 않잖아."
그 무렵, 숲 가장자리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회색곰이었어요. 무거운 기척, 말없는 눈빛.
그 곁엔 발톱을 드러낸 짐승 몇이 있었죠.
회색곰은 성큼성큼 돌판 근처로 다가왔어요.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한 동물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어요.
다람쥐였어요. 몸은 작았지만 멈추지 않았어요.
그 옆으로 토끼가 섰고 그 옆으로 족제비가 섰어요.
하나, 둘, 셋.
동물들이 어깨를 맞대기 시작했어요.
말은 없었지만,그들은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회색곰은 어쩔 줄 몰라하며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아무 말없이 돌판에서 돌아섰어요.
그의 발소리는다시 숲 가장자리로 사라졌어요.
동물들은 그 자리에 남았어요. 하지만 공작 때와는 달랐어요.
"우리가 해냈어!"라는 환호는 없었어요.
대신 무겁고 어두운 정적만이 흘렀죠.
그리고 그날 밤부터 숲은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큰까마귀를 믿었던 동물들 중어떤 이들은 더 목소리를 높였어요.
"회색곰을 막은 게 잘못이야."
"큰까마귀는 잘못 없어."
"오히려 저들이 문제야."
그들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고 눈빛은 차가워졌어요.
또 어떤 이들은 말없이 숨었어요.
"내가 잘못 봤나..."
"하지만 인정할 수 없어."
그들은 눈을 피했고 숲 구석에 웅크렸어요.
또 어떤 이들은 분노했어요.
"우리를 속인 거야?"
"믿었는데..."
그 분노는 큰까마귀가 아닌 반대편 동물들을 향했어요.
반대했던 동물들도 달라졌어요.
어떤 이들은 조롱했어요.
"봤지? 우리 말이 맞았잖아."
"이제 알겠어?"
그들의 말은 상대를 더 자극했어요.
어떤 이들은 응징을 원했어요.
"끝까지 책임져야 해."
"따라갔던 동물들도 마찬가지야."
포용은 없었어요. 용서도 없었어요.
중립이었던 동물들은 더 혼란스러웠어요.
"양쪽 다 무섭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해?"
그들은 선택을 강요받았고
어느 쪽을 택하든 다른 쪽의 원망을 샀어요.
날이 갈수록양쪽의 말은 더 거칠어졌어요.
"저들은 숲을 망쳤어."
"저들은 배신자야."
"저들과는 같은 숲에 살 수 없어."
서로를 향한 말들이숲을 가득 메웠어요.
큰까마귀는 여전히 돌판에 있었지만
동물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어요.
서로만 바라보며 서로를 원망했어요.
얼마 뒤 큰까마귀가 돌판에 오르려 했을 때 돌판이 낮게 울렸어요.
그 울림은 모든 동물들의 가슴속에 닿았어요.
그가 다시 발을 디디자, 돌판은 둔탁한 소리로 대답했어요.
그건 환영이 아니라 거절의 소리였어요.
그는 중심을 잃었고 날개를 퍼덕였지만 제대로 날아오를 수도 없었어요.
깃털은 무거웠고 돌판은 조용했지만 단호했어요.
그날 이후, 그는 돌판에 다시 오르지 않았어요.
다만 숲의 한 귀퉁이에서 돌판을 지켜볼 뿐이었어요.
하지만 큰까마귀가 물러난 뒤에도 숲은 하나가 되지 못했어요.
동물들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말을 뱉고 있었어요.
"저들 때문이야."
"아니, 저들 때문이야."
누구도 상대의 말을 듣지 않았고,누구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 숲에는 다시 말들이 오갔지만 그 말들은 서로를 향하지 않았어요.
"그는 틀렸지만, 그래도 혼란을 멈추려 했잖아."
"혼란은 그가 만들었어. 잊었어?"
그 말 위에 말이 겹치고 겹친 말들 아래서로를 향한 신뢰는 사라졌어요.
숲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그 속의 동물들은 더 이상같은 숲을 바라보지 않았어요.
올빼미는 동물들을 보여 나직이 속삭였어요.
"큰까마귀 이전에도 숲은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숲이 하나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는 다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희망을 얘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회색곰을 막아선 날 밤
우리는 각자 다른 길로 들어섰고
그 사이에 아무도 건너지 않는 빈 땅이 생겨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