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반대는 평온이 아니라 몰입이다
요즘 한 약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이름은 '안정액'이었고, 광고 문구는 이랬다.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약은 있다.”
이 짧은 문장 하나에 꽤 많은 전제가 깔려 있다.
불안은 질병이고, 인간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존재이며,
해결책은 결국 소비 가능한 무언가라는 이야기다.
그 광고를 본 날,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건 광고의 과장이 아니라, 우리가 불안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불안을 없애야 할 ‘증상’처럼 여기고,
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실패자로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 때가 있다.
나는 그 광고와 전혀 상관없는 순간들 속에서
불안이 흐릿해졌던 경험을 몇 번 떠올릴 수 있다.
그건 약을 먹어서도, 마인드컨트롤을 해서도 아니었다.
불안을 잠시 잊을 만큼 완전히 집중했던 순간들이었다.
수영을 배울 때였다.
초보자에게 물은 늘 두려운 대상이다.
숨이 차고, 물이 코로 들어오고, 손발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허우적댄다.
물속에 있을수록 내 몸은 더 가라앉았고, 그럴수록 나는 더 버둥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을 빼고, 지금 해야 할 동작—팔, 다리, 호흡—에 집중하면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떠 있는 느낌. 생각이 사라지고, 지금 움직이고 있는 내 몸 하나만 남는 순간.
그때 나는 불안을 이긴 게 아니라, 그걸 잊을 만큼 몰입한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내가 가르치던 한 학생과의 상담 자리였다.
그 아이는 반에서 늘 전교 1등을 했지만,
항상 자기보다 못하던 친구가 더 앞서나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했다.
그 친구가 선행 학습을 더 했고, 더 나은 학원을 다닌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굳이 다른 친구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선생님도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걱정될 때가 있어.
근데 그렇다고 해서, 누가 공부를 못하게 방해할 수는 없잖아.
그냥 너는 너한테 주어진 공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면 돼.”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안다.
그 조언이 듣기엔 쉬워도, 실천하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늘 불안하게 만드는 것 쪽으로 눈이 먼저 간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몰입은 자의식을 줄이고, 불안을 작아지게 만든다는 것.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몰입 상태를 “Flow(플로우)”라고 불렀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편안할 때가 아니라,
자기 능력과 도전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완전히 빠져든 순간이라고 그는 말했다.
몰입 상태에서는
자의식이 줄어들고,
시간 감각이 왜곡되며,
과제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때 우리는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잠긴다.
칙센트미하이는 말한다.
“행복한 사람은 평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이 사유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절묘하게 맞닿아 있다.
불교는 ‘불안’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를 보라고 말한다.
그건 대개 집착, 통제 욕구, 결과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즉 지금 이 순간 외에는 붙들 수 있는 게 없다는 자각이
불교가 말하는 해탈의 출발점이다.
어찌 보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은 불교의 사유를
현대의 심리적 언어로 다시 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불교는 ‘놓아라’라고 말하고,
칙센트미하이는 ‘빠져들라’고 말한다.
둘 다 불안을 정면에서 제거하지 않고, 그 위를 흘러가게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불안을 없애려 하기보다 작아지게 만드는 순간을 더 자주 떠올리려 한다.
아주 깊이 빠져든 어떤 시간.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있었던 순간.
광고는 불안을 팔지만,
삶은 몰입으로 회복된다.
불안을 이기려 애쓰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조금 더 가까이 머무는 것.
어쩌면 그게,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평온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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