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엄마도 괜찮아-1편
우울증 약을 먹은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를 조금 사람들이라면 쟤가 어떻게 우울증이야? 할 수도,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우울증이 좀 있나? 할 수도.
제일 예쁠 때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었던 나는 남들보다 좀 일찍 결혼했다. 누구보다 아팠고 뜨거웠던 날들을 지나가며 청춘이니 아프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어서 그 청춘을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별 고민 없이 결혼을 결정했던 그때의 나는 숙제하나를 일찍 해낸 기분이었던 것 같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해결해 버리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결혼을 떠올리면 순백색의 드레스만 생각했던 이십 대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엄마는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되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아가씨 교사일 적, 애 엄마 교사들이 '출근이 더 편하다'라는 말을 듣고서도 남 일처럼 넘겼던 나의 무신경함은 지금 생각해도 큰 문제이다.
'아이를 낳는 다면 두 명은 낳아야지.'라고 생각했고 자궁근종 수술로 난도질이 나버린, 자궁벽이 너무 얇아져 터질 위험이 있고 그렇게 되면 아기도 엄마도 위험하다는 대학교수의 말을 듣고서도, 전치태반 고위험 산모가 되어 임신 기간 내내 살얼음판 걷듯 지냈으면서도, 호기롭게 두 아들을 두 돌 터울로 낳았다. '애착형성을 위해선 세 돌까지는 엄마 손으로 키워야지.'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두 아들을 키운다고 5년을 내리 휴직을 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 결정에 '나'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간과하고 있었던 '나'는 학교가 참 좋았던 교사였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주말에도, 방학에도 반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았던 교사였다는 것.
우는 아이를 달래려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하던 어느 날, 아파트 담장 너머로 3월이 된 아이들의 짹째글한 소리에 마음이 일렁였던 것이 떠오른다.
어느 날의 거울 속에는 웬 아줌마 하나가 서 있었다. 애를 키우며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며 화장을 하는데만 삼십 분은 훌쩍 넘기던 빛나던 나는 사라졌다. 목 늘어는 티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 바지, 미용실을 언제 갔는지도 모르겠는 머리는 하나로 댕강 묶고 화장이 다 뭐야, 로션조차도 아이 씻기며 발라주던 베이비로션이나 겨우 발랐던 날들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 아이들도 예뻤으니까. 안 괜찮았어도 그땐 괜찮아야 했다. 내 배를 통해 세상에 나온 아이들은 내가 아니면 안 됐으니까. 나는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다.
세 돌을 넘겼던 첫째가 가와사키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던 날이 떠오른다. 비빌언덕이 없던 육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던 둘째마저 장염에 걸려 그 두 아이를 한 병실에서 혼자서 봤다.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아기들도 좁은 병실이 답답했는지 아파서 죈종일 칭얼 대면서도 난리를 쳤다. 두 링거줄이 꼬이는 것을 풀고, 또 풀면서 한 놈은 뒤로 업고 한놈은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두 링거를 단 수액걸이를 밀고 다녔다.
근데, 그때 그것은 정말 힘들더라. 가와사키 걸린 첫째가 심장에 변형이 왔는지 심장 초음파를 봐야 했던 날. 그날의 서러움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심장 초음파는 세밀하게 확인해야 하는 일이라 보호자가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장염에 걸린 둘째도 발목에 링거를 달고 있었다는 것.
그때 남편 회사는 그 병원과 차로 10분 거리도 되지 않았는데 올 수 없었다. 가족회사를 다니던 그, 그런데 가족이 아픈데 그 잠깐을 나올 수 없었다. 나는 아픈 두 아이를 혼자서도 못 보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혼자서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18개월의 둘째는 십팔, 욕이 나올 만큼 애기띠에 안겨있는 것을 싫어했다. 내리겠다며 비명을 질러대는 아기를 억지로 업고 흔들며 첫째가 심장 초음파를 하는데 움직이지 않도록 봐야 했다. 그 상황에서 고마웠던 것은 첫째이다. 평소라면 얘도 참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의 미친 네 살인데, 그때의 엄마가 힘들어 보였는지 찡얼대며 심장초음파를 견디다 잠깐 낮잠이 들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다섯 시간은 맞춰야 한다는 수액까진 못 견디겠더라. 한 놈은 뒤로 업고 당시에도 아팠던 한 놈은 걷게 하며 또 다른 손으로는 수액걸이를 밀면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난 혼자서 아픈 두 아이를 병원에서 견뎌야 하는 엄마였는데, 심장초음파를 보기 위해 전원을 간, 아동병원이 아닌 그 병원에서는 못 견뎠다. 결국엔 수액 맞는 것을 중단하고 다시 아동병원으로 돌아왔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것은 내가 엄마가 되고 난 후, 가장 외로웠고 서러웠던 시간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마, 평생이 가도 잊히지 않을 기억의 조각이다.
만만치 않은 두 애를 키우며 내 애간장은 수도 없이 녹았다. 수많은 육아 서적을 섭렵하며, 책으로, 책대로만 키우려고 동동 거렸던 날들이 지나간다. 초보 엄마라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몰입을 잘하는 나는 육아에도 과몰입을 했다. 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치 예뻤던 아이들, 그땐 정말이지 괜찮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훅- 가버렸는데 저 깊은 곳에 꽁꽁 가둬두었던 '나'가 고개를 들더라. '엄마'라는 어마어마한 이름 아래 영 잊혀져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용케도 살아남아 끝끝내 버티고 있었다. 아예 잊혀 버렸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타고난 성장 욕구란 것이 눈치도 없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갑자기 뭣도 아닌 나 같아서 뭐라도 되고 싶었다. 이미 5년을 육아에 쏟아버렸고, 복직을 하고서도 육아의 8할은 책임질 수밖에 없던 나는 승포자(승진포기자)의 수순을 밟아 가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출발선상에 있던 사람들, 심지어 한참 후에나 출발했던 그들은 벌써 저만큼씩 성큼성큼 앞서 가고 있는 것을 보니 속이 아려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이었더라. 저 밑바닥에서 수없이 참아왔던 '나'가 그간 주려왔던 허기를 단숨에 채우려는 듯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여전히 나는 두 아이의 엄마였고, 그 만만치 않은 아이들의 육아에 비빌 언덕이 없었던 것은 일하는 엄마가 되었는데도 변하지 않았다. 분명 종일 종종 거렸는데도 제자리걸음인 기분.
참, 바쁘게 살았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새벽 네시반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을 했다. 꾸준히 감사 일기를 썼고 운동을 했고 책을 읽었다. 빼곡한 체크리스트에 V 표시하는 맛으로 숨 가쁘게 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그 와중에 한국사 검정능력시험 1급 시험을 봤는데 80점 이상만 맞으면 되는 그것을 한 문제가 틀렸고 백점을 못 맞았다며 속상해하기도 했다. 미친 듯이 혼자서 홈트 하면서 돈 안 들이고 다이어트에 성공했고 배에 왕자 복근을 새기고는 바디프로필만 세 번이나 찍었다. 러닝에 맞들여서 하프 마라톤은 껌처럼 달리다가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는 여자 하프 10위를 하고 쌀 한 포대를 받아 들고 온 적도 있다. 간신히 재미없는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가기 위한 나만의 이벤트들을 깔짝깔짝 해내고 있었다.
당시 남편도 회사 일로 바쁘다며 주 2-3회는 새벽 3-4시에 들어오거나 아침이 되어 들어오거나 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건 다 괜찮았는데 전근을 간 학교에서 모두가 기피했던 폭탄 학년을 맡았고 내가 맡은 학급에는 심각한 폭력성을 지닌 adhd 학생이 있었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며 갑자기 반 친구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려버리던 아이, 도마뱀을 잡아다가 교실에 풀어놓고 뱀을 잡아 죽이던 아이와 1년을 함께 보내면서 멘탈이 탈탈 털렸다. 그때, 번아웃이라는 게 왔던 것 같다.
직장인 건강검진에서 우울증이 나왔다. 요즘 뭐, 개나 소나 다 있는 우울일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당시 폭탄학년을 함께 맡고 있던 동료교사들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린다던가 너무 힘들어서 병원엘 갔다던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그래서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자기 계발서적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면 괜찮아지겠지, 명상을 하면 괜찮아지겠지, 한 번 세게 달려버리면 다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던 날들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그다음 해, 그러니까- 작년.
얼토당토않은 민원을 받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것일까. 요즘의 교실에서는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책임져야 했다. 그 희생물이나 화살받이는 무조건 교사여야 했다.
간신히 매달리고 있던 동아줄이 '탁' 끊어져 버렸다. 밑도 끝도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내 울었다. 학교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던 날이었는데 그날도 남편은 술에 취해 새벽 3-4시에 들어왔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다. 다음 날 결근을 했고 또다시 내내 울었다.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이러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두려움이 올라왔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죽으면 저 아이들은 어떡하지.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할 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네이버로 무작정 정신과를 검색했다, 맘카페에서 이름난 곳부터 찾아 전화를 했다. 그런데 진료를 받으려면 대기가 일주일부터 길게는 한 달이었다.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지.
동료 교사가 알려주었던, 예약 없이도 받아 준다는 병원을 찾아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처음 보는 나이 든 의사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 말에 나는,
죽고 싶어서 왔다는 말 한마디만 겨우 꺼내놓고 하염없이 울었다.
작가의 말)
영 잊혔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이들 영재원에 들여보내놓고 혼자 카페에 앉아 타자 두들기며
많이 울었네요.
다음 이야기도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