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는 플라톤을 닮았다

by 미냉

요즘은 어디서든 MBTI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개팅 자리, 직장 워크숍, 유튜브 댓글, 심지어 정치인들의 토론자리에서도.

“혹시 MBTI가 뭐예요?”
“저요? ENFP요.”
“아~ 그러실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그 짧은 대화만으로 안도한다.
무언가를 안다는 느낌,
이미 정리된 사람을 마주한 듯한 착각.
이해라기보다는, 분류에 가까운 접근이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문득 플라톤을 떠올린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둘로 나누는 방식’을 택한 철학자였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 현실과 이데아.
이렇게 세계를 이원화해서 바라보면 혼란스럽던 대상들이 질서를 갖는다.
보이는 세계는 불완전하고 변덕스럽지만,
그 너머에 본질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플라톤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이라 보았다.

플라톤

그의 이런 생각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 사고방식의 뿌리를 이뤘다.
우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정신은 고귀하고 주체적인 것이고
육체는 수동적이며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인식을 갖는다.
지배하는 정신과, 따라야 할 육체.
위계는 자연스럽고 구분은 명확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존재다.
감정을 느낄 때 몸이 먼저 반응하기도 하고,
반대로 몸이 지칠수록 판단력과 사고력은 흐려진다.
가슴이 두근거리면 생각도 빨라지고,
몸이 아프면 철학도 멀어진다.
정신이 육체를 일방적으로 지배하지도,
육체가 정신을 단순히 따르지도 않는다.

둘은 언제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맞물려 있다.
경계는 흐릿하고, 상태는 유동적이다.
이분법적인 틀로는 이런 상호작용을 담아낼 수 없다.
‘정신이냐 육체냐’는 질문은
애초에 너무 단순하게 구성된 문제일지도 모른다.


MBTI 역시 그런 플라톤적 이분법의 현대적 변형이다.
E냐 I냐, 감정형이냐 사고형이냐.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은 극단에 머무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성격을 4가지 측면에서 둘로 나눈 mbti(출처:뚝딱뉴스2022.4.29)

사람은 고정된 성격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면을 드러낸다.
스스로를 보완해가며 살아간다.


아무리 대문자 E인 사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고,
평소엔 내성적인 사람도
어떤 순간에는 사람들 속에서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번 MBTI로 ‘나는 E야’, ‘나는 I야’라고 규정되면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를 그 틀에 맞추게 된다.
혼자 있고 싶은 날에도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의심하게 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난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하고 물러서게 된다.

이런 규정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굳게 만든다.


무언가를 둘로 나누고 대조하는 방식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상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에서는 오히려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존재한다.

이해란 그런 복잡함을 감수하는 일이다.
정리된 답을 포기하고,
계속 들여다보는 일.
그래서 진짜 이해는 늘 불편함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어떤 깊이에도 도달할 수 없다.

나는 누군가를 네 글자로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천천히 바라보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관계.
이해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 글도 그런 이해의 일부가 되었으면 한다.
누군가를 분류하지 않기로 한,
한 사람의 조용한 다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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