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문화와 함께 했던 그 시절 이야기
공주는 칼국수, 짬뽕처럼 면요리가 맛납니다
그중에서도 공주 하면 칼국수가 유명합니다.
맛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다.
공주 칼국수의 키워드는 <다양성>이다.
여러가지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맛을 낸다.
그래서 다양한 맛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명하다.
공주는 <다양함>이 바로 고유한 특징인 것이다.
그럼 그 다양함이 왜 생겼는지
옛 공주로 떠나보자
1395년(태종 4년) 충청도가 성립되었다.
이 당시는 충주에 충청감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1602년(선조 35년)에 공주에 충청감영이 이전했고,
대한제국까지 이어져왔다. (출처: 위키백과)
공주는 어사길과 찰방이 존재했던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면
근대시대(일제강점기포함)에 접어들면서
공주에는 조선인이 다녔던 보통학교들이 생겼다.
아울러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까지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공주에 있는 중/고등학교는 대부분 100년이 넘거나
100년 가까이 된 학교들이 많다.
이런 역사 속에서 성장한 공주는 충청도의 교육 중심도시가 된다
물론 학교도 많아서 그럴 수 있지만,
교통이 발달하다 보니 접근성이 높아서
외부에서 유학오기 편한 지역이 되었다.
공주지역민 이야기에 따르면
70년대 이후에는 중/고등학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서울 명동거리가 크리스마스날 어깨가 부딧칠 정도로 사람이 많았던 것처럼
현재 제민천 인근 왕도심(왕이 살았던 곳이라 왕도심이라 함)에는
학생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이 당시 학생지역을 보면 공주 토박이보다는
외지에서 유학온 학생이 많았다.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하는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공주에는 산업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 수익의 수단이
바로 자취와 하숙산업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하숙을 치기 위해 많은 외지인이 공주로 들어왔다.
이분들이 칼국수를 자신의 고향 맛으로 음식을 내다보니
굴이거나, 고기이거나, 멸치이거나 등
다양한 칼국수가 존재하며 지금까지 이어왔다.
공주 전통의 칼국수보다는 다양한 칼국수가 존재했다.
그럼 왜 칼국수 인가? 국수도 혹은 다른 음식도 있었을 텐데
하숙은 주인이 밥을 챙겨줘야 하는데 값싸게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것을 제공해야
하숙집 입장에서는 이윤이 많이 생겼다.
이처럼 이윤을 많이 내기 위해서는 원재료를 값싸게 공급받을 필요성이 있는데
광복 이후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밀가루가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밀가루는 충청도 지역에서는 군산항을 통해 들어오는 밀가루가
충정도 중심이었던 공주에 모였고
공주에서 충청도 전역에 배송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칼국수의 재료인 밀가루의 집합장소로
잉여밀가루로 인해 값싼 재료를 얻기 쉬웠다.
국수는 조선시대에도 양반들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국수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기계에서 면을 뽑다 보니
공정과정이 길어서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칼국수는 밀가루를 하숙집 주인이 직접 반죽해서
칼로 썰어서 국물을 내고 끓여 내는 것으로 생산단가가 싸가 들었다.
이래서 칼국수가 많이 보급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공주의 칼국수는 <다양한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칼국수 맛집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