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의 스콜처럼 비가 쏟아지던 하늘은 얼굴도 말라버릴 듯 쨍쨍하다. 1년 만의 한국은 생경했다.
한 달 동안 아래의 일들이 있었다. 이것은 '외국에서 돌아오기'만이 아닌 '집 비운 지 1년'의 이야기이다.
1. OO이가 가득한 세상
그들은 집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방문에도, 변기에도, 냉장고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기가 막히게 안다는 듯 곰팡이는 파고들어 있었다. 감사하게도 귀국 전 친정 부모님이 대청소를 해두셔서 사실 보이는 대부분은 말짱했다. 나는 또 철없이 부모님의 고생은 모른 채, 1년? 깨끗하고 아무렇지 않아-라고 할 뻔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1년은 4계절의 시간이라 우리에게 하루하루 흔적을 보여주었다.
1년 동안 집을 비우면 당신은 무엇부터 해야 할까. 비어 있는 냉장고, 칫솔과 샴푸와 비누는 있는지, 우편물은 얼마나 쌓여있는지, 이런 것들부터 떠오를까? 일단 청소된 집에서도 지난 한 달 곳곳의 틈과 뒤와 밑에서 어김없이 곰팡이를 보았다. 뒤집어진 채 죽어있는 벌레들도 덤으로 따라온다. 마치 사람이 살 때에는 어디선가 숨 죽이고 있다가 사람이 나가고 나면 활개를 치는 듯한, 그것들 곰팡이는 집안만이 아니었다.
"누나, 차 이제 못 쓸 것 같은데"
호주로 출국하고 한 달쯤 지나, 집을 봐주러 온 동생의 말이었다. 뒤이어 보내준 사진은 공포체험 그 자체였다. 내가 아끼는 나의 흰둥이 빵개(딱정벌레의 경상도 사투리) 자동차는 푸르고 기다랗게 자란 곰팡이들로 내부가 모두 뒤덮여 있었다. 그냥 초록색이 조금 묻은 것이 아닌 괴물처럼 곰팡이가 자라고 매달려 차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내가 출국하기 전 비가 억수로 내려 물이 가득했겠지. 축축했지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사람 없이 주차장에 혼자 있다고 저렇게 파고들어 덮어버린다니. 방전은 당연한 일, 예상할 수 있기에 긴급출동이 되는지 물어봐 두었지만 곰팡이는 전혀 생각에 없던 것이었다.
출국하기 전 우리가 한 일은 치우고 비우고 버리는 것이었다. 돌아와 한 달도 우리는 비워둔 집에서 또한 다시 버리고 닦고 치우고 했다. 여러 번 닦아도 독한 세제를 써도 굳어버린 곰팡이 자국이나 먼지들 변기 속 묵은 때들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어디에나 있는 존재들로 빈 집이 채워진 듯했다. 사실 들어와서 며칠은 알 수 없는 공기의 냄새들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 집에도 무언가 자란다.
기억한다. 혼자 시골집에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집이 한참 비어 있는 동안 그 마당과 마루와 기와에서는 풀이 자랐다. 아무도 뿌리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들어와 온 집안을 채운 풀들과 공기들은 집을 가득 메워서 다시 찾아가서 대문을 열었을 때 그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가득 메워져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귀한 기와집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2.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없는
지난 1년, 작은 정원이 있는 오래된 하우스에서 살던 우리는 주상복합의 공동주택인 한국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위층의 알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로 5층과 1층을 오가며 가라지가 아닌 지하 3층부터 5층까지 주차장이 있는 곳, 창문을 열면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문을 닫으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밖과 차단되며 에어컨이 방방 곳곳마다 달려 있는 세상 편리한 곳.
그렇다 우리는 거기서, 똑-똑- 밤낮 떨어지는 수도꼭지의 물을 보며 배관공이 오기를 몇 주나 기다렸으며, 열리다 바닥에 끼어버리는 욕실문을 반쯤 열고 살아갔으며, 운전면허증이든 카드든 유심이든 무엇이든 1주일은 기본이며 한 2주쯤 그냥 잊어버리고 살아야 해결되든 배달되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황당했고 날로 답답했으나 살면서 그 속도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젠 한국의 이 편리함과 속도가 무섭기도 하다.
배달 아저씨들은 얼마나 빠른지, 밤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도착해 있는 신선한 식자재들이 반갑고, 급한 대로 건물 앞 편의점이든 김밥집이든 시켜 먹든 사가지고 오든 얼마나 쉽고 빠른가 말이다. 저녁 4시 석양이 지는 시간이면 부랴부랴 집으로 걸음을 빨리 옮길 필요도 없다. 한국의 불빛은 길고 사람들은 늦도록 안전하게 거닐고 있다. 온 동네 사람도 무엇도 없어 캄캄하던 그 어둠이 오히려 겁나는데 둘러봐도 가게 하나 안 보이는 브리즈번과는 다른 곳이란 말이다.
1층에서 교대로 건물을 돌보시는 경비 아저씨들을 보면 그저 안심되고 반가운 데다가 챙김을 받는 듯한 그런 공동의 주택. 무언가를 버리고 정리하고 치우고 손보고 고치고 관리하고 챙기고 물어보고 자르고 다듬고 다시 고치고 조마조마하고 그런 것 없는 우리가 잘 알고 세상 편리한 한국의 집 말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며 적재적소에 딱딱 맞게 있는 가전 가구들과 삶의 동선과 청소의 흐름도 이토록 편할 수가 없다. 공간은 좁아졌지만 각자의 방과 공동의 공간에서 우리는 삶의 자리를 다시금 찾고 있다. 그러나 그 느림에 또한 맞춰진 터라 빠르고 잘 맞추며 최선을 다하는 한국이 조금 두렵기도 하다, 가령 오늘 아침 수영장에서
'집에서 샤워했어도 다시 샤워하고 수영복 착용, 여기는 사우나가 아닙니다. 10분 내로 샤워하세요.'
와 같은 문구가 샤워부스마다 노란색으로 붙여진 것을 보고 꼼꼼하고 깨끗하며 원칙을 강조하고 그것에 맞게 빠르고 분명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한국인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했다.(안에 수영복 입고 와서 풀장 옆에서 훌떡훌떡 겉옷을 벗어 재끼고 바로 풀장으로 입수하는 브리즈번 사람들이 처음에 어찌나 이상하든지 따라 하는 남편에게 그러지 말라고 핀잔하던 나는 하마터면 한국에서도 수영복 입고 나설 뻔했다.)
뭐 그러면 어때 괜찮아-가 기본인 호주에서는 그냥 넘어가거나 니 편한 대로 하거나 무심한 일이 많은데 한국은 규칙도 질서도 약속도 청결도 모두 완벽하게 잘 해내야 하기에 빡빡해 보이지만 또한 분명하고 확실하다. 와서 주문한 카드도 다음날 도착했다. 아니 도착 전에 앱카드를 신청 당일 바로 쓸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카드 신청 후 잊어버리듯 2주가 지난 다음에야 도착했으니 정말 한국은 모두 빠르고 또한 없다 여유가.
3. 이토록 높고 빠른
마침 오늘 아침 나의 이웃 엘레나에게 메일이 왔다. 우린 잘 도착했고 일상을 시작했다며 와들리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자, 고맙게도 내게 그곳의 소식들을 적어 보낸 것이었다. 가령 우리가 살던 집엔 대가족이 들어와 차가 잔디밭까지 주차되어 있다든지, 2032 브리즈번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엘레나 집 옆 공사현장 이야기였다.
그곳은 우리가 막 브리즈번에 도착했을 때에도 한창 작업 중이었다. 2채 정도의 비슷하게 생긴 집을 짓는 현장이었는데 지붕이나 기둥과 같은 큰 틀은 이미 잡혀 있었다. 종종 공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심하거나 크지 않았다. 그들은 짓고 또 짓고 그리고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던 1년 동안 계속 짓고 있었는데 우리가 떠나는 날에도 아직 미완성이었다. 하우스 2채를 그것도 온돌이 없는 선샤인 브리즈번에서 냉난방 복잡한 시설 없이 짓는 집 2채가 1년이 넘어도 끝나지 않는다니, 엘레나는 오늘 아침 메일에서도 아직 안 끝났어! 라며 이제는 좀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1년에 2층짜리 하우스 2채는 거기서 무리였다. 한국은,
"세상에 이것 좀 보아. 새 세상이 되었네"
시골쥐가 따로 없었다. 돌아보면 못 보던 건물들 게다가 고개를 한껏 들어야 보이는 이 높이라니. 호주가 우리에 비해 77배 큰 땅이 있으니 여유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1년 사이 우리나라는 이토록 빠르고 놀랍도록 높은 건물을 짓거나 새 건물이 서거나 새로운 공간과 가게들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볼 때마다 세상에-의 연발이랄까. 대단한 우리나라의 대단한 건축업계 사람들 몇몇을 와들리로 보내 그 집을 완성해주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작은 땅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보니 빠르게 움직이고 더 크게 높여가고 조금 더 부지런히 가꾸고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폐허란,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그 허허벌판에서 이런 도시와 세상을 만들었고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시금 대단하게 느껴졌다. 땅은 물론이며 자원이 차고 넘친다는 호주에 비해 땅도 작고 자원도 없는 이 나라 사람들은 그 바지런함으로 짧은 시간 많은 것을 만들고 이룩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그 빠름과 발전의 가속도를 가늠할 때 어김없이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와 같은 것들이 떠올랐으므로 씁쓸함 또는 염려가 따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4. 수영장이 축소판이라면 믿으시겠어요?
한국에 와서 5번 정도 수영장에 갔다. 아침 8시 수영, 12시 수영, 저녁 9시 수영 이렇게 다양한 시간대의 자유수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사람이 많다
끝없이 붐비고 많다.
많다
이다. 어느 수영장이든 6개 정도의 레인에 수 십 명의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어떤 시간을 막론하고 한 레인에 15명 정도는 기본, 앞사람이 출발하고 어떤 틈을 두기엔 뒤에 사람이 많아서 후다닥 출발을 하고 그러다 앞사람 발에 손이 닿고 조심스러워 물어서다 뒷사람 손에 발이 닿고 멈칫하다 옆레인의 휘젓는 팔에 부딪힌다. 좁은 우리나라를 탓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맞다. 호주는 땅이 넓고 인구는 우리나라의 절반이다. 내가 살던 동네의 수영장도 레인이 6~8개 정도인데 강습을 하는 몇몇 시간대를 빼고는 보통 들어오는 것도 자유 가는 것도 자유, 1 사람이 1 레인을 차지하고 천천히 수영을 할 수 있다. 땅이 넓으니 주차장도 넓고 수영장도 넓어서 굳이 지하로 파지 않고 대부분 지상에 수영장이 있으며 위가 뚫려 있는 야외 수영장이라 해가 뜨거워 타기도 쉽지만 밤에는 별도 볼 수 있다. 50미터가 기본이며 자동차처럼 우리나라와 반대로 좌측통행이므로 왼쪽으로 출발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온다. 유유자적이라 아주 한가롭고 좋겠다고? 그러나 나는 아주 천천히 수영했다. 다시 말해 속도를 낼 필요가 없으니 기록을 잰다면 엉망일 것이다. 그냥 쉬엄쉬엄 가고 오는 수영이었으니 시간도 오래 걸렸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날쌔졌다. 거기선 50미터 풀장 10바퀴 1킬로를 하는 것을 기본으로 쉬엄쉬엄 1시간은 걸렸는데 25미터 풀인 우리나라 수영장에서 무려 20바퀴를 해야 하는데 30분도 안 걸리는 것 같다. 앞과 뒤의 사람을 의식하느라 나는 아주 속도가 빨라졌다. 그만큼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해진 느낌이다. 조금 늦게 도착해도 해당 시 50분에 마치는 해당 차시 수영에서 헉헉거림을 느낄 정도다. 아주 제대로운동이 되고 있다. 수영장에 가득 찬 사람들을 처음 보았을 때 답답한 마음으로 여유로운 호주의 수영장이 그리웠다면 지금은 아니다. 뭔가 바글바글해도 함께 열심히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동지들로 보인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애틋하게 지난 70여 년을 지내온 것이다. 그중에서 40여 년을 함께 한 나의 입장에서도 수없이 변하고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그 70여 년을 오롯이 다 지켜본 우리 아버지나 어머님 세대는 더더욱 이 나라가 가련하고 대단하게 여겨질 것이다. 모두가 참 열심히 살았다. 그게 나는 그렇게 짠하고 기특하다.
5. 그러나 다시 No Worries
1년 동안 호주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No Worries"
걱정 마 괜찮아 문제없어내가 해줄게 좋아요 네 됩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렇게 수많은 상황에서 노 워리즈는 긍정의 말을 건넨다. 그 특유의 긍정적 마인드로 괜찮아라고 말하는 호주 사람들은 어디서든 인사하고 말을 거는 스몰토크는 물론 살짝만 닿거나 지나도 Sorry라고 말하는 기본 태도랄지 지나가는 차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여유와 도로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배려와 같은 것들, 뭐 그런 것들이 부러웠다. 우리는 언제나 바쁘고 빠르며 완벽하고 최선이었다. 그것은 훌륭한 것이나 또한 안쓰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여유가 없으니 지나가다 인사는 참으로 낯선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올라가세요."
그냥 좀 이상해 보여도 한 달 동안 과도하게 인사를 했다. 전화 상담원, 경비실, 엘리베이터, 들어간 가게와 점원 그리고 무엇보다 버스 운전기사님께. 모두 반갑게 받아주고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렇지 내가 아는 한국인은정이 있고 좋은 사람들. 다만 표현하기가 몸에 배어있지 않을 뿐. 우리는 언제나 정답고 따뜻하다. 바쁨과 빠름 속에서 우리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잠시 잊었을 뿐.
"아이고 어서 오세요."
버스에 오를 때마다 기사님들께 인사를 했더니 어떤 기사님이 너무나 좋아하신다. 마치 딱딱한 표정으로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가 무언가 즐거운 일을 만난 듯. 누가 내게 호주 어땠어? 물으면 나는 농담처럼 호주에 가서 버스 운전사가 되고 싶어요-했다. 버스에 오를 때마다 하이-하고 인사를 하고 내릴 때마다 땡큐-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버스가 작고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2개의 몸체가 이어진 긴 버스에서 기사님이 혹 바빠서 못 볼지라도 그들은 타면서 그리고 내리면서 버스 기사님께 인사를 했고 잘 데려다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운 표정이었다. 맞다, 얼마나 고마운가.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주셔서.
그런 것들이 좋았고 부러웠다. 나는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브리즈번에서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살아보려고 한다. 우리나라를 좋아하면서 기특해하면서 또한 자랑스러워하면서. 브리즈번의 여유와 농담과 언제든 인사를 건네는 마음과 조금은 천천히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너그러움으로 말이다. 그것이 지난 1달 한국에 돌아온 나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