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놓치기 쉬운 게임 안의 진짜 문제
네덜란드의 사상가 호이징아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정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자율적인 규칙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실과는 다른 질서를 갖는 특별한 세계라고 말했다.
참여자는 그 세계 안에서 경쟁하고 협동하며, 창의성과 인내를 기르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임한다는 점에서 놀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내가 처음 게임을 접했을 때도 그랬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으니
1999년이나 2000년쯤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PC게임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
규칙은 명확했고, 그 안에서는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라왔다.
전략을 세우고 반복해서 도전하면 어느 순간 막혔던 벽을 넘는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성취는 현실에서 얻기 어려운 종류의 쾌감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게임의 순수성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게임이라는 공간 안으로 현실
더 정확히는 돈이 들어왔다.
게임의 승패나 성장, 보상의 핵심은 이제 과금 여부에 달렸다.
‘페이 투 윈(Pay to Win)’이라는 구조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특히 한국 게임 시장에서는 그것이 게임 설계의 기본 전제가 되어버렸다.
과거의 게임이 플레이의 재미와 성취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얼마나 돈을 썼느냐가 게임 안의 서열을 가른다.
리니지처럼 몇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을 과금한 유저가
서버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재미가 줄었다’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적으로도 매우 유해한 구조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게임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가상 경험 시스템이다.
자기 효능감, 인내심, 규칙 이해력 등을 실험해 보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돈을 쓰면 이긴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접하게 된다면
아이는 공정성 대신 자본의 위력을 먼저 배우게 된다.
노력이 아니라 소비가 보상을 결정하는 세계
그런 게임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현실보다 더 왜곡된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다.
문제는 모바일 게임에서 더욱 심각하다.
많은 부모들이 모바일 게임을 ‘무료’라는 이유로 쉽게 허용한다.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기기를 따로 사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바일 게임은 본질적으로 ‘무료’가 아니다.
광고를 보는 것이 기본 전제다.
한 판을 마칠 때마다 20초짜리 광고를 강제로 시청해야 하며
캐릭터 부활이나 아이템 보상을 위해 2~3회 연속 광고를 봐야 하는 경우도 많다.
광고 내용은 대부분 자극적이다.
선정적인 이미지, 사행성 요소, 과도한 소비 유도가 포함되기 일쑤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10분 중 상당부분을 광고 시청에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집중력과 주의력을 끊임없이 팔고 있는 구조다.
이쯤 되면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예 게임을 못 하게 해야겠네요.”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극단이다.
게임은 이미 아이들의 문화이고, 소통 방식이며, 정체성의 일부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억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게임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게임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구분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게임은 PvP(다른 사람과 경쟁)인가, PvE(컴퓨터와 협동)인가?
페이 투 윈 구조인가, 아니면 실력과 전략으로 승패가 갈리는가?
게임의 플랫폼은 모바일인가, PC/콘솔인가?
게임 안에서 익명 유저들과의 접촉은 어느 정도이며, 그 속에서 어떤 언행이 오가는가?
싱글플레이 게임이나 협동이 없는 PvE는 보통 언제든지 저장하고 게임을 끌 수 있지만 PvP는 게임이 진행 중일 때 종료하면 패배하기 때문에 빨리 끄라고 독촉하다가 갈등을 빚을 수 있다.
또한 온라인 PvP 게임은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게임의 재미보다 상대방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조차도 롤(LoL) 같은 게임에서 욕설, 성적 모욕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
실력보다 화를 내는 능력이 더 중요한 기술처럼 받아들여지는 공간.
그게 요즘 일부 게임이 제공하는 ‘사회성’의 실체다.
물론 모든 게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콘솔 게임이나 패키지 기반의 PC 게임은 여전히 플레이 중심의 게임 설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탐험, 관찰,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구조를 갖고 있고,
마인크래프트는 창의력, 공간 설계, 협동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이런 게임들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몰입적 학습 공간이다.
그리고 부모가 관심을 가진다면 충분히 교육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매체다.
부모가 게임 전문가일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그 게임은 어떤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만큼은 알고 있어야 한다.
게임을 막을 수 없다면
게임을 구분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아이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