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를 나누는 숲>
공작이 떠난 뒤,
숲은 한동안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전과 달랐어요.
조약돌은 아직 돌판 아래 쌓여 있었고,
동물들은 그 앞을 지나며 중얼거렸어요.
"우리가 해냈어."
"이번엔 우리 손으로 고른 거야."
"조약돌로 우리 뜻을 보여줬잖아."
숲에는 묘한 자신감이 돌았어요.
두려움이 아닌, 기대였죠.
"이번엔 달라."
"조금 더 따뜻한 짐승이 올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사슴이 숲 끝자락에서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는 천천히 걸어왔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숲을 둘러봤어요.
동물들은 수군거렸어요.
"조금 느리지만 괜찮아."
"눈빛이 다정해."
"이번엔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아."
사슴은 돌판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 위로 조심스레 발을 올렸어요.
말은 없었지만,
숲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죠.
그리고 사슴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어요.
동물들을 향해.
그 순간, 숲은 환호했어요.
"봤어? 고개를 숙였어!"
"공작은 한 번도 안 그랬는데!"
"이번엔 진짜 다른 거야!"
한동안 숲은 평온했어요.
사슴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동물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어요.
"요즘 어떻습니까?"
"불편한 건 없으신지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어요.
동물들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말은 적지만, 진심은 느껴져."
"이런 게 우리가 원하던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숲에 이상한 냄새가 돌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날씨 때문이겠지."
"금방 지나갈 거야."
하지만 며칠 뒤,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작은 동물 하나가 쓰러졌고,
다음 날엔 둘이 더 쓰러졌어요.
일주일이 지나자,
숲은 공포에 휩싸였어요.
"이게 뭐야?"
"왜 이러는 거지?"
"나도 걸릴까 봐 무서워."
동물들은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어요.
가까이 다가오면 물러섰고,
눈을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어요.
"너 기침했어?"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병은 빠르게 퍼졌어요.
아침에 멀쩡하던 동물이
저녁엔 쓰러져 있었어요.
숲은 조용해졌지만,
그건 평화가 아니라 두려움이었어요.
나뭇잎 아래에서 누군가 중얼거렸어요.
"이건... 전쟁보다 무섭다."
"전쟁은 어디서 오는지라도 알았는데, 이건..."
그때, 사슴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는 병든 동물들을 찾아다녔어요.
멀리서 지켜보고,
먹이를 가져다주고,
깨끗한 물을 떠다 주었어요.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처음엔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어요.
"사슴도 병에 걸리면 어떡해?"
"우리까지 위험해질 텐데..."
하지만 사슴은 멈추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 날,
한 동물이 조심스레 나섰어요.
"나도... 돕겠어."
다음 날엔 둘이 더 나섰고,
그다음 날엔 셋이 더 나섰어요.
병든 짐승이 혼자 있지 않도록,
멀리서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생겨났죠.
한 달이 지나자,
병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어요.
기침 소리가 줄어들었고,
쓰러지는 동물도 없었어요.
동물들은 조심스레 서로를 바라봤어요.
"...우리, 이겨낸 거야?"
"함께 버텨낸 거야."
그날 밤, 나뭇잎 아래에 모인 동물들은
속삭이듯 말했어요.
"말은 적지만, 마음은 있었어."
"아무 말 없이도 우리를 지켜줬어."
사슴의 곁에 머무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병이 가라앉자 새로운 문제가 고개를 들었어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바람은 차가워졌고,
나뭇잎은 떨어졌고,
먹이는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은 겨울을 준비해야 했어요.
보금자리를 구하고 먹이를 모아야 했죠.
하지만 보금자리도 먹이도 부족했어요.
처음엔 조용했어요.
서로 눈치를 보며 각자 알아서 준비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이 들어갈 자리가 필요해."
"먹이도 더 필요해."
"우리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필요하지."
어느 날, 나뭇잎 아래 모인 동물들이
사슴에게 물었어요.
"누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하나요?"
"먹이는 어떻게 나눠야 하나요?"
사슴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어요.
"공평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그 말에 동물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공평하게."
"그래, 그게 맞아."
사슴은 그 순간 알지 못했어요.
그 한마디가 스스로를 묶을 거라는 것을.
며칠 뒤, 늙은 짐승들이 먼저 움직였어요.
굵은 뿌리 아래 자리를 잡고,
먹이를 모으기 시작했죠.
"사슴이 공평하게 하래."
"그럼 나이 순이지. 그게 공평이야."
"우리가 숲을 지켜왔으니까."
젊은 동물들이 중얼거렸어요.
"공평하다면서..."
"미래가 있는 우리가 먼저가 공평 아냐?"
"늙은 짐승들은 이미 충분히 살았잖아."
병을 심하게 앓았던 동물들도 말했어요.
"우리가 제일 힘들었어."
"고통받은 이들을 우선하는게 진짜 공평이지."
"먼저 회복해야 하는 건 우리야."
병을 안 겪은 동물들도 불만이었어요.
"조심해서 안 걸린 건데."
"그게 상을 줄 일이야? 그것도 공평이라고?"
가장 어린 짐승들은 뒤로 밀려나며 중얼거렸어요.
"우린 또 기다려야 하나 봐."
"결국 우린 또 나중이야."
사슴은 그제야 깨달았어요.
"공평"이라고 말한 순간,
모두가 자기 방식대로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을.
늙은 동물에게 공평은 나이 순이었고
어린 동물에게 공평은 미래 순이었고
병든 동물에게 공평은 고통 순이었어요.
모두가 "공평"을 외쳤지만,
그것은 "나에게 좋은 나눔"을 뜻했어요.
사슴은 한밤중에 홀로 숲을 걸으며
중얼거렸어요.
"모두의 공평이 다르다... 누구의 공평을 택하든
다른 이들에겐 불공평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며칠을 고민했어요.
이쪽의 공평을 들으면 저쪽이 불만이었고,
저쪽의 공평을 들으면 이쪽이 불만이었어요.
결국 사슴은
가장 필요한 이들을 먼저 챙기기로 했어요.
병을 심하게 앓은 동물들,
새끼를 키우는 동물들,
늙고 움직이기 힘든 동물들.
"이들이 가장 절실합니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자마자
곳곳에서 불만이 쏟아졌어요.
사슴은 그들 앞에 섰어요.
입을 열려다, 다물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더 마련하겠습니다."
하지만 불만어린 짐승들의 눈빛은 차가웠어요.
"또 기다리래."
"공평하다면서."
겨울이 깊어지는 동안,
사슴은 결정을 자꾸 되돌렸어요.
"이번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 그건 불공평해."
"그럼 이렇게?"
"그것도 불공평해."
사슴은 다시 고민했어요.
모두가 만족할 완벽한 균형을 찾으려 했어요.
하지만 그런 방법은 없었고
결정을 미루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어요.
겨울은 깊어졌고 바람은 차가워졌어요.
사슴이 나누어준 자리와 먹이는
결국 충분하지 않았어요.
어떤 동물들은 따뜻한 자리에서 겨울을 났지만
다른 동물들은 추위에 떨었어요.
또 어떤 동물들은 배불리 먹었지만
나머지는 굶주리기도 했지요.
누군가 중얼거렸어요.
"차라리 빨리 결정했으면..."
"싸우다가 시간을 다 보냈네."
그날 이후 숲 어귀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어요.
"병은 이겨냈는데, 그다음은?"
"공평하다고 했는데, 왜 우린 굶고 있어?"
"왜 우린 추운 데 있어?"
"결국 누구 편이야?"
처음엔 말이 오갔고 그다음엔 고개가 돌아섰고
이제는 같은 방향을 보지 않게 되었어요.
자리를 얻은 동물과 얻지 못한 동물,
먹이를 받은 동물과 받지 못한 동물,
사슴을 이해하는 동물과 실망한 동물.
그렇게 숲은 나뉘기 시작했어요.
계절이 세 번 바뀌고 사슴은 조용히 돌판에서 내려왔어요.
많은 이들이 그를 배웅했지만 또 많은 이들은 그 자리에 없었어요.
사슴은 천천히 숲을 걸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어요.
"숲이 내 발자국 없이도 길을 낼 수 있기를..."
그의 발자국은 며칠 동안 지워지지 않았고
어떤 이는 그 길을 따라 걸었고
어떤 이는 그 옆에 다른 길을 냈어요.
숲은 다시 길 위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올빼미는 그때를 '나뉨의 계절'이라 불렀고,
이따금 밤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되새겼어요.
"사슴은 많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병이 돌 때 곁을 지켰고
겨울에 자리를 마련하려 했지요.
그의 마음은 따뜻했고,
그의 뜻은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평'을 약속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선한 말처럼 들렸지요.
하지만 그 말은 숲을 하나로 묶는 대신 더 깊이 갈라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