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

by 김선희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지독하게 고적한 이곳, 사위는 온통 까맣고 저 위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별들만이 유일한 빛이다. 살을 에일만큼 춥진 않지만 대신 뼛속에 찬바람이 들어오는 오클랜드의 겨울, 으스스한 한밤에 무료함을 씹고 있었다. 아들은 눈을 부라리며 패드 속 영상에 심취해 있었고 나는 어둑하고 흐리멍덩한 조명아래서 미간을 찌푸리며 책의 활자를 훑고 있었다.

두두둑

그때 갑자기 물줄기가 바닥을 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나? 하지만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게 분명했다.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뭔가 섬뜩한 기운을 느낀 나는 그제야 후다닥,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들어 보았다. 워메, 이게 웬일인가, 천정의 조명이 들어간 틈새로 물줄기가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었다. 처음에는 방으로 가는 복도 천장, 그다음엔 주방, 마지막에는 거실. 물줄기는 알 수 없는 라인을 따라 순서대로 떨어지고 있는 듯했다.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카메라를 찾아 동영상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 처음엔 에이젼, 그다음엔 유학원, 마지막엔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동영상을 보냈다. 에이젼에게 보낼 때는 급한 일이라는 제목을 달아 문법이고 뭐고 상황만 알리는 식으로 메일을 보냈다.

Emergency

지금 급해, 천정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어. 이것도 집이냐? 나 지금 되게 당황스러워. 빨리 핸디맨을 불러줘.

유학원 원장님에게는 카톡으로 밤늦게 죄송합니다,라는 적당한 예의를 섞어 다급함을 알리는 글과 함께 영상을 보냈다. 뉴질랜드는 업무가 끝난 시간에는 절대, 아무리 급한일에도 응답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예외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라고, 혀를 날름거리며 조롱하듯 휴대폰과 메일은 잠잠했다. 괜스레 도와줄 수도 없는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결국 내린 극단의 조치는 물이 떨어지는 곳에 냄비를 받쳐놓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거였다. 물이 차면 갈고, 또 갈고. 밤을 꼴딱 새웠다.


다음날,

지독한 피곤함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윗집에서 문제가 터진 거라는 걸 예감한 나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윗집문을 두드렸다. 역시, 뭔가에 밤새 시달린 듯 초췌한 얼굴로 윗집남자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젯밤 세탁기 배관이 터졌다는 것이었다. 슬쩍 안을 보니 흥건한 거실바닥, 건조대에 널어놓은 러그. 밤새 고생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에이젼 쪽에서 아침 일찍 전문가를 보내줘서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속에 채워져 있어야 할 무언가가 천정을 뚫고 나온 물줄기처럼 훅!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드넓은 바다에 두둥실, 범선처럼 혼자 떠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에도 유학원에선 연락이 없었다. 야속했다. 결국 직접 전화를 걸어 과장님에게 주저리, 주저리, 어젯밤 일을 쏟아부었다. 다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기분 나쁘고 걸근거리는 것이 남아있는 듯했다. 나는 혼자 구시렁 대며 외로움을 호소했다.

그래, 이만하면 됐어. 올해만 잘 보내고 내년엔 꼭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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